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6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경위를 발표하는 전두환 ]

 

 

 

▶ 2009년   국회, 한.인도 CEPA 비준안 처리

 

▶ 2005년   원로 영화 감독 최훈(崔薰) 씨 타계

 

▶ 2005년   대한항공 비행 시뮬레이션 대회

 

▶ 2005년   로버트 김, 10년만에 고국땅으로...

 

▶ 2000년   사진작가 김근원씨 별세

 

▶ 1998년   서울 월드컵 경기장 기공식

 

▶ 1998년   전세계 300만번째 도메인 네임(lizzybee.com) 등록

 

▶ 1997년   TDX 1000만 회선 돌파

 

▶ 1995년   조선 중종때 정온의 시신, 파주군서 미라로 발견

 

▶ 1990년   한국-소련 간 직통전화 개통

 

▶ 1989년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 착공

 

▶ 1984년   아시아-태평양전기통신협의체(APT) 서울총회 및 관리이사회 개최

 

▶ 1983년   미국, KAL기 블랙박스 수색중단

 

▶ 1983년   북괴공작원 버마로부터 추방

 

▶ 1981년   안기부, 학원침투 교포간첩단 검거 발표

 

▶ 1980년   조치훈, 일본 바둑 명인위 획득

 

▶ 1979년   계엄사,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 1978년   이란, 팔레비왕 군사내각 수립

 

▶ 1975년   모로코, 평화대행진 선발대 서부사하라 국경내 10km까지 진입

 

▶ 1972년   태국 학생들 일본상품 불매운동 결의

 

▶ 1970년   이탈리아-중국 국교 수립

 

▶ 1968년   닉슨, 미국 37대 대통령에 당선

 

▶ 1968년   월남평화협상 시작

 

▶ 1966년   이동문학가 마해승 별세

 

▶ 1962년   동해북부선 개통

 

▶ 1962년   아랍연합, 사우디아라비아와 단교

 

▶ 1961년   유엔, 핵실험 금지안 가결

 

▶ 1959년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통치를 반대한 필리핀 대통령(1943-45) 라우렐 사망

 

▶ 1959년   능의선 기공식(능곡-의정부)

 

▶ 1956년   아이젠하워 재선

 

▶ 1954년   유엔총회서 미국-영국 등 60개국, 원자력 평화이용 공동결의안 제출

 

▶ 1951년   허정, 국무총리 서리 임명

 

▶ 1950년   맥아더, 중국 월경(越境) 성명

 

▶ 1949년   북한, 중국과 국교수립

 

▶ 1947년   폴라로이드 사진기 개발

 

▶ 1945년   일본 연합국총사령부(GHQ), 일본재벌에 해체 명령

 

▶ 1937년   도로규칙 개정(1938.4 실시)

 

▶ 1937년   이탈리아-일본-독일 방공(防共)협정 가입

 

▶ 1937년   영국의 배우 포브스 로버트슨 사망

 

▶ 1922년   안창남 도쿄~오사카 왕복우편비행대회서 우승

 

▶ 1907년   미국, 파나마 독립승인

 

▶ 1906년   일본, 남만주철도회사 설립

 

▶ 1905년   YMCA창설자 조지 윌리엄스 사망

 

▶ 1893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사망

 

▶ 1884년   영국, 뉴기니아를 보호령화

 

▶ 1880년   오스트리아 소설가 로베르토 무질 출생

 

▶ 1860년   링컨, 미국16대 대통령에 당선

 

▶ 1854년   `행진곡의 왕` 미국 작곡가 존 필립 수자 출생

 

▶ 1836년   프랑스의 왕 샤를10세 사망

 

▶ 1814년   벨기에의 악기 제조인 아돌프 삭스 출생

 

▶ 1506년   연산군 사망

 

▶ 1107년   윤관 여진정벌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가 1979년 11월 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전모를 발표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이 사건은 주범인

前중앙본부장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은 전연 없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는 박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김계원

 외에 만찬석을 도와준 여인 2명이 함께 있었고 김재규는 만찬도중 박대통령과

차 경호실장을 총으로 쏘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권개입이 많다는 대통령의

경고와 정국수습책의 거듭된 실패로 해임설이 돌자 불안한 상태에 놓인 김재규는

박 대통령이 軍후배이며 연하인 車실장만을 편애한다고 생각, 박대통령을 제거하면

자신이 차기 대통령으로 가장 적임자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또 부마사태를 대통령제거의 계기로 역이용, 거사 후 계엄군을 장악하면 사후수습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살해계획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1980년 1월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5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1월5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명예혁명 ]

 

 

 

▶ 2010년   '미술사학계 거목(巨木)' 진홍섭 전 교수 별세

 

▶ 2008년   '쥐라기 공원'의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 사망

 

▶ 2005년   원로 동양화가 박원수씨 별세

 

▶ 2005년    제1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 2002년   `국민통합21` 창당, 정몽준의원을 대통령후보와 당대표로 추대

 

▶ 2000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 '일본 구석기 유적 날조' 보도

 

▶ 1998년   조치훈 명인, 세계최연소-세계최단지로 1,000승 달성

 

▶ 1998년   국제천문연맹,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씨가 국내서 첫 발견한 소행성 공식 인정

 

▶ 1997년   영국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 사망

 

▶ 1996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재선

 

▶ 1996년   민속학자 김두하 옹 별세

 

▶ 1995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재 창설

 

▶ 1993년   유럽통합군 창설

 

▶ 1991년   필리핀, 태풍`셀마`로 4천여명 사망.실종

 

▶ 1991년   영국 언론재벌 총수 맥스웰 사망

 

▶ 1991년   고당 조만식선생 국립묘지에 안장

 

▶ 1989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사망

 

▶ 1986년   김대중씨,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권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

 

▶ 1984년   다니엘 오르테, 니카라과 대통령선거 당선

 

▶ 1982년   자원관리법안 국회제출

 

▶ 1981년   정부, 제2제철 광양만에 건설키로 확정

 

▶ 1980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공포

 

▶ 1980년   한국-바누아트 국교 수립

 

▶ 1979년   이란, 대(對)미 우호조약 파기 선언

 

▶ 1978년   한국-투발루 국교 수립

 

▶ 1974년   제1회 세계식량회의 로마서 개막

 

▶ 1973년   미국의 고생물학자 로머 사망

 

▶ 1970년   춘천호(의암댐)서 나룻배 전복

 

▶ 1966년   휴 헤프너의 `플레이 보이`왕국 공개

 

▶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고

 

▶ 1961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발족 

 

▶ 1960년   미국 슬랩스틱 희극의 아버지 마크 세넷 사망

 

▶ 1958년   이승만대통령 월남방문

 

▶ 1956년   유엔, 중동경찰군제 창설 결의

 

▶ 1951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 파견

 

▶ 1949년   한국, 유엔식량농업기구 가입

 

▶ 1945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결성

 

▶ 1944년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사망. 혈관봉합술 발달 공로로 1912년 노벨의학상 수상

 

▶ 1940년   에콰도르 대통령 롤도스 아길레라 출생

 

▶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최초로 대통령에 3선

 

▶ 1937년   조선중앙일보 폐간

 

▶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 1916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 1916년   폴란드 독립선언

 

▶ 1915년   불교중앙학교 설치 인가. 뒤에 혜화전문 동국대학으로 발전

 

▶ 1914년   독일의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사망

 

▶ 1914년   독일군, 1차 대전 중에 일어난 아프리카 최초의 `탕가 전투`에서 영국군에 대승

 

▶ 1914년   영국-프랑스, 對터어키 선전포고. 키프러스 합병 선언

 

▶ 1913년   비비안 리 인도에서 출생

 

▶ 1913년   러시아-중국, 외몽고협정

 

▶ 1912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 당선

 

▶ 1911년   이탈리아, 트리폴리를 합병

 

▶ 1911년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경성섬유 창립

 

▶ 1906년   의병장 최익현, 대마도서 순국

 

▶ 1904년   전독립협회원, 고종 밀지 휴대하고 미국으로

 

▶ 1888년   독립운동가 이규갑 출생

 

▶ 1879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사망

 

▶ 1854년   프랑스의 유기화학자 폴 사바티에 출생

 

▶ 1750년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 출생

 

▶ 1688년   영국 명예혁명

 

▶ 1605년   영국서 화약음모사건 발발, `가이포크스데이`라 불림

 

▶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등, 반란 일으킴

 

 

 

 

1688년 11월 5일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혁명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너는 그것을 떨어트려야 한다.The revolution is not an apple that falls when it is ripe. You have to make it fall.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혁명의 무기다.It is not just a simple game, it is a weapon of the revolution.-체 게바라(Che Guevara

명예혁명의 원인중 하나는 제임스 2세의 반동정치였다.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돼 일으킨 최초의 시민혁명인 청교도 혁명, 전제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정치 체제를 바꾼 명예혁명. 이 두 혁명은 영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다.

특히 명예혁명과 관련해 체결한 권리장전은 영국의 절대주의를 종식시켰고 의회정치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나아가 미국의 독립선언,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많은 나라의 헌법에 있어 권리와 의무 규정의 기본이 되고 있다.


1. 배경
명예혁명 이전에 영국에는 청교도혁명이 있었다. 이때 잠시 영국에서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되었다. 하지만 청교도라는 종교가 너무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강요하다보니 사람들의 불만을 사서 공화정을 폐지하고 왕정이 복고된다.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안으로는 의회파가 장로파, 독립파, 수평파로 갈려 그 골이 깊어만 갔고,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왕을 처형한 나라라 해서 유러의 군주들은 영국을 두려움과 적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의 처형은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여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손잡고 왕정복고를 꾀하던 찰스 1세의 아들을 프랑스로 쫓아버렸다.

한편 항해조례를 발표,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두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654년 크롬웰은 호국경 자리에 올랐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대였다. 크롬웰이 1658년 사망하고 그로부터 꼭 2년 만인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시민은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거리는 꽃으로 수놓아지고 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깃발이 휘날렸다. 창문과 발코니마다 사람들과 트럼펫 소리가 가득 차고, 수많은 군중이 길을 메웠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지 11년 만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왕위에 오른 사람이 찰스 2세다. 찰스 2세는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헨리 8세 때 영국 국교는 성공회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을 복고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의회에서 심사율이라는 법을 제정하게 된다. 심사율이란 성공회신자가 아닌 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다.

의회는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가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에서 제외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만 실패한다. 따라서 찰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자 찰스 2세의 아우인 요크 공작, 즉 제임스 2세가 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회 걱정대로, 제임스 2세는 심사율을 무시하면서까지 가톨릭 신자들을 공무원에 임명하는 등, 한층 더 적극적으로 가톨릭 복고를 추진하고, 전제정치까지 더해 이미 청교도혁명 때 사라진 절대왕정을 복구하려고 한다.

2. 전개
제임스 2세의 이같은 정치에 반발한 의회는, 네덜란드의 윌리엄과 그에게 시집을 간 메리 스튜어트(제임스 2세의 장녀)를 설득해, 군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고, 이에 응낙한 윌리엄과 메리는 영국에 군대와 함께 돌아온다. (제임스 2세의 다른 자식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이에 훗날 앤 여왕으로 즉위하는 제임스 2세의 차녀인 앤 스튜어트와 다수의 귀족들과 호족들이 의회에 동참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려 한다. 이 사실을 안 제임스 2세는 군대가 런던으로 진입하기 전에 미리 프랑스로 도망 간다. 따라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에 성공하였다 하여 명예혁명이라 이름을 붙인다.

사람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군주제였으나 그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를 한껏 동경하며 지낸 인물로 꿈은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찰스 2세는 돌아오자마자 부왕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있던 13명을 처형시키고 크롬웰의 시체를 파내어 그 목을 잘라버렸다. 그런가 하면 몰수되었던 왕당파의 토지를 무상으로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카톨릭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왕당파가 왕의 비호 아래 다시 고개를 쳐들어 의회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이 의회를 '기사의회'라고 비꼬았다. 1670년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다. 자신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20만 파운드를 받는 외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원조를 받으며, 프랑스를 도와 전쟁에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그의 친불정책은 국내 자본가들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이었으며, 국민감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카톨릭 세력만이 그를 환영했다. 불안을 느낀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율을 제정했다. 심사율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이고, 인신보호율은 아무 이유 없이 인민을 체포, 구금하지 못하며, 구금된 자는 20일 이내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이다.

1679년 이번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의회와 왕의 대립이 벌어졌다.
찰스 2세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제임스는 형보다 더한 전제주의자인데다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배척파들은 망명을 떠났다. 철학자 존 로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당이라 불렀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명예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와 앤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당과 토리 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3. 결말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선언'을 승인케 했다. '권리선언'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글 출처 : http://www.dailyjeonbu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760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1월4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이란 학생들 미국 대사관 인질극 ]

 

 

 

 

▶ 2010년   세계 최고령 114세 블랑샤르 수녀 별세

 

▶ 2009년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별세

 

▶ 2005년   `은방울 자매` 박애경씨 별세

 

▶ 2002년   국내 감자칩서 발암물질 검출

 

▶ 1999년   이영욱 연구팀, 은하계 형성에 관한 논문 네이처지에 발표

 

▶ 1997년   국민신당, 이인제 전경기지사를 대통령선거 후보로 결정

 

▶ 1995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 질 들뢰즈 자살

 

▶ 1995년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총리 피살

 

▶ 1993년   조계종 종정 성철 스님 열반

 

▶ 1992년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빌 클린턴 당선

 

▶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창립 

 

▶ 1983년   대구 광명그룹 도산

 

▶ 1983년   버마, 북괴와 단교. 정부승인 취소

 

▶ 1982년   현대미포조선소 제2공장 준공. 세계 제1의 대단위 수리조선소 준공

 

▶ 1980년   레이건, 제40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 1979년   이란 학생들 미국 대사관 인질극

 

▶ 1973년   단양서 동양 최초의 동굴벽화 발견

 

▶ 1966년   제1회 전국기능올림픽대회 개막

 

▶ 1961년   한국-룩셈부르크, 국교 수립

 

▶ 1961년   소련, 북극해서 31회 핵실험

 

▶ 1961년   딘 러스크 미국무장관 내한

 

▶ 1956년   소련군, 헝가리 부다페스트 진주, 카다르 친소정권 수립

 

▶ 1952년   미국 34대 대통령에 아이젠하워 당선

 

▶ 1952년   러시아 캄차카 반도 진도 9.0 지진 발생

 

▶ 1950년   서양화가 이인성 사망

 

▶ 1946년   유네스코 발족-유네스코 현장 발효

 

▶ 1937년   세계최대 일본 전함 `대화(大和)` 기공

 

▶ 1926년   한글점자 완성

 

▶ 1926년   조선어학회, '가갸날'제정

 

▶ 1921년   일본수상 하라 다카시(原敬), 도쿄역에서 피살

 

▶ 1920년   조선체육회, 첫 전국야구대회 개최

 

▶ 1911년   독일-프랑스, 모로코협정 체결

 

▶ 1904년   소설가 이태준 출생

 

▶ 1901년   영왕 비 이방자 여사 출생

 

▶ 1899년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간

 

▶ 1847년   독일 작곡가 멘델스존 사망

 

▶ 1716년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 사망

 

 

 

 

[ 사진2. 팔레비 전 이란 국왕 ]

 

 

오늘의 역사에서는 36년 전 오늘 1979년 11월 4일, 300여명의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의 담을 넘어 들어갑니다.

이들 대학생들은 1979년 11월 초, 이슬람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샤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이란 국왕이 같은해 10월 췌장암 치료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입국하자 미국에 그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습니다.

 

 

 

[ 사진3. 분노한 이란 시민들이 성조기를 태우고 있다 ]

 

 

 

대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힌 미국인들은 대사관 직원들과 그 가족 등

모두 90명. 하지만 미국이 학생들의 요구를 거부한데다 이슬람혁명을

 주도한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학생들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사태는 장기화됩니다. 인질 중 여성들과 흑인들은 순차적으로 풀려났지만

52명에 대한 억류는 해가 바뀌어도 계속되었죠.

 

 

 

[ 사진4. 인질 구출작전에 동원됐던 헬기와 수송기 잔해 ]

 

 

 

사태가 장기화 되자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1980년 4월 7일 이란과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같은 달 24일 무력으로 인질 구출작전에 나섭니다.

그러나 ‘독수리 발톱작전’으로 이름 붙여졌던 이 구출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끝이 나고 맙니다. 미군이 구출작전을 위해 동원했던 헬기와 수송기가

충돌하면서 화재가 발생해 특공대원 8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던 것이죠.

 

 

 

[ 5. 헬기와 수송기 충돌로 사망한 8명의 미군들, 해병대 3명, 공군 5명 ]

 

 

 

인질사태 장기화는 금 가격과 금리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 미국뿐 아니라

세계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결국 억류되었던 미국인 인질들은

1981년 1월 20일 미국의 새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취임식 날에 풀려나게

됩니다. 사태 발생 444일만의 일이었습니다.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는

지난 60~70년대 형성된 중동권의 반미주의가 미국에 직접 도전장을 던진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 사진6. 인질극 구출 실패의 흔적, 폭발과 화재로 녹아버린 C-130 수송기의 잔해 ]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1월03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광주학생운동 ]

 

 

 

 

▶ 2011년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 통일부총리 별세

 

▶ 2005년   국산김치 16개 제품에서 기생충알 검출

 

▶ 2004년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자 전락원 회장 별세

 

▶ 2004년   조지 W 부시, 존 케리 누르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재선

 

▶ 2002년   터키 이슬람계 정당 80년만에 단독 집권

 

▶ 2002년   세계최대게임대회 `월드사이버게임즈` 한국종합 1위

 

▶ 2000년   채권은행단, 삼성쌍용차 등 29개 부실기업의 청산-법정관리 발표

 

▶ 1998년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한국인 신호범(미국명 폴 신) 당선

 

▶ 1997년   시인 김요섭씨 별세

 

▶ 1995년   작곡가 윤이상 독일에서 사망

 

▶ 1989년   대불산업기지 착공

 

▶ 1989년   공업용 우지로 라면-마가린 등을 제조한 5개업체 대표 10명 구속(공업용 우지 파동)

 

▶ 1984년   11년 만에 학생의 날 부활

 

▶ 1983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발견(도산 안창호선생 장녀집서)

 

▶ 1982년   미해군, 5번째 원자력 항공모함 건조착수

 

▶ 1982년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 사망

 

▶ 1982년   삼성그룹, 조선호텔 및 주변부지 매입

 

▶ 1980년   입법회의,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의결

 

▶ 1980년   군사재판, 김대중에 사형선고

 

▶ 1979년   박정희대통령 국장

 

▶ 1978년   소련-베트남 우호조약조인

 

▶ 1978년   도미니카 연방,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76년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 당선

 

▶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 1970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사망

 

▶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 취임

 

▶ 1969년   미국, 아폴로11호 우주인 방한(암스트롱, 콜린즈, 올드린 부부)

 

▶ 1966년   세계반공연맹 가입

 

▶ 1966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도착

 

▶ 1964년   존슨, 제35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 1961년   유엔사무총장 대리에 우 탄트 임명

 

▶ 1958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 대관식

 

▶ 1957년   소련,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발사

 

▶ 1956년   시리아-이란군부대 요르단에 진주

 

▶ 1955년   바그다드조약기구 성립(터키 이라크 영국 파키스탄 이란)

 

▶ 1954년   프랑스화가 앙리 마티스 사망

 

▶ 1953년   제1회 학생의날

 

▶ 1948년   김구, 미소양군 철수후 통일정부수립 요지의 담화

 

▶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신문 `고대신문` 창간

 

▶ 1946년   일본, 신헌법 공포

 

▶ 1945년   고당 조만식 평양서 조선민주당 결성, 당수에 피임

 

▶ 1945년   미국, 전시생산국 폐지

 

▶ 1937년   브뤼셀에서 중일전쟁에 관한 9개국회의. 일본비난선언 채택

 

▶ 1936년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재선

 

▶ 1936년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 재선

 

▶ 1935년   필리핀공화국 수립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발생

 

▶ 1911년   소설가 남석(南石) 안수길 출생

 

▶ 1908년   미국 대통령에 태프트 당선

 

▶ 1903년   파나마, 콜롬비아로부터 독립

 

▶ 1901년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 출생

 

▶ 1898년   만국우편협약 비준

 

 

 

 

 

[ 사진2. 조선총독부의 사찰보고서(광주-연합뉴스) 발췌 ]

 

 

 

 - 광주학생운동 -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가중됨에 따라 조선인 교육에 대한 불평등한 현상이 일어났다.

1925년 조선 안에 있는 일본인은 41만 명이요, 조선인은 2000만 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초등교육

보조비는 일본인 학교가 조선인 학교보다 많았다. 중등교육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인이 100원을 내고

1명을 교육시킬 때 일본인은 13명을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1925년도 일본인 납세액이 142만8000원이고, 조선인은 4474만 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성제국대학,

각종 전문·사범 등 전체 학생수는 6,835명이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 학생수는 불과 792명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였으며, 조선역사와 조선어교육을

 소홀히 하였다. 심지어 가사선생을 일본인으로 하는 우스개 같은 일도 있었다. 조선인 학생만 수용하는

학교의 절대다수는 일본인 교사였다.

 

 

[ 사진3. 광주학생운동 ]

 

 

 

  이와 같은 교육의 불평등에서 오는 반일감정이 동맹휴학(맹휴)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폭발되어

전국적으로많은 맹휴가 중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공립학교에서의 맹휴가

사립학교보다 많았던 사실이다. 사립학교에는 자격 있는 선생을 채용할 것이 맹휴의 주된

유였으나, 공립학교에서는 조선역사는 조선인 선생으로, 비인간적인 일본교사 축출, 조선인

채용증가, 그리고 조선어 수업시간 증가 등이 맹휴의 이유였다. 1927∼1929년의 3년간

사립학교 맹휴는 연평균 27건이었는데, 공립학교에서는 51건으로 사립학교보다 많았던 것은

일본인 교사와 자주 접촉할 수 있었던 공립학교 학생간에 반일사상이 증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독립만세에서 맹휴라는 방법으로 표출되었고 맹휴는

일종의 유행병과 같이 각종 학교로 전파되었다. 일본인교사 배척을 내세우며 맹휴는 계속되었다.

 

 

[ 사진4. 광주학생운동 ]

 

 

 

  가령,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교무주임 사이토(齊藤)는 조선풍습에 관해서 이해가

없으니 면직하라는 것 그리고 조선 학생을 사랑하고 호의로 대해 준 다카하시(高橋)

교사의 전근은 부당하다는 것 등으로 맹휴를 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서 광주학생운동은

 만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운동의 촉매작용을 한 것은 열차 내에서의 광주중학생

(일본인)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간의 싸움이었다. 광주와 송정리간의 운암역 부근에서,

개를 잡는 조선인을 보고 일본인 학생이 야만이라고 말하자 무엇이 야만이냐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맞서 싸웠다(1929.6.26.). 다음은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 흔드는 통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분개해서 역에 내려서 일본인 학생과 싸웠다.

 

 

[ 사진5. 광주학생운동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름 없는 별들' ]

 

 

 

  이와 같은 두 개의 전초전을 지나서 1929년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을 기하여 양교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음력으로는 우리의 개천절에 해당되는 10월 3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의가 있는 충돌이었다. 일본학교(광주중학교)가 기념식 후 신사참배를 하고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은 학교에서 기념식을 끝내고 10명씩 짝을 지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지난번 충돌에 대해 편파적 보도를 한 광주일보사를 습격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일본인 학생과 싸웠는데, 이 싸움에 조선인 중등학생을

총동원시켜 일본인 학생과 일촉즉발의 큰 싸움이 벌어질 뻔하였다. 일본경찰은 주모자로

지목된 조선인 학생을 검거하고 죄를 캐물었다.

 

 

[ 사진6. 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외곽에 위치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은 검거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게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라는 선언문을 배포하였다. 광주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조선인 학생 70명에 대하여 체형(体刑)을 언도하였다.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학생운동으로 퍼져 이것을 광주학생운동이라고 불렀고, 건국

 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특색은 일본인 학생을 상대로

물리적 싸움을 벌인 데 있다고 하겠다.지금까지의 만세운동을 떠나 타도운동으로 전향한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서울에서는 이화·동덕·배화·정신·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등

10개 교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사진7.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내 학생운동 기념탑 ]

 

 

 

  경찰의 학교침입 반대, 식민지교육 폐지, 광주학생희생자 석방, 퇴학생 복교 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청년·학생, 오호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약소민족해방

만세’, ‘제국주의타도 만세’,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전단을 뿌리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나 서울여학생사건은 공통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항거하였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약소민족간에 반제동맹(反帝同盟)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

학생운동도 반제운동으로 그 진로를 정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광복 전 학생운동으로 그 순수성과

학생 독자적 사상, 그리고 운동 내용으로 볼 때 2·8독립선언과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사의

백미라고 아니할 수 없다.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1월02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2005년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유치 주민투표 (경주 선정)

 

▶ 2004년   이슬람권의 여성 처우문제 비판한 네덜란드 영화제작자 반 고흐 피살

 

▶ 2004년   셰이크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하얀 UAE 대통령 사망, 30여년 절대통치 마감

 

▶ 2004년   전국에서 모인 3만 여명의 식당 업주들,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 모여 솥뚜껑 시위

 

▶ 2000년   서울여대 설립자 고황경 박사 별세

 

▶ 1999년   콜레스테롤 낮추는 `신물질` 국내 첫 개발

 

▶ 1998년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제4차 유엔기후변화회의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80개국 대표들이 참가 개막

 

▶ 1992년   영국 찰스왕세자부처 내한

 

▶ 1991년   정부, `국군의 날` `한글날` 공휴일 제외 확정

 

▶ 1988년   5공비리특위 청문회

 

▶ 1987년   자오쯔양(趙紫陽)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출

 

▶ 1983년   남서울대공원에 선보일 각종 동물 미국으로부터 김포 도착

 

▶ 1983년   그레나다, 북한외교관 추방

 

▶ 1982년   올빼미 등 21종, 독도 등 5개섬 천연기념물 지정

 

▶ 1981년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 구성

 

▶ 1980년   이란의회, 미국인질석방 건의

 

▶ 1980년   중국 4인방(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기소

 

▶ 1973년   김종필총리 일본방문. 김대중 납치사건 일단락

 

▶ 1972년   평양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2차회의 개최

 

▶ 1968년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백여명 침투

 

▶ 1965년   아프리카 외상회의

 

▶ 1965년   1965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 `고요한 돈강`의 번역 출판 금지

 

▶ 1965년   프랑스-소련, 핵병기 확산방지에 관한 공동성명 발표

 

▶ 1963년   베트남 쿠데타, 고딘디엠 대통령 피살

 

▶ 1961년   혁명재판소, 장도영 전최고회의의장 법정구속

 

▶ 1955년   사정위원회 발족, 위원장 조용순

 

▶ 1952년   한글학자 정태진 사망

 

▶ 1951년   공비출몰로 남한 전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 1950년   영국 극작가 버나드 쇼 사망

 

▶ 1948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재선

 

▶ 1941년   콜롬보회의, 한국을 회계자문위원회 13차회의 옵서버로 승인

 

▶ 1941년   영국, 노동당수에 휴 케이츠켈 재선

 

▶ 1936년   BBC, 세계최초의 TV방송 시작

 

▶ 1928년   조선문예영화예술협회 창립

 

▶ 1927년   상해에서 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 개최

 

▶ 1920년   미국, 라디오 정시 방송 시작

 

▶ 1917년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 유태인 국가건설을 지원하는 '밸푸어선언' 발표

 

▶ 1909년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를 폐쇄하고 일본총영사관을 개청

 

▶ 1906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 출생

 

▶ 1874년   만국우편조약 체결

 

▶ 1874년   일본, 요미우리신문 창간

 

▶ 1865년   미국의 제29대 대통령 하딩 출생

 

▶ 1795년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포크 출생

 

▶ 1755년   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출생

 

▶ 1699년   프랑스 화가 샤르댕 출생

 

▶ 1594년   조선 명장 임경업 출생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무장공비 1백여명이 침투한 사건에 대해서

한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968년 11월 2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부대 소속의 무장공비가 경북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했다.

이는 지난 1.21 청와대기습사태의 실패를 만회하고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0월 30일에서 11월 2일에 이르는 사흘 사이에 8개조로 나누어져

야음을 타고 경상북도 울진군 고포해안에 상륙, 울진·삼척·봉화·명주·정선 등지로

 침투했다. 군복·신사복·노동복 등 갖가지 옷차림에 기관단총과 수류탄을 지닌

무장공비들은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책자를 나누어 주면서 북한 발전상을 선

전하는 한편, 정치사상교육을 시키면서 `인민유격대`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울진군 북면 고숫골의 경우, 11월 3일 새벽 5시30분쯤 7명의 공비가 나타나

"경북경찰대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어주러 왔다."라며 주민을 모은 다음,

사진을 찍고 위조지폐를 나누어주고 사상선전을 한 다음 유격대지원청원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이때 이 마을에 나타난 양양군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병두를

 대검으로 찔러 죽였으며,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도록 위협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만행이 잇따랐는데, 삼척군 하장면의 한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 세사람이 난자 당했으며,

평창군 산간마을에서는 10세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절규하다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공비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결사적인 신고에 힘입어 상황을 파악한

당국은 11월3일 오후 2시30분을 기하여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예비군을 출동시켜

 소탕작전을 벌인 결과 11월 16일까지 3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으며,

 연말까지 대부분을 소탕했다.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0월30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2010년   조선내화 창업주 이훈동 회장 별세

 

▶ 2009년   정부, 아프카니스탄 파병안 발표

 

▶ 2009년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타계

 

▶ 2005년   가장 오래된 광개토대왕비 유리원판 사진 공개

 

▶ 2002년   국산 초음속 항공기 T-50 첫비행 성공, 초음속기 보유 세계 12번째

 

▶ 2002년   중국, '양빈 재산몰수 . 국외추방' 북에 공식통보

 

▶ 2001년   초음속 경(輕)공격기 한.미 공동개발

 

▶ 2000년   동아건설, 채권단의 자금지원-워크아웃 중단 결의로 사실상 퇴출

 

▶ 2000년   팔레스타인 독립선포 연기

 

▶ 2000년   앙골라 여객기 추락 전원 사망

 

▶ 1999년   인천 호프집 화재로 중-고생 등 56명 사망

 

▶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전자 회장, 평양에서 김정일 면담

 

▶ 1997년   유럽 12개국 공동상업위성 `아리안5호` 발사

 

▶ 1997년    대한민국 . 캄보디아 대사급 수교 합의 

 

▶ 1992년   프랑스 화가 존 미첼 사망

 

▶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경기민요 `선소리산 타령` 예능보유자인 정득만씨 별세

 

▶ 1991년   중동평화회담 마드리드서 개막

 

▶ 1990년   서울 국제무역박람회 개막

 

▶ 1990년   영국-프랑스간 해저터널 관통

 

▶ 1988년   국내 가입전화 1천만회선 돌파

 

▶ 1987년   신민주공화당 창당(총재 김종필)

 

▶ 1983년   그레나다 북한 군사동맹

 

▶ 1981년   폴란드, 파업금지법안 의회에 제출

 

▶ 1981년   정전위 중립국감독위 소속 체코병사, 판문점 유엔군 관할지역으로 망명

 

▶ 1979년   일본, 오오히라(大平)내각 총사퇴

 

▶ 1976년   중앙정보부, 거문도 침투간첩 김용규의 자수 발표

 

▶ 1975년   스페인왕에 후안 카를로스 즉위

 

▶ 1974년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에 KO승

 

▶ 1972년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ABM) 발효

 

▶ 1967년   소련 인류 최초로 무인원거리조종 위성 코스모스 186,188호 자동도킹 성공, 3시간 30분 궤도 돌고 분리

 

▶ 1967년   중국-인도네시아, 쌍방 외교관 완전철수 합의 (사실상 단교)

 

▶ 1966년   아베베 동아마라톤(서울~인천)서 2시간 17분 04초로 우승, 1위로 골인한 마지막 레이스

 

▶ 1963년   알제리와 모로코간 사하라전투 휴전에 합의(2일 재발)

 

▶ 1962년   이스라엘, 벤스비대통령 3선

 

▶ 1962년   유엔총회, 중국 가입안 부결

 

▶ 1961년   소련 공산당대회, 레닌묘에서 스탈린유골 추방 결의

 

▶ 1960년   부산 밀수깡패 100여명의 경관납치 구타사건

 

▶ 1959년   서울지검, 위장자수간첩 김승균 월북 직전 체포

 

▶ 1957년   혼혈아 80명 미국으로 첫 이민

 

▶ 1953년   일본-중국, 무역협정 조인

 

▶ 1948년   유엔임시총회, 총회에 대하여 남북평화교섭 달성시까지 점령군 계속 주둔 요청

 

▶ 1847년   미군정 장관에 딘 소장 취임

 

▶ 194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WHDLS

 

▶ 1945년   군정청, 출판등록제 실시

 

▶ 1943년   일화(日華)동맹조약 체결

 

▶ 1938년   미국, '화성인 습격했다' 대소동

 

▶ 1930년   일본 발명가 도요다 사키치 사망

 

▶ 1929년   나주역 사건, 광주 항거 시작

 

▶ 1922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로마 점령

 

▶ 1920년   경성복심법원, 3.1운동관계자 48인에 대한 공소심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림

 

▶ 1913년   부제(府制) 공포 (일본인거류민단법, 거류지제도철폐)

 

▶ 1910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사망

 

▶ 1905년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국민참정권 인정. 의회소집 선언

 

▶ 1885년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 출생

 

▶ 1871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 출생

 

▶ 1861년   프랑스 조각가 부르델 출생

 

▶ 1861년   오스트리아, 루마니아와 동맹 결성

 

▶ 1823년   방직기 발명가 카트라이트 사망

 

▶ 1735년   미국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출생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인천시 중구 인현동은 한때 10대들의 해방구였다. 제물포고·인천여고 등 학교가 밀집해서, 분식집·당구장·노래방 등 학생을 상대로 한 가게가 300여 곳이나 번창했다. 인천지역 중고생들 사이에서 ‘동인천’으로 통하는 집결지였다.
1999년 10월30일도 그랬다. 이날 제물포고·선인고·인천고 등 인천시내 10개 고교 가을 축제가 끝나자, 학생들은 인현동 골목으로 집결했다. 이곳에 위치한 라이브II 호프집에도 10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이날 저녁 7시, 50여평 규모의 호프집에 120명이나 북적이는 와중에 건물 지하에 있는 노래방 내부수리 공사장에서 불이 났다. 불은 계단을 타고 순식간에 2층과 3층사이로 번졌다. 소방차 15대와 구급차 19대, 소방관 180명과 경찰관 160명이 진화에 나서 35분만에 진화했다. 

 

 

   

 

 

 

 

그러나 피해가 컸다. 이날 화재로 2층 라이브II 호프집과 3층 그린당구장에 있던 10대 청소년 57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특히 2층 호프집에 있던 10대들 피해가 가장 컸다. 호프집은 탁자와 의자들로 빽빽이 가득 차 있어, 실내 통로 공간이 겨우 한 사람이 다닐 수 있을 만큼 좁았다.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입구 계단의 너비가 1.2m에 불과했다. 이 출입구가 막히면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창문이 있었지만 구조변경을 통해 통유리로 바꿔 달았고 베니어판을 덧붙였다. 결국 화재가 나자 미처 대피할 공간을 찾지 못한 채 서로 뒤엉켜 인명피해가 더 커졌다. 생존자들은 “비상구가 없고 창문도 대형유리로 완전 밀폐돼 있어 순식간에 연기와 불길 속에 갇혔다. 의자와 탁자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수십 명이 한꺼번에 뒤엉켰다”라고 사고 순간을 증언했다. 
 
화재가 난 건물은 4층이었다. 지하 1층은 노래방, 지상 1층은 음식점, 2층은 호프집, 3층은 당구장, 4층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4층 이하의 건물에 대해 별도의 비상계단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축 법규에 따라 별도의 비상계단 등 대피통로가 없었다. 유일한 탈출구가 바로 좁은 출입 계단이었다. 학생들은 사실상 폐쇄된 공간에서 빠져나갈 통로를 찾다 숨졌다.

 

 

 

 

 

 

법대로라면 이 호프집에는 10대가 출입할 수 없었고, 사고 당일 영업을 할 수도 없었다. 식품위생법과 청소년보호법은 청소년들에게 술을 팔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호프집은 미성년자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10대들의 해방구로 통한 동인천은 이런 법의 사각지대였다. 당시 호프집 인근에 파출소가 있었지만 사실상 불법 영업의 무풍지대나 다름없었다. 법대로 단속을 하더라도 업주들이 무시하기 일쑤였다. 라이브II 호프집도 참사 열흘 전에 문제업소로 경찰에 적발되어 영업장 폐쇄명령을 받았다. 그런데도 이른바 ‘삐끼’를  고용해 청소년들을 끌어들인 뒤 문을 안에서 잠그고 ‘배짱 영업’을 계속하다 참사가 났다. 
 
사고 건물은 화재에도 무방비 상태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건물은 지은 지 15년이나 된 노후건물이었다. 전기 배선이 난마처럼 얽혀있고, 방화시설이 미비해 화재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고 발생 전에 이뤄진 정기소방점검에서 ‘이상 없음’ 판정을 받았다.  처음 불이 난  지하 노래방 천정에 스프링클러가 애초부터 없었다. 불이 났을 때 화재경보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화재 전날 지하 노래방 공사 인부들이 공사에 방해가 된다며 소화분말액을 자동 분사하는 천장의 확산소화기 15대를 모두 제거하기도 했다. 초기진화 자체가 불가능한 셈이었다.

 

 

 

 

  

 

인현동 호프집 화재는 유치원생 19명의 목숨을 앗아간 씨랜드 참사 뒤 불과 넉 달 만에 일어나 충격이 더 컸다. 더구나 두 참사 모두 유독가스를 내뿜는 장식물이 희생을 키운 원인으로 똑같이 꼽혔다. 씨랜드 참사 때도 화재에 취약하고 유독가스를 발생시키는 스티로폼과 우레탄이 내장된 샌드위치 패널 때문에 피해가 컸는데, 인현동 호프집 화재에서도 노래방과 호프집의 내장재와 집기, 계단 장식물 등이 대부분 인화성이 강한 우레탄 등 합성수지 재질이 쓰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뒤 인천 지역 15개 고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저희들에게 호프집에 출입하지 말라고 다그치기 전에 학생들이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십시오. 깨끗하고 올바른 행정을 펴주십시오’라는 공동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0월29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막가파 암매장사건 ]

 

 

 

▶ 2009년   공정택 서울시교육감 당선 무효

 

▶ 2009년   헌법재판소, 미디어법(法) 유효" 결정

 

▶ 2008년   정부, 수말리아에 군함 파견 결정

 

▶ 2008년   파키스탄 남서부 바루치스탄 주에서 규모 6.4의 지진이 발생하여 200여명사상

 

▶ 2007년   '세계선교트렌드 1900-2000' 조동진 박사 출판기념 감사예배 인터컨티넨탈 호텔

 

▶ 2005년   인도 연쇄 폭탄테러

 

▶ 2004년   영국 왕실 최고령 앨리스 공주 별세

 

▶ 2002년   `청약자격 제한`시행. 5년내 아파트 분양 당첨땐 1순위 박탈

 

▶ 2002년   대치동 은마아파트 `재건축 불가` 판정, 부동산시장 큰파장

 

▶ 2001년   지리산에 고란초 군락지 발견

 

▶ 1998년   존 글렌 상원의원 등 7명의 우주인을 태운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 21호 발사

 

▶ 1996년   전남 해남에서 익룡 발자국 화석 발견

 

▶ 1996년   막가파 생매장사건

 

▶ 1992년   연세대 마광수 교수, 음란문서제조혐의로 구속

 

▶ 1983년   리비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추방령

 

▶ 1982년   한국전자박람회 개막

 

▶ 1982년   77그룹, 제3세계의 경제협력회의서 이스라엘 제외키로 결정

 

▶ 1981년   레이건 미국대통령, 황화 중공외상과 워싱턴서 회담

 

▶ 1981년   샹송가수 조르주 브라생스 사망

 

▶ 1981년   스웨덴 하원, 대(對) 나토 가입신청안 가결

 

▶ 1980년   이호 입법의회 의장 피선. 정래혁-채문식 부의장 피선

 

▶ 1980년   이호 입법의회 의장 피선. 정래혁-채문식 부의장 피선

 

▶ 1975년   유엔정치위, 한반도문제 서방안과 공산안 모두 가결

 

▶ 1971년   음반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 성립

 

▶ 1969년   발터 쉘 서독외상 할슈타인원칙선언 폐기

 

▶ 1963년   모로코- 알제리 간 사하라 전투 확대

 

▶ 1958년   러시아 작가 파스테르나크 노벨문학상 거부

 

▶ 1957년   서독 제3차 아데나워 내각 성립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발발

 

▶ 1956년   반도호텔에서 국내 첫 패션쇼

 

▶ 1950년   이승만 평양 방문 

 

▶ 1933년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 192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화 판소리`심청가` 예능보유자 정권진 출생

 

▶ 1924년   영국 총선 보수당 대승

 

▶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 초대 대통령에 케말 파샤 선출

 

▶ 1922년   서울에서 자유노동조합 창립

 

▶ 1920년   동만주의 대한광복단 등 4개 단체 총변부(總辯部)로 통합. 임정(臨政) 휘하에 들어감

 

▶ 1919년   제1회 국제노동회의 워싱턴에서 개막, 주당노동시간을 48시간으로 제한하는 조약 채택

 

▶ 1914년   터키 대(對)소련 참전. 함대가 오데사 세바스토폴리 공격

 

▶ 1911년   신문 경영인 퓰리처 사망

 

▶ 1909년   舊 한국은행 설립

 

▶ 1906년   이준-이동휘 등 한북흥학회(韓北興學會) 조직

 

▶ 1898년   관민공동회, 헌의 6조 건의

 

▶ 1897년   독일 나치 정권의 공보 선전 장관을 지낸 괴벨스 출생

 

▶ 1888년   수에즈운하 자유항행권(航行權)에 관한 콘스탄티노플 조약 체결 (영국-프랑스-독일 등 9개국)

 

▶ 1887년   전환국인 조폐창과 기기국인 기기창 준공

 

▶ 1783년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장르롱 달랑베르 사망.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 편찬

 

 

 

 

[ 사진2. 막가파 암매장사건 ]

 

 

 

1996년 10월 말경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업가 부부와 배신한 조직원 1명 등

총 5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암매장하거나 불에 태운 지존파의 충격적인 사건이 가시기도 전에 지존파를

모방한 '막가파'가 등장하였다. 최정수 등 일명 '막가파' 5명은 1996년 10월5일 서울 포이동 O빌라 앞에서

귀가 중이던 40대 여성을 승용차로 납치한 뒤 금품을 빼앗고 구덩이에 산 채로 밀어넣어 암매장한 사건이다. 

 

 

 

[ 사진3. 막가파 암매장사건 ]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돈많은 사람은 다 죽이고 싶었다"는 '막가파'는 '막가는 인생'이라는 뜻으로 지난 96년

10월10일 두목 최정수씨가 20대의 조직원 8명을 모아 만든 범죄조직단체다. 막가파 일당은 10월5일 오전

2시께 서울 포이동에서 일제 혼다 어코드 승용차를 타고 귀가 중이던 한 단란주점 여주인을 납치한 뒤

900만원을 인출하고 경기도 화성시 폐염전창고로 끌고가 생매장해 살해하는 등의 잔혹성을 보였다. 이들은

양은이파의 두목 조양은과 지존파의 범행내용 및 조직체계 등을 모방해 조직을 결성한 뒤 부유층을 상대로

마구잡이식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직결성의 목표는 부녀자납치와 아리랑치기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마련한 뒤 조직원들을 모아 전국 유흥업소에 취직시켜 전국을 무대로 한 거대 폭력조직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 사진4. 막가파 암매장사건 ]

 

 

 

96년 10월 경기도 광주시의 경찰 검문소는 도난 신고된 한 승용차를 검거했다. 차 안에는 5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빌린 차라고 주장했다. 이 번호판은 강남경찰서 관내에서 도난당한 것이라 검문소 경찰관은 이들을 곧

강남경찰서로 인계했다. 강남서 박모경위는 분명 이들이 여죄를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5인조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이모군(당시 17세)을 불러냈다. 당시 도난차를 이용한 납치 사건이 빈발했었다. 박경위가

“너희들 사람 납치했지”라고 추궁하자 이모군은 “그렇다. 납치해서 죽였다”라고 순순히 털어놓았다. 하도 쉽게

시인하는 바람에 믿기지 않았으나, 이군이 말하는 범행 현장이 너무 구체적이라 형사계장과 함께 출동했다.

 

 

 

[ 사진5. 막가파 암매장사건 ]

 

 

이군이 말한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의 한 염전 소금창고에 도착해 땅을 파자 사람의 어깨 맨살이 나왔다.

‘어 진짜네!’ 계속 땅을 파들어가자 알몸의 40대 여성 사체가 나왔다. 시체는 고개가 옆으로 꺾인 채로

꼿꼿이 서있었다. 죽은 사람을 선 자세로 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혹시나 싶어 이군을 추궁하자,

산 채로 매장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땅을 너무 얕게 파서 머리는 옆으로 꺾어 흙을 덮었다”고 진술했다.

이군 등은 조직폭력배 조양은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보스’를 보고 막가파를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 사진6. 막가파 암매장사건 ]

 

 

 

이 영화를 보고 ‘배신하는 자는 죽인다’ ‘화끈하게 살다가 멋있게 죽는다’는 등의 강령을 만들고 ‘막가는 인생’

이라는 뜻으로 막가파를 만들었다. 막가파는 부녀자를 납치해 돈을 뺏거나 취객(醉客)을 때려 실신시킨 다음

돈을 터는 ‘아리랑치기’ 등을 통해 자금을 마련해 유흥비로 탕진했다. 그해 10월2일 새벽 2시쯤 막가파는 서울

신사동 도로에서 일제 혼다 승용차를 혼자 몰고 가는 여성(피해자)을 발견하고 포이동에 있는 집까지 따라갔다.

3일 후인 10월5일 새벽 2시경 이들은 포이동의 이 여자 집 앞에서 기다리다, 여자가 귀가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득달같이 달려들어 납치했다. 그리고는 금품을 뺏고 소금창고로 끌고 가 생매장했다.

 

 

 

[ 사진7. 막가파 암매장사건 ]

 

 

 

그로부터 12일 후인 10월17일에는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 제목 그대로 연속해서 3건의 주유소 습격

강도 행각을 벌였다. 새벽 3시쯤 이들은 경기도 광주군 한 주유소 사무실에 침입해 야구방망이로 종업원을 때려

눕히고 14만원을 강취했다. 그리고는 새벽 4시50분경 서울로 올라와 양재동의 한 주유소에 침입해 같은 방법으로

70만원을 털었다. 그로부터 50분 뒤인 새벽 5시40분에는 분당의 한 주유소에 들어가 종업원들에게 회칼을

들이대고 93만원을 강탈했다. 막가파는 이런 행각을 남자다운 짓으로 생각하고 범행한 것이었다.

 

 

 

[ 사진8. 주유소 습격사건 ]

 

글 출처 : http://perfectcam.tistory.com/136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0월28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2010년   경부고속철도(KTX) 2단계 구간(부산~대구) 개통식

 

2010년   중국 환경운동의 대부 량충제 회장 별세

 

2009년   진종오, 한국 최초 사격 월드컵파이널 2관왕

 

2009년   파키스탄, 최악의 폭탄테러 발생

 

2004년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 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 

 

2004년   법원 항소심서 조선일보의 ‘이승복군 사건 보도’ 사실로 판결

 

2000년   내국인 출입이 가능한 강원랜드 '스몰' 카지노, 강원도 정선 폐광촌에 국내 처음으로 개장

 

2000년   국내 민간항공 사상 최초인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1999년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자수

 

1995년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991년   한국-루마니아, 문화협정 체결

 

1986년   10.28 건대 점거농성 시위

 

1982년   스페인 총선에서 사회노동당 승리

 

1982년   포르투갈,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

 

1982년   이스라엘,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서 축출

 

1980년   고고학회, 경남 욕지군도서 중석기 문화유적발굴, 한국고고학 전국대회서 보고

 

1980년   전두환대통령,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 81명 임명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 대(對)리비아 단교 선언

 

1977년   자연보호협의회 발족

 

1974년   서독-소련 정상회담

 

1973년   이집트 작가 타하 후세인 사망

 

1963년   북한, 노동신문을 통해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

 

1962년   소련, 미국에 굴복하고 쿠바기지 철수를 명령

 

1958년   요한 23세, 제262대 로마 교황에 선출

 

1955년   마이크로소프트사 사장 게이츠 출생, 흔히 빌게이츠라고 불림

 

1951년   육군대학 창설

 

1947년   공창(公娼)폐지령 공포

 

1940년   이탈리아군, 그리스 침공

 

1937년   몽고 자치정부 수립

 

1927년   대하소설 `토지`를 펴낸 소설가 박경리 출생

 

1922년   무솔리니, 로마 진군

 

1919년   미국의회, 금주법 가결

 

1914년   종이 크로마토그래피를 개발한 영국의 싱 출생. 1952년 노벨화학상 수상

 

1913년   독일-터키 군사협정 체결

 

1912년   동경에서 유학생학우회 창립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발족

 

1886년   '자유의 여신상' 제막

 

1837년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출생

 

1707년   일본, 호에이(寶永) 대지진

 

1704년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 사망

 

1492년   콜럼버스 쿠바 발견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2009년 10월 28일 파키스탄 북서변경주에서

최대 도시에서 최악의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01명이 사망했다.

처음으로 파키스탄을 방문하는 힐러리 클린턴(Clinton) 미국 국무장관이

파키스탄에 도착한 지 3시간 만이었다. 이날 북서변경주 주도 페샤와르의

가장 번화한 시장 마에나 바자르(시장)에서 차량 폭탄 테러가 발생해 최소

101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쳤다. 사람들로 붐비는 좁은 시장 골목에서

0.3t이 넘는 고성능 폭탄이 터지면서 건물이 무너지고 불이 번져 시장통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피해자 구출 과정에서 건물이 추가로

붕괴하며 사상자가 더 늘어났다.

 

인명 피해 규모로만 보면 지난 2007년 10월 고(故) 베나지르 부토(Bhutto)

귀국 행렬에서 폭탄이 터져 140여명이 사망한 이후 파키스탄에서 발생한

테러 중 최대다. 이날 폭발이 일어난 곳은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종종 공격

대상으로 삼는 시아파 무슬림 집단 거주지역과 인접해 있다.

 

사건의 배후를 자처한 단체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외신들은 이날 테러 공격의

배후로 '파키스탄 탈레반(TTP)'을 지목했다. TTP 조직원 1만여명은 거점 지역인

남와지리스탄에서 정부군 3만명과 11일째 대규모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이날

테러가 클린턴 장관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도착 소식이 전해진 직후 발생한 점도

미국을 향한 탈레반의 경고 메시지일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를 실어주고있다.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0월27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2014년   실력파 음악가 '마왕 신해철' 향년 46세로 사망 

 

▶ 2010년   인도네시아 천재지변으로 국가비상사태 선포

 

▶ 2009년   문학평론가 장백일씨 별세

 

▶ 2005년   쌀협상 비준안 국회상위 통과

 

▶ 2005년   노충국씨, 군 오진(위궤양)으로 전역 한달 뒤 암으로 사망

 

▶ 2004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지진 발생 후 매몰 92시간 만에 두 살배기 유타군 구조

 

▶ 2000년   정현준-이경자씨, 동방금고-대신금고 불법대출과 로비혐의로 구속

 

▶ 1995년   프랑스, 남태평양 프랑스령 무루로아 환초에서 3번째 핵실험 강행

 

▶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 조성을 시인하는 기자회견

 

▶ 1989년   제9차 개헌안 국민투표 실시, 93.1% 찬성으로 통과. 제6공화국 성립

 

▶ 1983년   산악인 허영호 마나슬루봉 단독 등정 성공 

 

▶ 1981년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전수회관 준공

 

▶ 1981년   원효대교(1470m) 준공

 

▶ 1981년   소련 잠수함, 스웨덴 해군기지 근해에서 좌초

 

▶ 1980년   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공포

 

▶ 1980년   '10.27 법난' 발생

 

▶ 1979년   최규하 총리, 대통령권한대행 취임

 

▶ 1979년   전국에 비상계엄 선포

 

▶ 1976년   안동 다목적댐 준공

 

▶ 1976년   워싱턴포스트(WP), 박동선의 로비활동(코리아스캔들) 폭로

 

▶ 1972년   10월 유신 헌법안 공고

 

▶ 1969년   디오리 하마니 니제르공화국 대통령 방한

 

▶ 1969년   서독 정부, 2개의 독일(서독-동독) 인정

 

▶ 1968년   유엔총회, 서남아프리카에 대한 남아공 위임통치 종식

 

▶ 1966년   중국, 핵미사일 실험 성공

 

▶ 1962년   태국, 태풍 하리에트 엄습으로 138명 사망

 

▶ 1961년   로마 사회주의 인터내셔날회의, 한국의 투옥된 민주사회주의자들의 석방을 요청하는 결의안 채택

 

▶ 1955년   제네바서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외상회담

 

▶ 1955년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군사협정 조인

 

▶ 1950년   정부, 서울 환도

 

▶ 1945년   독립투사 박열, 22년2개월 만에 석방

 

▶ 1944년   군수회사법 시행

 

▶ 1938년   일본군, 중국 무한 3진 점령

 

▶ 1938년   듀폰사, 나일론 첫 상품화

 

▶ 1934년   제1회 조선어도서전시회 개최

 

▶ 1924년   조선학생총연합회 창립

 

▶ 1923년   국문학자 정한모 출생

 

▶ 1919년   영화 '의리적 구토' 첫 상영

 

▶ 1918년   인천항 갑문식 선거(船渠) 준공

 

▶ 1905년   대한적십자사 창설

 

▶ 1904년   뉴욕지하철 개통

 

▶ 1902년   춘사 나운규 출생

 

▶ 1895년   손문, 최초의 거병 시도 실패 (광주사건)

 

▶ 1883년   한국-독일 수호통상조약 조인

 

▶ 1871년   영국,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 산지 병합

 

▶ 1870년   미국의 법학자 링컨 출생

 

▶ 1858년   미국 26대 대통령 데오도르 루스벨트 출생

 

▶ 1844년   스웨덴의 정치가 아놀드손 출생. 1908년 노벨평화상 수상

 

▶ 1811년   가정용 재봉틀 `싱거 미싱` 개발자 아이작 싱어 출생

 

▶ 1782년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출생

 

▶ 1728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출생

 

▶ 1553년   에스파냐 신학자 세르베투스 화형

 

▶ 1469년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 출생

 

▶   113년   트라야누스 로마 황제,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로마 출발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작년 오늘 슬프고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가요계의 마왕 신해철이 사망한 날이다. 누구보다 강해보였던, 그래서

항상 그 자리를 당당하게 지킬 줄 알았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그는 홀로

고통 속에 잠들었다. 그리고 1년의 시간이 지났다.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믿지 않을

마왕 신해철의 빈자리... 

2015년 10월 27일은 가수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째 되는 날이다.

갑작스러웠다. 신해철이 쓰러졌다는, 그래서 의식을 잃었다는 거짓말 같은

소식이 10월 22일 보도됐다. 그리고 5일 만에 신해철은 사망했다. 누구도

예상한 적 없는, 본인조차 상상할 수 없는 사고였다.

 

 

 

 

 

 

 

 

◆ 신해철의 수술 그리고 사망…두 번의 영결식

 

신해철은 그해 10월 17일 K원장에게 장협착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직후

고열과 흉통을 호소하며 괴로워했다.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던 중 K원장을 찾아

수술 받은 병원에서 22일 실신했다. 신해철은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서울 아산병원으로

이송, 긴급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신해철은 눈을 뜨지 못했다. 범발성 복막염에 의한

심장압전에 따른 저산소성허혈성 뇌손상으로 신해철은 10월 27일 사망했다. 향년 46세.

서울 아산병원에서 5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10월 30일 오전 발인식이 거행됐다.

신해철의 운구는 서울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신해철의 갑작스런

죽음에 의문을 품은 유가족 및 지인들의 요청으로 화장이 철회됐다. 시신부검을

의뢰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결국 신해철의 영결식은 화장 절차 없이 진행됐다.

 

신해철의 아내 윤원희는 고인의 장협착 수술을 진행한 K원장을 상대로 업무상 과실

가능성을 제기하며 송파경찰서에 고소했다. 이후 검찰은 K원장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와 업무상 비밀누설 및 의료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11월 3일 신해철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통해 부검이 실시됐다. 그리고 이틀 후 11월 5일 경기도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신해철의 두 번째 영결식이 진행됐다. 직후 신해철 소속사 및

유가족 측은 기자회견을 열고, 국과수 부검 발표 및 관련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신해철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피력했다. 유가족과 K원장 측은 언론을

통해 각자의 입장을 밝히며 맞섰다. 서로의 주장을 반박했고, 팽팽한 법적공방을

선언했다.


 

 


 

 

◆ 유족 vs K원장 첫 공판…신해철 없는 다툼

 

그리고 지난 10월 21일 오후 서울동부지법 형사11부는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K원장에 대한 1차 공판이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신해철의

1주기를 앞둔 시점이었다. 검찰은 피고인 K원장에게 두 가지 혐의를 이유로

기소했다. K원장이 수술 당시 과실로 소장과 심낭에 천공을 냈고, 이 때문에

복막염과 패혈증이 유발돼 신해철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본인 동의

없이 위 축소수술을 진행했으며, 복막염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적적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을 문제로 삼았다. 또 신해철의 의료 정보를 온라인상에 공개,

의료법 위반이라고 짚었다. 하지만 K원장 측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K원장의

주장은 신해철의 위 축소 수술은 동의를 받고 진행했으며, 사망은 수술 과실이

아닌 이후 고인 과실이라는 것. 환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전부 취했고, 심낭에

발생한 천공은 의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신해철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고인의

의료 정보 공개는 이미 유족이 언론에 제시했다고 해명했다. K원장에 대한

2차 공판은 11월 18일 속행된다. 

 

 

 



 

◆ 故 신해철 1주기…추모물결 가득 


지난 24일 KBS2 ‘불후의명곡’과 JTBC ‘히든싱어4’는 나란히 故 신해철 편으로 꾸며졌다.

이들은 고인의 넋을 기리며, 그가 남겨놓은 음악으로 감동과 슬픔, 위로하는 방법을 택했다.

특히 ‘히든싱어4’의 경우 원조 가수가 없는 탓에 CD에서 반주 음악과 분리된 음원을 추출해

진행했다. 신해철의 아내 윤원희는 두 프로그램에 모두 출연, 남편을 향한 관심에 감사인사를

전했다. 25일 방송된 MBC ‘일밤-복면가왕’에는 신해철의 제자 은가은이 출연, ‘그대에게’를

부르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했다. 신해철의 추모식은 10월 25일 오후 경기도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진행됐다. 추모식은 ‘그리움의 편지’, ‘퍼플 리본 달기’ 등 식전행사와 추모 미사와

 추모사 낭독, 기제사 예식 등으로 이뤄졌다. 이어 유토피아 납골당에 안치된 유골을 야외

안치단으로 옮기는 봉안식 및 장지 헌화식 등 자유 참배도 진행됐다.


안치단은 신해철의 딸 신지유 양이 그린 그림과 ‘빛이 나는 눈동자가 있어서 우리를 보고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글로 완성됐다. 높이 2m, 너비 1.7m 크기의 오면체로 구성됐다.

유족의 뜻대로 내부에는 ‘히얼 아이 스탠드 포유’ 가사 전문이 새겨졌다. 봉안식에서 넥스트

멤버 이현섭은 고인의 아내와 자녀와 함께 신해철의 발표곡 ‘민물장어의 꿈’을 불렀다.



 



 

◆ 멈추지 않는 마왕 음악…신해철 유작발매

 

신해철의 추모식이 열린 자정에는 ‘웰컴 투 리얼 월드(Welcome To The Real World)’를

비롯해 총 3곡의 유작이 수록된 앨범이 발매됐다. 지난해 데모버전으로 공개됐던

‘I Want It All’도 완성된 편곡으로 수록됐다. ‘더 늦기 전에’ ‘그저 걷고 있는 거지’ ‘길 위에서’

 ‘힘을 내’ 등 총 40곡을 감상할 수 있다. 앨범에는 넥스트 멤버들이 참여했고, 가수 서태지가

 완성을 위한 조언을 덧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음원은 27일 신해철의 사망 1주기를

맞아 LP판이 출시된다. 3000장 한정판으로 출시, 6660001~66603000까지 고유 번호가

표시된 카드가 포함된다.

 

가수 윤종신도 신해철 추모에 동참했다. 신해철의 1집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에 수록된

‘고백’을 리메이크했다. 이 곡은 신해철과 무한궤도에서 함께 음악했던 공일오비 정석원이

편곡을 맡았다. 음원 수익금은 전액 유족에 전달된다.

 

 

글 출처 :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811544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

 

 

[10월26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

 

 

[ 영상1.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

 

 

 

 

▶ 2009년   강동림, 동부전선 3중 철책선 절단 후 월북

 

▶ 2005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제26주기 추도식(국립현충원)

 

▶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월드시리즈 우승

 

▶ 2005년   10.26 국회의원 재선거

 

▶ 2005년   안중근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서울시교육원 강당)

 

▶ 2004년   강원도 철원 최전방 철책선 절단 사건 발생

 

▶ 2002년   살인용의자 조모씨 검찰조사받다 사망

 

▶ 2001년   마이크로소프트(MS), 새로운 운영체제 `윈도XP` 출시

 

▶ 2001년   미국, 차세대 전투기에 록히드 마틴의 'X-35' 선정

 

▶ 2001년  경복궁 흥례문 복원

 

▶ 1998년   국제지뢰제거회의가 2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막(~28일)

 

▶ 1996년   김경호 일가 귀순

 

▶ 1983년   서울시교육위 외국어고등학교 첫선

 

▶ 1982년   이승복 기념관 개관

 

▶ 1982년   유엔총회, 이스라엘 축출안 부결

 

▶ 1979년   삽교천 방조제 준공

 

▶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 천연두 근절 선언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 1977년   한국-요르단, 문화협정 체결

 

▶ 1977년   미국-소련, 군사교관 교환

 

▶ 1975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미국 첫 방문

 

▶ 1974년   극작가 박진 사망

 

▶ 1963년   흐루시초프 달 정복경쟁 폐기를 선언

 

▶ 1962년   인도 대통령, 중공의 국경선 공격으로 비상사태령 공포

 

▶ 1959년   소련, 달 뒷면사진 공개

 

▶ 1959년   전국노협(勞協) 창립총회 개최

 

▶ 1958년   중국군 북한서 철수 완료

 

▶ 1957년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 사망

 

▶ 1955년   베트남공화국 출범 (고 딘 디엠 대통령 취임)

 

▶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법 공포

 

▶ 1953년   한국정치회담의 예비회담 판문점서 개최

 

▶ 1951년   영국 총선거, 보수당 승리로 처칠 6년 만에 재집권

 

▶ 1950년   유엔군, 원산 상륙

 

▶ 1950년   국군 압록강변 도달

 

▶ 1948년   국부군, 만주 철수 개시

 

▶ 1947년   캐시미르분쟁 시작

 

▶ 1916년   프랑스 정치가 미테랑 출생

 

▶ 1909년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 1906년   이갑 등 서우학회 조직

 

▶ 1895년   역법 개정. 태양력 사용

 

▶ 1850년   월남 이상재 출생

 

 

 

 [ 사진2.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궁정동 ]

 

 

 

- 10.26 사건,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입니다.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 주장이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습니다. 그럼 사건의 배경과 사건의 순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진3.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왼쪽-빅정희 , 오른쪽-김재규 ]

 

 

 

 

10·26 사건(十二六事件) 또는 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이다. 십이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 사진4.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궁정동 ]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 사진5.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궁정동 ]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 사진6.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총을 쏘아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쏘았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은 후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서 멈추었다. 머리의 총격이 치명상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

           라고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 역시 확인 사살했다.

 

 

 

[ 사진7.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왼쪽-심수봉 , 오른쪽-신재순 ]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당했다.

 

 

 

[ 사진8.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김재규 재판 현장 ]

 

 

 

10.26 사건의 원인

 

김재규는 10월 유신으로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 -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 -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번째 -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째 -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

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

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 사진9.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김재규 재판 현장 ]

 

 

 

미국의 대응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 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 사진10. 박정희대통령 영결식 ]

 

 

 

사건의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미국으로 이민갔다.

 

 

 

 

블로그 이미지

블루레몬에이드

인서울학점은행 “인서울쌤” 문의☎ 02) 2088-8406 e-mail : egreen8406@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