[10월24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 영상1. 2009년 KIA타이거즈 나지완 끝내기 홈런~ 한국시리즈 우승 ]

 

 

 

 

▶ 2009년   프로야구 KIA, 12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

 

▶ 2005년   천재소년 송유근(8), 국내 최연소 대학생으로 인하대 2학기 수시모집에 합격

 

▶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 ‘특목고 정상화 방안’ 발표

 

▶ 2002년   美 연쇄자격 용의자2명 체포

 

▶ 1999년   전문경영인으로 재계 첫 그룹회장 역임한 정수창씨 별세

 

▶ 1999년   델 라 루아,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 1999년   모로코의 할리드 하누치, 시카고 마라톤서 세계신기록 (2시간 5분 42초) 수립

 

▶ 1994년   안기부 6.25당시 참전했다 포로로 잡혀 납북된 조창호씨가 43년 만에 북한을 탈출,

 

                  해상에서 표류중 수산청에 의해 구출됐다고 발표

 

▶ 1994년   충주호에서 충주호관광선 소속 충주제5호 화재(29명 사망 및 실종)

 

▶ 1981년   싱가포르 대통령에 챙가라 비틸 나이르 취임

 

▶ 1980년   공주사대, 백제토성 발굴

 

▶ 1979년   미국, 북한 여행제한 철폐 확인

 

▶ 1977년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

 

▶ 1974년   미국 공군, 사상최초로 ICBM의 기상(機上)발사 성공

 

▶ 1974년   동아일보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선언

 

▶ 1974년   소련의 바이올린 연주자 오이스트라흐 사망

 

▶ 1973년   이집트-시리아와 이스라엘간의 10월 전쟁 종결

 

▶ 1972년   남북적십자 3차 본회담 (~26일 평양)

 

▶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에 선출

 

▶ 1968년   서울 광장시장과 남대문시장 상인들의 조세 저항 데모

 

▶ 1966년   마닐라에서 월남참전7개국 정상회담 개막

 

▶ 1964년   함태영 前 부통령 별세

 

▶ 1964년   잠비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2년   케네디, 흐루시초프로부터 세계평화보장에 관한 서한 접수

 

▶ 1962년   미국에 의한 쿠바봉쇄 시작

 

▶ 1962년   한국-과테말라, 국교 수립

 

▶ 1957년   크리스찬 디오르 사망

 

▶ 1951년   미국, 대(對)독일 전쟁상태 종결 선언

 

▶ 1949년   유엔극동경제위원회 한국가입 결의

 

▶ 1945년   군정청, 일본인 철퇴령 발표

 

▶ 1945년   유엔창설

 

▶ 1939년   나일론 스타킹 델라웨어 윌밍턴에서 발매 시작

 

▶ 1931년   국제연맹, 일본군의 만주 철병(哲兵)권고안 가결

 

▶ 1929년   주가 대폭락...대공항 신호탄

 

▶ 1912년   은행령 공포

 

▶ 1856년   한말의 개화사상가 유길준 출생

 

▶ 1632년   세균과 원생동물을 최초로 관찰한 미생물학자 레벤후크 출생

 

 

 

 

[ 사진2.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오늘의 역사 오늘은 2009년 KIA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 우승한 날이다.

‘전통의 명가’ KIA 타이거스가 나지완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에 힘입어 12년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에 복귀했다. 조범현 감독이 이끈 KIA는 24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2009 프로야구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 최종 7차전에서 5-5로 맞선

9회말 나지완이 짜릿한 끝내기 솔로홈런을 쏴 올려 SK에 6-5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이로써 시리즈 전적 4승3패를 기록한 KIA는 1997년 이후

12년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며 통산 10번째 패권을 차지했다.

 

 

[ 사진3.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타이거스는 전신인 해태 시절 9차례나 우승했지만 2001년 KIA로 간판을 바꾼

이후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끝내기 홈런을 포함해 홈런 두 방으로 3타점을

올린 나지완은 기자단 투표에서 총 61표 중 41표를 얻어 외국인 투수인

아킬리노 로페즈(18표)를 제치고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지난해

 KIA 사령탑에 취임한 조범현 감독은 SK 감독 시절이던 2003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에 3승4패로 패한 뒤 두 번째 도전에서 우승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 사진4.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반면 SK는 에이스 김광현과 마무리 전병두, 주전 포수 박경완 등의 줄부상

 속에도 KIA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해 3연패에

실패했다. 이날 7차전은 프로야구 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승부였다. 양팀이

총 15명의 투수를 투입하는 총력전으로 4시간 27분의 대혈투를 벌인 끝에

 KIA의 2년생 거포 나지완이 9회말 끝내기 홈런을 외야 스탠드에 꽂아 ‘호랑이

군단’의 팀 통산 10번째 우승을 견인했다.

 

 

[ 사진5.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경기 초반은 SK의 완승 분위기였다. SK는 4회초 박정권이 볼카운트 2-1에서

구톰슨의 4구째 바깥쪽 높은 직구를 결대로 밀어 쳐 좌측 파울폴 안쪽으로 살짝

떨어진 투런홈런을 뽑았다. 그리고 5회에는 안타 하나 없이 1점을 보태 3-0으로

 달아났다. 4회까지 무안타에 허덕이던 KIA는 5회말부터 반격에 나섰다. 선두타자

최희섭이 중전안타를 치고 나갔고 2사 2루에서 고졸 신인 안치홍이 2루수 옆을

빠져 중견수 쪽으로 흐르는 적시타를 날려 1-3으로 따라붙었다.


 

[ 사진6.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SK가 공수 교대 후 곧바로 다시 5-1로 스코어를 벌리며 승기를 잡은 듯 했지만

KIA는 기적 같은 반전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6회말 나지완이 SK 두번째 투수

이승호로부터 가운데 펜스를 넘어가는 투런홈런을 날려 3-5로 추격에 나선 KIA는

7회말 안치홍이 카도쿠라에게서 좌중월 솔로아치를 뿜어 1점 차로 따라붙었다.
KIA는 이어 김원섭이 우전 적시타를 날려 5-5 동점을 만든 뒤 1사 2, 3루의 결정

적인 역전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계속된 1사 만루에서 믿었던 최희섭이 헛스윙

삼진, 홈런왕 김상현은 1루수 파울플라이로 아웃돼 역전에 실패했다.

 

 

[ 사진7.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승부를 예측할 수 없던 경기는 9회말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5-5로 팽팽히 맞선 9회말 1사 뒤 타석에 나선 나지완은 볼카운트 2-2에서 채병용의

 6구째를 걷어 올려 좌측 펜스를 넘어가는 통렬한 솔로홈런을 날렸다.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한 잠실구장은 떠나갈 듯 함성에 휩싸였다. KIA가 마침내 10번째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 사진8. 2009년 KIA타이거즈 한국시리즈 우승 ]

 

 

글 출처 : http://www.koreatimes.com/article/print/55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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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3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백범 김구선생 기념관 ]

 

 

[ 영상1.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 ]

 

 

 

 

▶ 2009년   중국, 차스닥 개장

 

▶ 2009년   정명환 전(前) 향군 사무총장 별세

 

▶ 2009년   정명세 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총장 별세

 

▶ 2009년   삼성전자, 이동통신 4세대 'LTE 단말기' 세계 첫 공급 계약 성사

 

▶ 2004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강진 발생, 33명 사망 2100여명 부상

 

▶ 2003년   장제스(蔣介石) 전 대만 총통의 부인 송미령 여사 사망

 

▶ 2002년   체첸반군, 모스크바극장서 인질극

 

▶ 2000년   노사정위원회 '주40시간 근무' 합의

 

▶ 2000년   울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북한 방문

 

▶ 1998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영토-평화 교환협정'에 서명

 

▶ 1996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피살

 

▶ 1991년   캄보디아 내전종식 평화협정

 

▶ 1990년   남북통일 축구대회 서울서 2차 경기

 

▶ 1989년   헝가리, 40년간의 공산통치 종식하고 공화제 선언

 

▶ 1983년   레바논 주둔 미국, 프랑스 군사령부 폭파

 

▶ 1983년   제22회 세계양궁대회 여자단체 개인종합 우승

 

▶ 1982년   영국, 소련 KGB 거물요원 쿠지치킨 (전 테헤란주재 부영사)의 망명을 발표

 

▶ 1982년   하크 파키스탄 대통령 북한 방문

 

▶ 1980년   코시킨 소련수상 사임. 후임에 니콜라이 티호노프 임명

 

▶ 1978년   일본-중국, 평화우호조약 비준서 교환

 

▶ 1973년   스페인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사망

 

▶ 1973년   1차 석유파동. 메이저들의 30% 유가인상으로 세계경제 큰 혼란

 

▶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준공

 

▶ 1963년   여주 나룻배 참사, 49명 익사

 

▶ 1958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 1958년   소련, 애스완댐 건설에 1억달러 원조 발표

 

▶ 1956년   국제원자력기구 설립

 

▶ 1956년   헝가리 反蘇 봉기

 

▶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발족

 

▶ 1954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독일점령 종식 위한 파리협정 조인

 

▶ 1951년   동독경찰, 서베를린서 철수

 

▶ 1946년   유엔총회 뉴욕서 개막

 

▶ 1945년   조선신문기자협회 결성

 

▶ 1945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

 

▶ 1936년   한강 인도교 두 번째 개통식

 

▶ 1926년   레온 트로츠키, 소련 정치국에서 추방

 

▶ 1923년   김약수 등 사회주의자 160여명 서울에서 건설사 조직

 

▶ 1919년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 대한정의군정부(大韓正義軍政府)로 개칭

 

▶ 1893년   창랑 장택상 출생

 

▶ 1868년   최초의 영국 자동차를 만든 란체스터 출생

 

▶   930년   일본 제60대 천황 다이고 사망

 

 

 

 

 [ 사진2.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살해한 박기서선생 ]

 

 

 

오늘은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 안두희가 피살 된 날입니다.

안두희를 사해 한 사람은 바로 버스기사였던 '박기서'라는 인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6년 10월23일 오전 11시 30분경 박기서는

당시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살고 있던 안두희를 찾아가 '정의봉(正義棒)'으로

현장에서 처단하였습니다. "국부(國父)를 시해한 죄인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 볼 수 없다." 는 게 그의 지론이였습니다. 그럼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진3. 백범 김구선생 초상화 ]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의 한 아파트에 몽둥이를 든

중년 남성이 들이닥쳤다. 몽둥이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경기도 부천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는 박기서라는 평범한 가장으로, 

평소에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가게에 가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40Cm 크기)를 4천원 주고 사서 안두희 집으로 달려간 것이다.

박기서는 누워 있는 안두희에게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고 고함을 쳤다. 이어 준비해간 나일롱 끈으로 두 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했다.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마시면서 계속 두들겨 팼다. 이윽고 안두희는 욕된 인생을 마감했다.

 

 

 

 [ 사진4. 정의봉을 들어 보이고 있는 박기서선생 ]

 

 

 

 박기서 씨는 안두희 씨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신곡본동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한 후 경찰에 자수했다. 고해성사를 들은 이준희 신부는

이렇게 회고했다. "박기서 씨는 김구 선생을 죽인 안두희는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데 역사가 그 일을 하지 않으니 자신이 사명감을 갖고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안두희의 장례와 그 영혼에 대해 걱정하면서 성당에서 안두희 장례를

치르는데 도움을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박기서 씨가 구속 기소되자,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해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방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박기서 씨는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3.1절 특사로 1년 4개월만에 풀려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백주대낮에 평범한 시민이 법대신 사람을 죽인 것인가?

 

 

 [ 사진5. 백범 김구선생 서거 소식을 듣고 경교장 앞뜰에 몰려와 애도하는 시민들 ]

 

 

 

◈ 치밀한 각본에 의한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인 안두희, 특별한 보호를 받다

 

"탕~탕~탕~탕"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도 안된 1949년 6월 26일 낮 12시 45분.
초여름의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경교장(현재의 강북삼성병원) 2층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에서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선우진, 이풍식, 이국태 등과 경비경찰 두 명이 뛰어 올라갔을 때는 백범은

이미 운명한 후였다. 총을 발사한 포병 소위 안두희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다. 비서진이 안두희를 구타하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서대문 경찰서

경비주임에게 신병을 넘기려는 순간 갑자기 군인들이 나타났다. 기다렸다는

 듯이 경교장에 들어선 이들은 헌병대 소속 김병삼 대위 등 현역 헌병들로, 사건

발생을 미리 알고 인근에서 대기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완력으로 비서진과

경찰관을 밀치고 타고 온 스리쿼터에 안두희를 싣고 헌병사령부로 데려갔다.
헌병사령부에는 성묘를 간 장흥 사령관 대신 전봉덕 부사령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 사진6. 백범 김구선생 암살 사건 현장 지휘한 전봉덕 당시 헌병사령부 부사령관 ]

 

 

 

전봉덕은 범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의식을 되찾는대로 그 배후를 엄중 조사

하겠으나 단독 범행인 것 같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나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 등도 '단독 범행', '군과 무관', '한독당 내분' 등을

들먹이며 화살을 돌리는 데 급급했다. 다음 날 안두희가 특무대로 이송되자

기다리고 있던 김창룡 특무대장은 커피를 제공하고 경어를 쓰는 등 극진히

대접했다. 여기서 안두희는 김창룡이 숙직실을 호텔 수준으로 개조한

'특별감방'에서 VIP고객처럼 안락하게 지냈다. 군법회의를 기다리는 동안

임시정부 계통인 장흥 헌병사령관은 경질되고 그 자리에 친일경찰 출신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전봉덕이 임명됐다. 안두희는 1949년 8월 7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울 이태원 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 여기서도 특별대우를 받으며

특별감방에서 유유자적하게 수형생활을 보냈다. 그러다 이 해 11월에 15년으로,

 다음해 3월에는 다시 10년형으로 감형됐다. 유례 없는 특혜였다.

 

 

[ 사진7. 신사복 차림의 안두희 ]

 

 

 

◈ 6.25전쟁 통에 풀려난 안두희…

잔형도 면제받고, 군대로 복직하고, 사업도 승승장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이 제일 먼저 도망쳤다. 그런데

이 혼란의 와중에 안두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채병덕이나

김창룡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온 그는 육군 특무대 문관이라는 완장까지 찼다.
다시 군대로 들어간 그는 1년도 안돼 중위, 대위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이어

1951년 2월 15일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의 지시로 잔형을 면제받았다. 이에 따라

안두희는 범행 1년 7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빽이다. 그러나

부산 임시국회에서 무소속 김이환 의원이 안두희가 풀려나 군에서 고속 승진한

사실을 폭로하자, 서둘러 소령으로 진급시킨 후 예편시켰다. 사회로 나온 안두희는

사업에 손을 댔다. 군 상층부의 비호 속에 강원도 양구에서 군부대에 두부. 콩나물.

 된장. 소고기. 돼지고기. 김치 등을 납품하며 돈다발에 파묻혔다. 하지만 승승장구

하는 그에게 폭풍우가 몰려오고 있었다.

 

 

[ 사진8.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선생 ]

 

 

 

◈ 이승만이 미국으로 도망가자 쫒기는 안두희

 

이승만의 폭정이 드디어 4.19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해 6월 독립투사 김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하는 '백범 김구 선생 11주기

 추도식이 효창원 공원에서 열렸다. 암살된 후 처음으로 열린 공식 추도식이었다.
이 자리에서 '백범선생 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발족해 활동에 들어갔다.
중요한 제보가 잇따라 나왔다. 4.19혁명 후 사회혁신당 대표였던 고정훈 씨는

 "김구 암살은 이승만의 지령으로 측근 임병직 전 외무장관과. 신성모 전

국방장관이 모의한 것"이라고 밝혔다. 고정훈은 해방 후 미 24사단 정보처

장교와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을 지낸 정보통이다. 제헌의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상돈은 미국 보스톤에서 김구 암살 당시 주한 미대사관 부영사를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으로부터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 사진9.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연설을 듣는 미국 정보장교 짐 하우스만 소령 ]

 

 

 

"핸더슨이 내게 왜 이승만이 서둘러 하와이로 망명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가 알기로는 김구 암살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도망친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이 쫓겨나자 잠적한 안두희에 대한 추적작업도 시작됐다. 먼저 광복군

3지대 간부 출신인 김용희가 종로 2가에서 안두희를 발견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끝에 붙잡아 검찰에 넘겼다. 그러나 일사부재리 원칙과 공소시효

10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김제 출신의 열혈청년

곽태영이 나섰다. 그는 1965년 12월 22일 강원도 양구군 중리에서 안두희를

찾아내 잭나이프로 목을 찌르고 돌로 머리를 쳐 중상을 입혔다.

세번째 응징자는 권중희였다. 그는 1992년 4월 12일 인천의 아파트에 숨어

 사는 안두희를 찾아내 정의봉으로 두들겨 패며 '배후'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 사진10. 정의봉에 두들겨 맞은 암살범 안두희와 권중희 ]

 

 

 

권중희 씨는 5개월 후 이번에는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가에 감금시켜

놓고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캐물었다.이때 안두희는 중대한 고백을 한다.

"백범 암살 6일 전인 6월20일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집무실로 불려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부장관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잘하라' 는 격려를 받았다"

 

 

[ 사진11. 백범 김구선생 암살사건의 진상을 집대성한 문제작 ]

 

 

 

◈ 얽히고 설킨 사건의 배후…'이승만이 시키고 군부가 실행한 것'이 가장 유력

 

오랜 기간 백범 김구 암살사건을 추적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 책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추적자들과 연구가들에 의해 드러나기 시작한 암살 배후는 김창룡과 신성모를

비롯한 군부세력, 해방 후 친일파 척결을 주장해온 김구에게 위협을 느낀 친일세력,

그리고 단독정부 추진세력이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여기에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북한과의 대화를 바라는 김구의 정치노선을 비판해온 미 정보기관의 개입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의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이승만의 명시적이거나

묵시적인 '승인' 또는 '암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사진12. 2009년 백범 김구선생 60주기를 맞아 묘소에 어린이들이 절 ]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 올라갔고, 김구는 암살되었다. 현실에서 이승만은

승리자고, 김구는 패배자다. 하지만 두 사람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정반대다.
현실의 승자 이승만은 국민이 권좌에서 끌어내린 독재자가 되었고, 패자 김구는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순교자이며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반전이다.

 

 

글 출처 : http://m.nocutnews.co.kr/news/405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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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2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동료 살해혐의의 무죄파경을 받은 미국 여대생 켄지 스나이더 ]

 

 

 

▶ 2010년   F1(포뮬러원) 한국 그랑프리 개막

 

▶ 2010년   프랑스 연금개혁법 상원 통과

 

▶ 2002년   호적 등.초본 온라인 발급, 대법 '온라인 사법부' 출범

 

▶ 2002년   한·미, 범죄인 첫 상호인도

 

▶ 1996년   정부, 경제협력개발기구 협약 가입안 의결

 

▶ 1995년   최용수 WBA 주니어라이트급 세계챔피언 획득

 

▶ 1995년   유엔창설 50주년기념 특별정상회의 개막

 

▶ 1991년   제4차 남북고위급회담 평양서 개최

 

▶ 1991년   유럽공동체(EC),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유럽경제지역(EEA)창설

 

▶ 1991년   정부, 북한 위성TV 시청 허용

 

▶ 1990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 사망

 

▶ 1984년   경기도 성남시 제2공단에 화재, 피해 16억원

 

▶ 1983년   광주 MBC FM 개국

 

▶ 1983년   제32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김진호 세계신기록 수립

 

▶ 1981년   남북경제정상회담 (멕시코 칸툰)

 

▶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 실시-확정

 

▶ 1978년   등소평 중공부수상 일본 방문

 

▶ 1976년   중국, 문혁파(文革派) 4인방 음모 발표

 

▶ 1975년   소련 비너스9호, 금성 연착륙에 성공

 

▶ 1975년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 사망

 

▶ 1973년   첼리스트 파블로 카살스 사망

 

▶ 1973년   유엔안보리, 중동 정전(停戰)결의문 채택

 

▶ 1965년   화가 고희동 별세

 

▶ 1965년   맹호부대 월남 퀴논항 도착

 

▶ 1962년   인도, 대(對)중국 국경분쟁 대비 퇴역장교 전원을 현역으로 소집

 

▶ 1962년   미국, 쿠바 해상봉쇄 선언

 

▶ 1955년   충주비료공장 기공

 

▶ 1954년   서독, 나토 가입

 

▶ 1953년   프랑스-라오스 우호연합협정 조인 (라오스 실질적 독립 달성)

 

▶ 1952년   이란, 대영(對英) 단교 선언

 

▶ 1951년   순천-여수간 열차가 탈선, 120명 사망  

 

▶ 1950년   서울-동경 민간항공기 취항

 

▶ 1950년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 국경선까지 진격 명령

 

▶ 1948년   반민특위 국회에 설치

 

▶ 1945년   몽고인민공화국 성립

 

▶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 이화여전으로 환원

 

▶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 1938년   세계 최초의 건조식 복사기 탄생

 

▶ 1930년   서울, 강릉간 시험비행 실시

 

▶ 1924년   풍옥상 쿠데타 일으킴 (북경정변)

 

▶ 1913년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 출생

 

▶ 1906년   프랑소 화가 세잔 사망

 

▶ 1903년   노산 이은상 출생

 

▶ 1882년   헝가리 최고 서사시인 오로니 사망

 

▶ 1811년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 출생

 

▶ 1797년   최초의 낙하산 시범낙하

 

 

 

 

[ 사진2. 법정에서 눈물을 닦고 있는 켄지 스나이더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한·미, 범죄인 첫 상호인도 사건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고유의 사법제도를 포기할 수 없다" 미국을 상대로

대한민국이 사법 주권국임을 선포한 듯(?)한 판결문이 나왔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수사한 증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FBI의 수사

결과를 거부한 만큼 AP등 외신의 관심도 컸다. AP통신은 "한국의 법률제도는 피의자가

 FBI 수사관에게 했던 자백에 대해 증거로 삼기를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 사진3. 미 여대생 살해 용의자로 지목 된 켄지 스나이더(오른쪽)가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후 어머니인 히스 보조니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10월14일 서울고등법원 제5형사부 법정. 피고인으로 7년 징역을 구형받은 미 여대생

켄지 스나이더(22)에게 항소 기각 판정이 내려졌다. 스나이더는 울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인 히스 보조니를 끌어안았다. FBI는 스나이더가 친구인 제이미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지만 한국 법정은 지난 6월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했다. 스

나이더는 FBI에서의 진술을 번복하며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회유와 협박에 의한

자백이었다는 것이다. 한국 법정은 FBI에서 자백한 내용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내렸다.

 

 

 

[ 사진4. 켄지 스나이더가 국내에 체류 당시 아기를 안고 즐거워 하는 모습.

이 사진을 찍고 며칠 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살인 피의자로 작년 한국으로 인도  -

 

스나이더는 교환학생으로 대구에서 수학하던 중 2001년 3월 동료 학생들과 함께

서울 이태원에 갔다. 이날 저녁 이태원의 한 바에서 미군들과 어울렸다. 핀란드,

네덜란드 학생이 먼저 여관으로 돌아간 후 피의자인 스나이더와 피해자인 제이미는

새벽에야 여관으로 돌아왔다. 스나이더는 술에 취한 제이미를 데려다주고 자신의

방으로 건너왔다. 제이미의 방에는 미리 여관에 온 네덜란드 여학생이 잠자고 있었다.

 

이튿날 제이미는 목뼈가 부러진 시체로 네덜란드 여학생에게 발견됐다. 네덜란드 여

학생은 밤새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옆방에 잠든 핀란드 학생들은 새벽에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남자가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여관 여주인은 새벽에 한 남자 외국인이 옷에 피를 묻힌 채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관할경찰서인 용산경찰서가 수사에 나섰다. 범인이 미군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미군 범죄수사대(CID)도 수사에 참여했다. 하지만 사건의 실마리를 풀지 못했다.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나라로 귀국했다.

 

피해자인 제이미의 부모는 백악관과 미 의회에 사건의 해결을 청원했다. 미국의 스펙터

상원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재수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FBI 한국지부와 CID는

2002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한 호텔에서 스나이더를 심문한 후 자백을 받아냈다.

동성애를 구하던 제이미를 우발적으로 밀쳐 살해했다는 것이다. 미국 법정은 1999년

발효된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에 따라 피의자인 스나이더를 한국으로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인도조약의 최초 사례가 된 만큼 스나이더는 한국 언론의 관심사가 됐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법정은 FBI 수사관처럼 사법경찰관의 지위에 있는 자가

청취한 피고인의 자백행위는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결했다. 이같은 판결은 미국의

사법제도와 한국의 사법제도가 다른 데서 기인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FBI와 같은

수사기관의 수사보고서를 피의자 신문조서로 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형사소송법

제312조 2항에 따라 수사 지휘 검사 이외의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그 내용을 부인할 경우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2심 변호를 맡은 오로라법률사무소의

 김홍경 변호사는 "사법부의 판단은 옳다"면서 "FBI의 자료만을 토대로 피고인을 한국

 법정에 세운 것은 미국의 자료를 무리하게 적용한 것이며 우리의 사법제도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백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미국과 한국의 사법제도는 전혀 다르다. 한양대 법학과 차

용석 명예교수는 "미국에서는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더라도 법정에서 자백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기만 하면 유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차 교수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더라도 자백만으로 유죄가 성립되지 않으며 다른 충분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수사 검사에게 한 자백은 증거로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FBI의 수사보고서를 인정하지 않은 판결에 대해 FBI 쪽의 공식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미국대사관 공보실의 한 관계자는 "검찰측이 대법원에 상고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한국 사법부에 대한 부적절한 개입으로 비쳐질 수 있어 어떤 입장도 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FBI 한국지부 관계자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는 이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지면 그때 가서야 어떤 입장을 말할 수 있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선 검사에게 한 자백만 인정  -

 

1심 변호를 맡은 엄상익 변호사는 "미국이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될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 이 사건을 한국에 떠넘겨 가해자와 피해자의 민원을 해결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측은 1심에서 이 판결이 선례가 된다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미국인이 한국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자국으로 도주할 경우 미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더라도

인도된 후 한국 법정에서 번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의 형사법제는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미국에서는 법제상 검사가 피의자를 신문하고 그 진술을 조서로 작성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봉쇄돼 있다는 것이 검찰측의 주장이다. 검찰측은 더 나아가 "우리의 법원이 무엇을 위하여

 이와 같은 태도를 고집해 우리의 법제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미국인에게 피해를 당한 우리

국민의 구제와 보호를 포기해도 좋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법원에 항변했다.

재판부는 "(이런 경우에도) 형사사법 공조조약에 의거해 대한민국의 사법체계에 부합하는

증거를 획득할 수 있다"며 확대 해석을 무시했다.

스나이더 사건의 경우 일반적인 관례와는 정반대로 진행됐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김홍경 변호사는 "이 사건의 경우 한국 경찰에서 수사 자료를 제공하고 상대국에 수사 증거

 획득을 요청한 것이 아니다"면서 "반대로 미국이 한국측에 구두로 통보한 후 임의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자백을 받아내 한국에 인도했다"고 말했다. 엄상익 변호사는 "미국에서

범죄인을 인도해도 우리가 판단해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월 14일 내려진 2심 결정은 1심에서 더 나아가 "피고인이 미국에서 한 자백이 증거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자백은 믿기 어렵고 이를 뒷받침할 보강 증거도 없다"고 판결했다.

 객관적인 상황을 살펴볼 때 스나이더를 범인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함귀용

담당검사는 "대법원에 상고할 것인지는 아직 결정한 바 없다"며 "최종 시한인 10월 21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함 검사는 "자국민을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미국 법원이 범죄인

인도 결정을 내린 만큼 쉽게 평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글 출처 : http://weekly.khan.co.kr/art_print.html?artid=5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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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1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성수대교 붕괴사고 ]

 

 

[ 영상1. 성수대교 붕괴사고 ]

 

 

 

 

▶ 2011년   LS그룹 공동경영 기틀 잡은 구두회 명예회장 별세

 

▶ 2004년   헌법재판소,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수도이전법’ 위헌 결정

 

▶ 2002년   뇌신경세포 재생기술 첫개발. 연대의대 박국인 교수팀. 뇌성마비 등 치료 길 열림

 

▶ 1998년   미 상원, 예일대 법대 교수 고홍주씨를 미 국무부 차관보로 인준

 

▶ 1996년   서울국제에어쇼96 개막(~27일, 성남 서울공항)

 

▶ 1995년   백제 27대 왕명( '창왕(昌王)' )이 명기된 사리감 발견

 

▶ 1994년   성수대교 붕괴

 

▶ 1992년   전 서울고검장 최대교씨 별세

 

▶ 1991년   한국-라트비아, 국교 수립

 

▶ 1990년   한국, 중국과 무역사무소 개설 합의

 

▶ 1989년   온두라스 항공사 소속 보잉 727여객기 추락. 131명 사망

 

▶ 1986년   내외통신, 북한이 금강산댐 공사를 시작했다고 평양방송을 인용 보도

 

▶ 1984년   프랑스 영화감독 트뤼포 사망

 

▶ 1981년   중공, 대만에 스포츠교류를 제의

 

▶ 1980년   환경청, 환경영향평가제 실시키로 결정

 

▶ 1977년   카터 미국대통령, 주한미군 지상군 철군보완 8억달러 한국에 무상공여토록 의회에 승인 요청

 

▶ 1973년   유엔안보리, 중동전쟁 종식에 관한 미소(美蘇) 공동안 채택

 

▶ 1969년   덴마크서 사상 첫 성(性)박람회 개막

 

▶ 1969년   브란트 서독수상 피선. 사민-자민당 연립 성립

 

▶ 1968년   민복기 5대 대법원장 취임

 

▶ 1967년   워싱턴서 대규모 반전시위

 

▶ 1966년   박정희 대통령 마닐라 7개국 정상회담 참석차 필리핀 방문

 

▶ 1964년   아베베, 도쿄올림픽 우승

 

▶ 1963년   유엔, 중공 가입안 부결

 

▶ 1963년   미국, 유럽과 태평양에 핵미사일 배치

 

▶ 1961년   미국 마이다스 미사일경보로케트를 발사

 

▶ 1959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의 날 제정

 

▶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10.15 구보타(久保田) 망언으로 무기휴회

 

▶ 1950년   전쟁 희생자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한 제네바협약 국제적으로 발효

 

▶ 1950년   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 육군특무부대 창설

 

▶ 1949년   일본, 재일교포학교 폐쇄령 발표

 

▶ 1945년   국립경찰 창설 (경찰의 날 제1회는 1946,10,21. 1957년부터 제도화)

 

▶ 1938년   일본군, 중국 광동 점령

 

▶ 1920년   청산리 대첩

 

▶ 1918년   체코 공화국 선언

 

▶ 1912년   일본 헌정당, 대한(對韓) 정책선언서 발표

 

▶ 1904년   일본 헌정당, 대한(對韓) 정책선언서 발표

 

▶ 1899년   에디슨, 전기 형광램프 발명

 

▶ 1898년   서강·한강·왕십리에 종두소 설치

 

▶ 1884년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 폐쇄

 

▶ 1878년   독일,사회민주당 진압법 공포

 

▶ 1833년   스웨덴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 출생

 

▶ 1805년   넬슨 영국 해군제독, 트라팔가르 해전서 나폴레옹 함대 격파

 

▶ 1328년   명나라의 초대 황제 주원장 출생 

 

 

 

 

[ 사진2. 성수대교 붕괴사고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94년 10월21일 오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다리인 성수대교가 붕괴 되었습니다. 저도 그때의 일을 매스컴을 통해 듣고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한강을 이어주는 다리가 무너질꺼라

생각을 했겠습니까? 지금은 8차선으로 확장 개통되어, 옛 상흔은 말끔히

지워졌지만, 피해 가족들의 눈가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참혹했던

그때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사진3. 성수대교 붕괴사고 ]

 

 

 

-  발 생 원 인  -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오전 07:40 경

서울 성동구 성수1가 - 강남구 압구정동 교량에서 발생하였다.
사고원인은 서울 전역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아침 출근과

 등교길을 서두르는 학생과 직장인 등 승객을 태운 버스와 승용차들이

 빗길을 조심스럽게 달리던 중 성수대교의 10번 째와 11번 째의 교각

사이 120미터 중 중앙 48미터의 현수트러스(Truss) 가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았고 다리 위에 주행 중이던 차량 6대가 함께 추락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성수대교는 한남대교와 더불어 가장 사고위험이

교량으로 알려져 왔으나, 관계당국이 이를 무시하고 보수·보강을 (1992.12~

1993.12: 기초부위 일부 부식, 1993년 하반기: 교각상태 하부 세 곳 정도 불량)

제때에 실시하지 않았으며, 성수대교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유효 단면적의

감소와 응력집중을 유발하게 한 용접시공의 결함과 제작오차 검사 미흡,

피로균열의 진전을 예방하지 못한 점검 및 유지관리 미비, 그리고 피로균열을

가속화시켜 규정이상 중량차량 통행 규제 소홀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 그림4. 성수대교 붕괴사고 ]

 

 

 

-  사 고 내 용  -

 

성수대교는 1977년 4월 9일 착공하여 1979년 10월 15일 2년6개월

만에 준공된 폭 19.4m, 길이 1,160.8m의 4차선 교량이다. 동아건설이

116억원의 공사비에 시공하였으며 기능 위주로 설계된 종래의 교량들과

 달리 미관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거버 트러스(Gerber Truss)

공법에 의해 건설되었다. 성수대교는 개통 초에 반포대교, 잠실대교,

영동대교, 한남대교 등과 더불어 영동 신도시 개발로 형성된 강남·북간

도심과 부도심 간을 잇는 주요 교통 축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하였으며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상계아파트단지와 분당신도시의

개발과 함께 성수대교를 이용하는 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붕괴

당시에는 강북 측으로 60,000대, 강북 측에서 강남 측으로 45,000대 등

하루에 105,000대의 교통량을 처리해 오고 있었다.

 

 

 

 [ 사진5. 성수대교 붕괴사고 ]

 

 

 

사고 후 현장 상황은 교량 붕괴 부분에서 달리 던 봉고차 1대와 승용차 2대가

 현수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떨어진 상태였고, 붕괴 경계지점에 있던 승용차

2대는 부재와 같이 떨어지다가 한강 물 속으로 빠져버린 상태였으며, 남단에서

북단으로 달리던 한성운수 16번 버스가 붕괴 경계 지점에 걸쳐 있다가 뒤집힌 채

떨어지면서 물 속에 미리 떨어져 있던 상판과 강하게 충돌하며 차체가 완전히

 

찌그러져 이 버스로 등교하던 학생과 직장인 등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로 

처참한 상태였다. 붕괴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총 49명이었으며 이중 사망 32명

(남 17, 여 15),부상 17명 (중상 3, 경상 15)이었다. 재산피해는 차량 6대 추락

(버스 1, 봉고 1, 승용차 4) 하였으며, 일반버스: 16번(한성 운수) 서울대공원 –

번동운행, 봉고: 서울 지방경찰청 소속 차량, 승용차: 세피아, 프라이드, 엘란트라,

르망 등이 추락하였다.

 

 

 

[ 사진6. 성수대교 붕괴사고 ]

 

 


성수대교는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트러스(철강구조물)의 연결 이음새 용접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10mm 이상이 돼야 하는 용접두께가 8mm 밖에 되지 않았으며 강재 볼트

연결핀 등도 부실했던 것으로 검찰 조사결과 밝혀졌다. 관계 당국의 형식적인 안전점검,

관리소홀도 부실 시공된 다리의 붕괴를 앞당겼다. 관리 당국은 근본적인 보수 없이 녹슨

부분을 페인트로 칠하는 방법으로 위험을 숨겼다. 또한 성수대교를 이용하는 차량대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도 붕괴사고의 한 원인이었다. 사고대책으로는 안전관리 측면에서

시설물의 관리자가 임의로 정한 기술이나 지침에 따라 관리하던 것을 1995년 4월 5일

「시설물 안전관리 특별법」제정으로 안전관리 체계를 법제화 하였다. 부실 설계 및

감리자에 대해 5년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이하의 벌금으로 부실설계 및 감리자에 대한

제재 강화 및 신설하였으며, 1995.6 시설물 안전 및 유지관리 업무지침서를 발간하였다.

 

 

 

[ 사진7. 성수대교 붕괴사고 ]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총 공사비 780억원을 들여 복구공사에 착수하였고

사고발생 2년 8개월 만인 1997년 7월 3일 차량 통행이 재개되었다. 이후, 다시 총 공사비

1,300억원을 들여 1998년 12월부터 8차선으로 확장 공사를 시작, 2004년 9월 17일

개통되었다. 확장된 성수대교는 트러스가 붕괴되어도 한강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낙교방지턱이 설치되었으며 교량등급도 2등교에서 1등교로 상향조정되었다.

 

 

 

[ 사진8. 성수대교 붕괴사고 ]

 

 

참고자료  삼성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위험관리 제100호 특집》삼성방재연구소, 2006
             중앙119구조대《재난유형별 사고사례집》중앙119구조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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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0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거물 간첩 황태성 ]

 

 

 

 

▶ 2010년   '3무(無)경영' 실천한 '뚝심의 경영인' 설원봉 대한제당 회장 별세

 

▶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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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 자본주의경제개혁안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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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중국, 국경무역사무소 개설 보도

 

▶ 1982년   환경청, 진해 부산 광양만 등 4개 해역에 `연안오염특별관리해역` 선포

 

▶ 1982년   에콰도르정부, 에콰도르전역에 비상사태 선포. 헌법기능 정지

 

▶ 1980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기공

 

▶ 1980년   북한,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발표

 

▶ 1979년   마산 창원에 위수령 선포

 

▶ 1973년   문화의날 선포

 

▶ 1968년   주간조선 창간

 

▶ 1964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33 재임) 후버 사망

 

▶ 1963년   거물 간첩 황태성 검거

 

▶ 1962년   중국-인도, 국경서 전면 충돌

 

▶ 1958년   태국, 무혈쿠데타 발생. 사리트 원수 정권장악

 

▶ 1951년   동경서 제1차 한일회담 개최

 

▶ 1947년   브라질, 대소련 단교

 

▶ 1946년   영국, 버마의 독립허용을 설명

 

▶ 1944년   레이테섬 상륙작전

 

▶ 1943년   일제, 우리나라에 학병지원제 실시

 

▶ 1940년   독립운동가 이범윤 사망

 

▶ 1935년   홍군(紅軍)의 대장정 1년 만에 끝나

 

▶ 1907년   베를린에서 제2회 독일노동자회의 열림

 

▶ 1904년   볼리비아와 칠레가 강화조약에 조인

 

▶ 1903년   미국-캐나다, 알래스카 국경확정

 

▶ 1891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출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 1859년   미국 철학자 존 듀이 출생

 

▶ 1854년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랭보 출생

 

▶ 17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6세 사망

 

▶ 1437년   경원성(慶源城, 둘레 1,755척)과 경흥성(慶興城, 2,186척) 완공

 

▶ 1361년   고려, 홍건적 10만군 삭주(朔州)·이성(泥城)에 침입

 

 

 

 

[ 사진2. 거물 간첩 황태성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평화통일 선전과 남북협상 공작을 위해 남파 된 거물급

간첩 황태성 간첩 사건을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황태성은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출생하여 1923년 9월 8일

서울 제1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에 동맹휴학사건에

관련되어 퇴학당하였습니다.

 

 

 

[ 사진3. 한때 박정희 대통령의 멘토였으나 훗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형 당한 비운의 밀사 ]

 

 

 

그 뒤 1924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공산주의운동에 가담하였고,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상북도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고 1946년 10월1일 ‘대구폭동’을

주동하다가 월북하였습니다. 월북한 뒤 북한의 대남공작 담당기관인

해주인쇄소 총무국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8월28일 이른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6·25전쟁 때는 군에

편입되어 남하한 뒤 서울에서 의용군 모집에 적극 활약하여

북한노동당으로부터 신임을 받았죠.

 

 

 

[ 사진4. 한때 박정희 대통령의 멘토였으나 훗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형 당한 비운의 밀사 ]

 

 

 

그 뒤 평양으로 돌아가서 상업성 지방관리국장을 거쳐 상업성

부상까지 되었고, 1961년 6월 25일 황태성은 당시 대남공작

총책 이효순(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다음과 같은 지령을 띠고

남파되었습니다.

 

 

① 남한의 고위 지도층 가족을 포섭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접 접촉할 것.

② 앞의 사명을 수행하기 어려우면 경상북도에 가서 대구시를 중심로  

    당의 기반을 구축하고 신분을 합법화할 것.

③ 남한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조성하여 4·19혁명 재판과 같은 혁명의

    계기를 만들 것.

④ 평화통일 선동 및 미군 축출을 위한 반미사상을 고취시킬 것.

 

 

1961년 8월 29일 평양을 출발하여 9월 1일서울에 잠입, 친척 되는

모 대학강사 김민하(金旼河)와 접촉, 북한에 있는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포섭에 성공합니다. 포섭된 김민하를

통하여 조카딸 임미정(林美亭)과 그녀의 남편 권상릉(權相陵)을

포섭하고, 그 뒤 10월 9일 황태성은 자신의 중매로 박상희

(박정희의 형)와 혼인한 조기분 여인을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 및 그녀의 사위인 김종필(金鍾泌)과 접촉하자

권상릉·임미정에게 편지를 휴대시켜 방문하도록하였으나,

조모 여인은 접촉을 거부하고 곧 수사당국에 신고하였습니다.

 

 

 

[ 사진5. 거물 간첩 황태성 윗줄 오른쪽에서 3번째 ]

 

 

 

이에 서울시 경찰국 수사진은 10월 20일 황태성을 검거하고

공작금 120만 환, 라디오 1대, 암호 문건 1조 등을 압수하는

한편, 임미정과 권상릉도 체포합니다. 그 뒤 황태성은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처형됩니다.
이 사건은 광복 후 처음으로 현고위 지도층의 가족을 통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접 접촉하기 위해 부상까지 지낸 거물급 인사를

 남파했다는 점에서 정부 고위층과의 관련설로 인하여 한때 정계는

물론, 세인의 의혹과 물의를 일으켰었죠. 따라서 정부는 그에 대한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국회가 국정감사를

통한 진상 규명에 들어갈 정도로 북한의 대남도발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글 출처 : http://www.douban.com/group/topic/5387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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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 화재 시 소화기 사용법 ]

 

 

 

[ 영상1. 소방안전 상식 3가지 ]

 

 

 

 

▶ 2009년   '매듭 페인팅' 화가 신성희씨 별세

 

▶ 2005년   서울 마포대교, 왕복 6차로에서 10차로로 확장 개통

 

▶ 2002년   정보통신부, 위치정보서비스 법제화 추진 발표

 

▶ 1999년   최요삼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 1997년   일본 아사히 신문 공동소유주 우에노준이치 사망

 

▶ 1991년   한국-에스토니아 국교 수립

 

▶ 19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진, 272여명 사망

 

▶ 1985년   충주 다목적댐 준공

 

▶ 1985년   장세동 안기부장-박철언 특보, 김일성관저를 방문해 김일성과 비밀회담

 

▶ 1983년   진의종 제17대 국무총리 취임

 

▶ 1983년   프랑스 철학자 아롱 사망

 

▶ 1983년   주민등록증 갱신

 

▶ 1982년   중국, 중소회담 재개 합의를 발표   

 

▶ 1981년   한국-오만, 항공협정 가조인

 

▶ 1981년   옥포조선소 준공

 

▶ 1980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로마 교황을 방문해 448년 만에 화해

 

▶ 1980년   미국-중국, 민항(民航)개설계획 발표

 

▶ 1980년   충북선(조치원-봉양) 개통

 

▶ 1978년   북한 제3땅굴 발견

 

▶ 1978년   이탈리아의 기독교민주당 대통령(1955-62) 그론키 사망

 

▶ 1974년   서울 뉴남산호텔 화재, 19명 사망

 

▶ 1973년   국립극장, 장충동으로 이전해 개관

 

▶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 1972년   박정희, '10.17 대통령특별선언' 발표

 

▶ 1970년   페루 중부해안지대에 대지진(사망 1백여명, 부상 1천여명)

 

▶ 1969년   3선개혁안 국민투표 실시, 확정

 

▶ 1967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사망

 

▶ 1966년   페루 중부해안지대에 대지진(사망 1백여명, 부상 1천여명)

 

▶ 1961년   알바니아, 중국과의 적대관계 공식화

 

▶ 1961년   소련공산당 22차 대회 흐루시초프의 반당파 숙청 개시

 

▶ 1960년   유엔군, 콩고의 카탕가주 전면점령 개시

 

▶ 195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지진. 300여명 사망

 

▶ 1958년   유엔신탁통치이사회서 토고랜드 독립 부여   

 

▶ 1957년   유엔특별정치위원회, 51대 9로 한국의 유엔가입자격 재확인

 

▶ 1956년   영국 콜다홀 원자력발전소 개소(본격적인 원자력발전소 시대 개막)

 

▶ 1950년   터어키군, 부산항 도착

 

▶ 1945년   경성제대를 경성대학으로 개칭

 

▶ 1935년   조선일보 월간지 `조광(朝光)` 창간

 

▶ 1933년   아인슈타인 미국으로 망명

 

▶ 1919년   미국 전기방송회사 `RCA" 설립

 

▶ 1918년   헝가리 독립 선언

 

▶ 1917년   한강 인도교(구교) 준공

 

▶ 1907년   함부르크에 금융대공황 발생

 

▶ 1905년   일본, 요동에 관군총독부 설치

 

▶ 1905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즉위

 

▶ 1895년   미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도리스 험프리 출생

 

▶ 1893년   프랑스의 제3공화정 2대 대통령 마크 마옹 사망

 

▶ 1883년   서머힐 학교를 창립한 영국의 교육자 A.S.닐 출생

 

▶ 1849년   폴란드 작곡자 쇼팽 사망

 

▶ 1833년   호흡기에서 가스 교환원리 발견한 폴버트 출생

 

▶ 1813년   독일의 극작가 뷔히너 출생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74년 서울 뉴남산관광호텔 화재에 대해서

알아보게습니다. 뉴남산 관광호텔 화재는 오전 1시53분에 일어 았습니다.

 

 ◈ 사건일시

  1974년 10월 17일 오전 01시 50분경

 ◈ 인명피해

  사망 : 19명 , 부상 : 44명

 ◈ 재산손실

  약 9억원

 

중구 회현동1가 65번지에 위치한 뉴남산관광호텔에는 이날 투숙객으로

일본인 29명, 재일동포 7명, 중국인 4명, 미국인 2명, 캐나다인 1명,

한국인 20명 등 63명과 나이트클럽 손님, 종업원 등 140명이 있었습니다.

 

 

불은 4층 복도에서 일어나 삽시간에 복도와 천장의 비닐벽에 번져 4층 객실

6개를 태우고 건물 안 계단을 통해 5층, 6층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4층이

화염에 휩싸이자 방마다 유리창을 깨고 밖을 향해 "살려 달라"고 아우성을

쳤으며, 5층, 6층 복도에 불이 붙었을 때에는 화염을 피하지 못한 10여명이

창틀에 매달렸다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6층 투숙객들은 시트커버를 2개씩 묶어 밖으로 내리고 매달렸다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긴급출동한 고가사다리차가 창밖에 매달린 19명을

구조해 냈고, 소방특공대가 호텔로 들어가 10명을 업어 나오기도 했습니다.

불은 5층, 6층 복도와 천장을 태우고 더 이상은 번지지 않고 약 1시간만인

오전 2시 50분경 잡혔으나 비닐벽지가 타는 독한 연기와 욜기는 방마다

가득했습니다.

 

 

진화 뒤 소방대의 현장조사 결과 희생자들은 4층에서 3명이 불에 타 숨지고

2명이 추락사 했으며, 12명은 화염과 매연 속에 질식사한 모습으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조사결과 재산 피해액은 9억원이고 인명피해는 사망 19명,

부상 44명, 총 63명으로 밝혀졌습니다.

 

 

이같이 희생자가 많이 나오게 된 이유는 호텔 전체의 복도와 천장 벽지가

몯 비닐로 돼 있어 이 비닐벽지가 타면서 방마다 독한 연기를 가득 채웠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비상구 표시는 되어 있으나 객실 각

층의 야간 담당자가 없어 잠결에 뛰어 나온 외국인 투숙객들이 탈출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으며, 자체 소방시설로 포말소화기 18대를 갖추어야 함에도

1개밖에 없었고 소화수통도 9개가 있어야 하나 1개도 없었으며 피난설비

구조대가 7개가 있어야 하나 1개밖에 가설되어 있지 않았으며 소화전은 물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 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7F5S&articleno=8472628&categoryId=467800&regdt=2006052719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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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1.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명부 ]

 

 

 

 

▶ 2000년   한-미 미사일협상 타결로 사(射)거리 300km 미사일 생산 가능

 

▶ 1999년   이미자,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생활 40년 기념공연

 

▶ 1999년   한국군 상록수부대 150여명 동티모르에 파병

 

▶ 1998년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영국경찰에 전격 체포

 

▶ 1998년   북아일랜드의 존 흄-데이비드 트림블, 노벨평화상 수상

 

▶ 1995년   전파법시행령 개정

 

▶ 1994년   헬무트 콜, 독일 총제로 재 선임

 

▶ 1994년   장한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콩쿠르에서 최우수상 수상

 

▶ 1992년   과테말라 출신의 민권운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 노벨평화상 수상

 

▶ 1990년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평양서 개최

 

▶ 1984년   남아공의 흑인종교지도자 데스몬드 엠필로 투투 주교, 노벨평화상 수상

 

▶ 1984년   통신종합센터 준공

 

▶ 1982년   수하르토 인도 대통령 방한

 

▶ 1981년   동서고속도로(대전~광주 175km)기공, 후에 올림픽고속도로로 개명

 

▶ 1979년   서울 성수대교 개통

 

▶ 1979년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내한

 

▶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교황으로 즉위

 

▶ 1975년   스페인령 사하라서 모로코 35만명 평화행진

 

▶ 1974년   경주 98호 고분서 신라순금고배(高杯) 출토

 

▶ 1972년   자유학습의 날 실시

 

▶ 1964년   중국, 첫 원폭실험 성공

 

▶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 1963년   서독 아데나워 수상 사임, 후임에 부수상 에르하르트 취임

 

▶ 1962년   콩고 중앙정부군과 북부 카당가의 카당가군 휴전협정 조인

 

▶ 1962년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 사망

 

▶ 1962년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국교수립

 

▶ 1960년   작곡가 현제명 별세

 

▶ 1956년   제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 발표

 

▶ 1952년   채플린 영화 `라임 라이트` 개봉

 

▶ 1951년   남원에 공비출현, 기관차 전복시키고 200여명 납치

 

▶ 1951년   이집트, '1936년 조약' 파기를 주장하며 폭동, 반영(反英)감정 고조

 

▶ 1946년   2차대전 독일전범 립벤도로프 등 10명 교수형

 

▶ 1945년   이승만 박사 귀국

 

▶ 1942년   인도, 태풍으로 인한 홍수로 4만여명 사망

 

▶ 1928년   독립운동가 박용만, 북경에서 피살

 

▶ 1918년   허영숙(이광수 부인), 총독부시행 의사시험에 여자로서 최초 합격

 

▶ 1916년   2대 총독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임명

 

▶ 1916년   마거릿 생어, 산아제한클리닉 개소

 

▶ 1908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호자 출생

 

▶ 1907년   지리학자 육지수 출생

 

▶ 1902년   프랑스에서 지문(指紋)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택

 

▶ 1901년   혜민관 설치

 

▶ 1888년   미국의 극작가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 출생. 1936년 노벨문학상 수상

 

▶ 1863년   영국의 정치가 오스틴 체임벌린 출생. 1925년 노벨평화상 수상

 

▶ 1854년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출생

 

▶ 1793년   프랑스 마리 앙트와네트 단두대 처형

 

▶ 1435년   조선, 월식 발생

 

▶ 1434년   조선, 월식 발생

 

▶ 1426년   조선, 월식 발생

 

 

 

 

 

[ 사진2. 왼쪽-박정희 후보 , 오른쪽-윤보선 후보 ]

 

 

 

1963101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윤보선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46.6%4722천여

표를 얻었고 윤보선은 45.1%4546천 표를 얻어, 두 후보간 표차는

불과 15만여표에 불과했다. 이는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최소 표차다.

대통령 선거 승리의 일등공신 지역은 경상도와 전라도였다. 박정희는

서울과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등 중부 이북에서는 모두 패배했지만,

경남북과 전남북, 그리고 제주도 등 남부 지방에서 크게 앞섰다. 경상도에서는

66만여 표를 더 얻었고 전라도에서도 35만여 표 차이가 났다. 15대 대통령 선거

결과와 관련 가장 관심을 받은 지역은 호남이었다. 전통적으로 야당의

지지기반이었던 호남에서 윤보선보다 박정희에게 던진 표가 더 나온 것은

예상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 사진3. 제5대 대통령 선거 벽보 ]

 

 

 

 

어떻게 그런 예상외의 결과가 발생했던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하지만, 당시 대통령 선거 결과 분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장

가운데 하나가 밀가루 선거. 박정희가 밀가루를 이용해 63년 대통령

선거에서 호남 지역을 비롯해 남부 지방의 표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몇 가지 사례다. 밀가루가 선거 직전 주로 태풍

셜리의 피해를 입은 남부지역에 집중적으로 살포되었다는 점도 이 지역 표의

동향과 관련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사항으로 여겨진다”(정치학자 김일영)

농어촌에서 박후보의 표가 많이 나왔던 것은 극심했던 흉년에 구제 사업을

잘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구호를 받았으나

역시 박의장에서 호의를 가졌을 것이다. 흉년이 극심하게 든 영남과 호남에서

박후보가 압승한 것은 충분치는 못하나마 구호양곡을 보내주는데 애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KOC위원 유한철)

 

 

 

 [ 사진4. 제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

 

 

 

 

극심한 수재와 한재를 당한 영호남에서 정부의 구호사업이 활발했었던데도

힘을 입었을 것이다.”(변호사 이명환) 도시 서민층과 농촌을 밀가루로 범벅해

놓았으니, 그 상황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에당선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음식 칼럼니스트 김학민)

이런 분석이 나올 만 했다. 63년 여름 태풍 셜리가 호남평야를 덮여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가을 쌀농사는 대흉년을 기록했다. 이 때문에 쌀 소동이 일어나고

 매점매석이 판을 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9월 중순이면 정부가 보유한 식량마저

 바닥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사실이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몇 달 앞두고 터진 태풍

피해는 박정희에게 악재 중의 악재였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는

군정에 대한 세간의 인심은 바닥에 떨어질대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청와대 입성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사진5. 제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결과 ]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박정희가 뽑아든 카드가 바로 밀가루 수입이었다.

당시 박정희는 캐나다와 호주산 밀가루 215천톤을 국내에 들여와 판매

대금의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활용했고, 일부는 수재민 구호용이라는 명분

아래 태풍 셜리에 의해 막대한 수재를 입은 남부지방의 수재민과 도시

서민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했다. 구호용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당시

밀가루 배포는 사실상 선거운동의 일환이었다. 이와 관련 중앙정보부장으로

 약 6년여간 박정희를 보필했던 김형욱은 영남과 호남 특히, 박정희의 득표가

 취약하다고 판단되는 호남지방은 설상가상으로 태풍 셜리호가 강타해 수많은

 수재민들이 한층 심각한 식량난에 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자인 박정희가

 자기 재량대로 사용할 수 있는 밀가루를 도합 215000톤이나 확보했다는 것이다

.”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사진6. 제5대 대통령 선거 개표 광역시, 도별 우세지역 ] 

 

 

 

 

게다가 박정희는 내심 선거운동을 위한 것이면서도 겉으로는 수재민 구호라는

일견, 매우 합리적인 이유를 붙여 식량을 무상으로 배포할 수 있는 명분상의

고지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도합 215000톤의

밀가루가 번갯물에 콩 구워 먹듯이 재빠르게 유용되는 것을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 밀가루 배포는 대통령 선거 양상을 바꿔놓고도 남음이

 있었다. 문제의 밀가루는 그 상당 부분이 수재민, 특히 호남지방의 수재민에게

박정희의 자애스런 뜻을 곁들여 무상으로 배포되었고, 나머지는 민간업자에게

헐값으로 불하하여 막대한 정치자금을 확보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 때문이었을까? 김형욱과 육사 8기 동기이자 당시 중앙정보부

국내정치담당 제3국장이었던 김영민은 김형욱에게 부장님, 이러다가는 밀가루

대통령이 나오겠군요라고 말했다는데, 이는 현실이 되었다. 실제 박정희는 임기

 내내 야당측으로부터 밀가루 대통령이라는 공격을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 사진7. 제5대 박정희대통령 취임사 ]

 

 

글 출처 : http://blog.daum.net/truthonly/13436977

사진 출처 : 위키백과/선거통계시스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nstn001&logNo=220438194878

 

참고문헌

김경재, 김형욱 회고록 2: 혁명과우상(인물과사상사, 2009),151-17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2(인물과사상사, 2004).

김학민, <독재자의 밀가루는 달콤했다>, 한겨레21, 20021219, 128.

<표차 15어제와 내일>, 동아일보, 19631017, 2.

<‘한표의 진단 10.15 선거 앙케트’>, 동아일보, 196310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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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1971년 10월15일, 고려대학교에 진주한 수도경비사령부 장갑차 ]

 

 

 

▶ 2010년   타잔의 아들 '보이' 조니 셰필드 별세

 

▶ 2009년   일본 이야마 유타, 최연소 바둑 명인 등극

 

▶ 2002년   IBMㆍ히타치ㆍ선 등, 스토리지 기술 ‘블루핀’ 표준 자원 결의

 

▶ 2001년   KTF-LGT 품질향상 합의서 체결

 

▶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

 

▶ 2000년   김주진 아남반도체 회장, 한국인으로 첫 미 100대 부호에 선정

 

▶ 1994년   아리스티드 대통령, 망명지 미국에서 아이티로 귀국

 

▶ 1993년   청와대, 일제때의 총독관저건물인 舊본관의 철거 시작

 

▶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미국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20일)

 

▶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65개국 4,361명 참가

 

▶ 1985년   서울시, 서울시내 택시요금체계를 거리· 시간병산제로 전환

 

▶ 1982년   농수산부, 초지개발 10개년 계획 발표

 

▶ 1981년   정부조직축소개편, 531개 직위 감축

 

▶ 1979년   도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출간

 

▶ 1976년   덴마크, 북한공관원 전원을 마약 등 밀수혐의로 추방

 

▶ 1973년   소양강땜 준공

 

▶ 1971년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 1969년   태백선(정선~나전) 개통

 

▶ 1966년   효봉 스님 입적

 

▶ 1964년   소련 수상 겸 제1서기 흐루시초프 해임. 새 수상에 코시긴, 제1서기 브레즈네프 임명

 

▶ 1962년   케네디, 알제리아 벨라 수상과 회담

 

▶ 1960년   독립운동가 문익상 사망

 

▶ 1950년   대동강 철교 폭파

 

▶ 1949년   육군포병학교 창설

 

▶ 1949년   한일통상협정 조인

 

▶ 1946년   좌익우파, 사회노동당으로 통합

 

▶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 1940년   인도 간디, 불복종운동 개시

 

▶ 1934년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 1926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출생

 

▶ 1925년   서울역사 운수영업 개시  

 

▶ 1925년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집단해고 사건

 

▶ 1925년   서울운동장 개장

 

▶ 1917년   마타 하리 총살

 

▶ 1910년   인천에 상수도 개설

 

▶ 1907년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 1905년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 189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출생

 

▶ 1844년   독일 철학자 니체 출생

 

▶ 1582년   그레고리력 사용 시작

 

▶ 1581년   기록상 최초의 발레 공연

 

▶ 1407년   경상도 개령, 지진 발생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한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때는 1971년 10월 15일 오전 10시 50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발표합니다. 이른바 ‘10ㆍ15 조치’로 불린 위수령 발동이었습니다.

 

 

 

 

 

 

김 대변인은 “북괴의 군사적 움직임과 대남공작의 새로운 양상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이번 시험기를 이용한 일부 불순학생의 ‘데모’ 선동이 국가안위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

대통령특별명령이 내려지게 된 것”이라고 위수령 발동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죠.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은 계엄령 제 12조에 의한 병력지원을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수도방위사령부의 전신)에 요청합니다. 오전 11시 50분 고려대에는 수경사 병력

200명이 2대의 장갑차, 16대의 트럭을 타고 들이닥칩니다.

군인들은 캠퍼스 안에서 여학생과 ROTC 후보생을 제외한 학생 전원을 연행하죠. 이

런 광경은 서울대와 연세대, 성균관대 등 서울 시내 7개 대학(광주에서는 전남대)에서

똑같이 벌어집니다. 대학을 접수한 군은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주둔할 것’을 학교

당국에 통보하고 외부인과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차단합니다.

 

 

 

 

 

 

이날 오후 유재흥 국방부 장관은 “군은 박 대통령의 특별명령 9개항목이 달성 되는대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유 장관이 언급한 ‘특별명령 9개항목’은

“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동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되고

있었죠. 군 당국은 이날 하루 동안 서울에서 학생 1,889명을 연행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영구집권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대학의 병영화를

시도했고, 그 첫 번째 조치가 대학생 교련과목의 신설이었습니다. 1969년 10월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이른바 ‘3선 개헌’을 통과 시킨 박정희 정부는 이듬해인 1970년 2월

23일, 국무회의를 열어 대학 교련 개정안을 확정, 새 학기부터 당장 시행토록 했죠. 그 내용은

종래의 예비역 교관을 현역으로 바꾸고, 매주 2시간씩 3학년까지 실시해오던 훈련을 매주

3시간씩 4년간 총 711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치는 학생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학생들의 저항은 1970년을 거쳐 이듬해인

1971년까지도 이어졌죠. 더군다나 그해 4월 27일에는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1학기 개강과 함께 교련 철폐 시위로

들끓던 대학가는 부정선거 논란까지 가세하자 걷잡을 수 없는 저항의 불길이 되어 타오르게

 됩니다. 서울대와 고대, 성균관대 학생들은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4ㆍ27 선거를 불법ㆍ부정ㆍ관권 선거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대정부 투쟁을 선언합니다.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은 군사교육거부로 상징화 했죠. 문교부는 5월 27일 서울대에

휴업령을 내렸고, 6월1일 서울대는 처음으로 시위 학생에 대해 자체 징계조치(제명 3,

자퇴권유2, 무기정학 17명)를 내립니다. 군부대를 일정 지역에 주둔케 하여 그 곳의 경비와

질서장악, 시설물 보호를 책임지도록 하는 위수령은 1970년 4월 대통령령 제 4949호로

정식 제정되었고, 박정희 정부가 내린 ‘10ㆍ15 조치’는 이에 따른 최초의 위수령이었습니다.

17일 각 대학은 시위 주동학생 174명을 제적했다고 문교부에 보고합니다.

 

 

 

 

 

 

당국은 제적된 학생들이 재입학하거나 편입학을 못하도록 학칙을 고칠 것을 대학에 지시하죠.

또 국방부는문교부로부터 제적학생 명단을 넘겨받아 1차로 47명에게 입영 영장을 발부합니다.

 경찰도 시위 주동자와 제적 학생에 대해 특별 검거령을 내리죠. 이렇게 연행된 학생들은 바로

수도통합병원으로 끌려가 간단한 신검절차를 거쳐 논산행 입영열차를 타야했습니다.

시위 주동학생 제적, 학칙 개정, 영장 발부 등을 완료한 당국은 23일 오전 각 대학에 주둔한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리고 11월 9일에는 위수령을 해제하죠. 그리고 1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 영구집권을 위한 독제체제를 구축합니다.

 

 

 

 

 

글 출처 : http://blog.ohmynews.com/gompd/1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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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4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

 

 

 

 

▶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폐막, 한국 2연속 종합 2위

 

▶ 2001년   '시안(西安)사변' 주역 장쉐량 하와이서 별세

 

▶ 1998년   노벨경제학상에 인도 아마르티아 센 선정

 

▶ 1994년   PLO 아라파트 의장-이스라엘 라빈 수상, 노벨평화상 수상

 

▶ 1993년   영화 '서편제'로 임권택-오정해, 상하이국제영화제서 감독상-여우주연상 수상  

 

▶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예능보유자 김재원씨 별세

 

▶ 1991년   한국-리투아니아, 국교 수립

 

▶ 1991년   아웅산 수치 여사, 노벨평화상 수상

 

▶ 1990년   레너드 번스타인 사망

 

▶ 1985년   41세의 배우 미셸 콜뤼시 `사랑의 식당(Restos du coeur)` 출범

 

▶ 1981년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취임

 

▶ 1976년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공사 1단계 준공

 

▶ 1975년   영동-동해고속도로 개통  

 

▶ 1973년   태국, 반정부 학생데모로 4백여명 사상, 타놈내각 총사직

 

▶ 1972년   미국-소련, 해운(海運)협정 조인

 

▶ 1970년   수학여행버스 열차 충돌로 46명 학생 사망

 

▶ 1968년   대입입시 예비고사 실시 발표

 

▶ 1967년   삼일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기공

 

▶ 1966년   세계 最古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

 

▶ 1964년   노벨평화상, 미국 흑인운동지도자 마틴 루터킹 목사로 결정

 

▶ 1963년   모로코-알제리, 국경분쟁으로 교전

 

▶ 1962년   미국 U2 정찰기, 쿠바에 건설중인 소련 핵미사일 기지 촬영

 

▶ 1961년   유엔군 카탕카군(콩고), 휴전협정 조인

 

▶ 1948년   지방행정조직법 국회 통과

 

▶ 1947년   미국 벨X1호, 세계최초 초음속비행 성공

 

▶ 1945년   김일성 귀국 환영 군중대회 평양서 개최

 

▶ 1943년   일제점령하 필리핀, 공화국 독립선언

 

▶ 1933년   독일, 제네바군축회의 국제연맹 탈퇴 성명

 

▶ 1930년   하마구치 일본수상 피격

 

▶ 1914년   일본, 독일령 남양제도(諸島) 점령

 

▶ 1907년   뉴욕, 금융공황 발생

 

▶ 1905년   러일전쟁 종결

 

▶ 1900년   시인 주요한 출생

 

▶ 1890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출생

 

▶ 1885년   한-러시아 수호통상조약 비준교환

 

▶ 1872년   일본 최초의 철도인 요코하마-시나가와 구간 개통

 

▶ 1841년   일본의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출생

 

▶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

 

 

 

 

[ 사진2.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

 

[ 사진3.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최태선 학생회장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70년 10월14일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울경서중학교 학생 76명을 태운 버스가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건을 한번 되돌아 보겠습니다.

 

 

 

[ 사진4.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교장 ]

 

 [ 사진5.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교장 분향 ]

 

 

 

1970년 10월 14일 오후 4시20분경 충남 아산군 백방면 모산역 북쪽

약1km지점에 있는 건널목에서 현충사에 소풍갔다 귀경하던 서울 경서중학교

학생 76명을 태운 서울 연흥관광 소속 관광버스가 서울발 장항행 제5열차에

왼쪽을 들이 받혀 휘발유 탱크가 터지면서 불길에 휩싸여 80m나 튕겨나갔다.

 

 

 

 [ 사진6.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및 벗들의 품에 안겨 ]

 

 

 

이사고로 학생 45명과 운전사가 숨지고 30명이 중상을 입었다.사고는

버스운전사가 '일단정지' 수칙을 지키지 않았고 이 건널목에는 날마다

각종 차량이 5천여대나 오가는데도 간수와 차단기도 없이 자동경보기만

설치한데다 담임교사가 감독을 소홀히 해 일어났다. 또 3일 후 원주

터미널에서 열차와 열차가 충돌, 수학여행길의 서울 인창고교 학생들과

교사 15명이 사망했다.

 

 

 

[ 사진7. 수학여행 버스사고 서울경서중학교 왼쪽-장례식 전경 , 오른쪽-정다운 교정에 못다한 꿈을 묻고 마지막 가는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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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3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노태우 범죄와의전쟁 ]

 

 

 

 

▶ 2010년   대한민국 국적 생존자 중 5000만 번째 주민등록자 탄생

 

▶ 2010년   69일간 매몰됐던 칠레 광부 33인 구조  

 

▶ 2009년   중국 최후의 '건국 장성' 뤼정차오 사망

 

▶ 2002년   전파연구소 `형식승인 처리방법`을 제정, 고시

 

▶ 2000년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 1999년   미국 프로농구 선수 윌트 체임벌린 사망

 

▶ 1999년   탤런트 서갑숙 자전 에세이집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출간

 

▶ 1999년   유엔, 탈북자 `난민`으로 인정

 

▶ 1999년   로버트 먼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

 

▶ 1997년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와 게리 애덤스 신페인당 당수, 북아일랜드 분규발생후 76년 만에 회동

 

▶ 1996년   독일 `슈테른`지 창설자 헨리 나넨 사망

 

▶ 1995년   영국 반핵 운동가 롯블라트 199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

 

▶ 1994년   북아일앤드 신교도 무장조직들, 구교도와 아일랜드 공화군에 대한 휴전선언 성명 발표

 

▶ 1993년   미국 러셀 헐스-조제프 테일러, 세계 최초로 쌍성 펄사 발견 공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 1992년   미국 시카고대학의 게리 베커 교수, 노벨경제학상 수상

 

▶ 1992년   북한탈출 귀순자 안혁, 강철환, 북한 연변 등 12곳의 정치범수용소에 20여만명이 수용돼 있다고 밝혀

 

▶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범죄와의 전쟁 선포

 

▶ 1986년   유성환 의원, 국회 대정부질문중 국시(國是)발언

 

▶ 1982년   원전 9-10호기 공사 기공(경북 울진)   

 

▶ 1981년   문교부, 국민학교 영어교육 결정

 

▶ 1980년   국보위, 사회악사범 4만7천여명 검거. 군부대 순화교육(삼청교육)중이라고 발표

 

▶ 1979년   신민-통일당 의원 69명, 의원직 사퇴서 제출(11.15 반려)

 

▶ 1978년   중국, 모스크바 겨냥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설치 발표

 

▶ 1977년   루프트한자 여객기 서독 적군파에 피랍

 

▶ 1970년   캐나다-중국, 국교 수립

 

▶ 1969년   인왕산 청운(淸雲)스카이웨이(現-인왕스카이웨이) 개통

 

▶ 1967년   NATO본부 파리 철수. 16일부터 벨기에 브뤼셀서 개소

 

▶ 1965년   맹호부대 인천항 출발

 

▶ 1964년   공화당 이만섭의원 판문점에 남북한면회소 설치 제의

 

▶ 1964년   뇌염환자 2957명. 사망 953명 발표

 

▶ 1962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초연

 

▶ 1962년   한국신문발행인협회 창립

 

▶ 1960년   북한, 중국에 대한 4억 2000만루블 차관에 조인

 

▶ 1958년   미국, 핵실험 정지 17개국 결의안 유엔총회 정치위원회에 제출

 

▶ 1958년   말라가시, 공화국 선포

 

▶ 1957년   이집트군, 시리아 침입

 

▶ 1952년   미국-영국-프랑스, 대(對)유고 원조협정 조인

 

▶ 1948년   사범학교 제외한 중고교 남녀공학제 폐지

 

▶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발족(단장 이범석)

 

▶ 1945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발족

 

▶ 1943년   총독부, 전시교육비상조치방책 발표

 

▶ 1943년   이탈리아, 독일에 선전포고

 

▶ 1925년   마거릿 대처 출생

 

▶ 1924년   '멍텅구리 헛물켜기' 연재

 

▶ 1919년   경성악우회, 종로 청년회관에서 제1회 음악연주회 개최

 

▶ 1909년   스위스의 법률가 겸 철학자 카를 힐티 사망

 

▶ 1909년   제1회 사법시험 실시

 

▶ 1908년   의병장 이강년 순국

 

▶ 1908년   월북 시인 임화 출생

 

▶ 1905년   헨리 어빙 사망

 

▶ 1866년   병인양요

 

▶ 1822년   이탈리아의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 사망

 

▶   552년   백제, 일본에 불교 전수

 

▶     54년   제4대 로마제국 황제 클라디우스 사망

 

▶     54년   제5대 로마제국 황제 네로 즉위      

 

 

 

 

 

[ 사진2. 노태우 범죄와의전쟁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90년 10월13일 대한민국 노태우대통령이

특별선언을 했습니다. 바로 범죄와의 전쟁을 치뤄 근절하겠다는 특별

선언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민생치안을 강화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기반으로 두고 나온 정책이라기보다는 집권 4년차를 앞두고 어지러운

정국과 사회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주도권을 잡으려는 이벤트성 정책

이었다는 평가가 많았었죠. 대통령이자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였던

노태우는 조기 레임덕 조짐을 보이면서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

으로부터 노골적으로 탈당 등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사진3. 노태우 범죄와의전쟁 ]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동기의 진정성을 불문하고 민생치안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이 정책은 단기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고, ‘전쟁’ 선포 이후 공보처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92%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당시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쟁’ 선포 후 일년 동안 조직폭력배

1,923명을 검거했다고 되어 있으니 대통령이 팔 걷어 부치고 나선 전쟁이

효과를 보긴 본 셈입니다. 하지만 거물급 조직폭력배는 대부분 잠적하고

검거 실적용으로 조직원들을 잡아들이기 일쑤였고 이 마저도 집행유예,

벌금형 등으로 1년 안에 50%가 풀려났습니다.

 

 

 

 

[ 사진4. 노태우 범죄와의전쟁 ]

 

 

 

 

전체적인 치안도 그다지 개선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92년 1월 경찰청이 내놓은 ‘10.13범죄와의 전쟁 2주년 평가서’를 보면

‘2년간의 대범죄전쟁으로 강.절도 등 주요 5대 범죄는 감소추세에 있으나,

신형범죄와 충동적인 범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적시돼 있습니다.

오히려 ‘전쟁’ 운운하며 살벌한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며 시민불안을

가중시켰고, 실적 맞추기용 영장발부 및 인권침해 사례가 속출함에 따라

비판이 고조되었죠.

 

 

 

 

[ 사진5. 노태우 범죄와의전쟁 ]

 

 

 

 

결국 ‘범죄와의 전쟁’ 정책은 노태우 대통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1992년 10월 ‘범죄와의 전쟁’ 2주년 즈음에 노태우는 결국 민자당을 탈당했죠.

정확히 말하면 탈당 강요에 백기투항 했고, 이벤트성 정책으로 본인의 레임덕을

조금 더 연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운명을 바꾸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1992년 1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 정책을 승계하지 않았을 뿐더러

1995년 11월 노태우대통령을 구속시키며 범죄자로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실제로는

이 범죄와의 전쟁에서 노태우는 최고의 ‘대어’가 잡힌 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 사진6. 노태우 범죄와의전쟁 ]

 

 

 


글 출처 : http://www.entermedia.co.kr/news/news_view.html?idx=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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