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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0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거물 간첩 황태성 ]

 

 

 

 

▶ 2010년   '3무(無)경영' 실천한 '뚝심의 경영인' 설원봉 대한제당 회장 별세

 

▶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취임

 

▶ 2000년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서울서 개막

 

▶ 1999년   압두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에 당선

 

▶ 1999년   정부, 초저가 `인터넷PC 보급정책` 마련

 

▶ 1998년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 발표

 

▶ 1990년   한중무역사무소 개설 합의

 

▶ 1986년   카드식 공중전화기 첫 설치

 

▶ 1984년   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위 3차 전체회의. 자본주의경제개혁안 채택

 

▶ 1983년   비숍 그레나다 수상 피살

 

▶ 1982년   중국, 국경무역사무소 개설 보도

 

▶ 1982년   환경청, 진해 부산 광양만 등 4개 해역에 `연안오염특별관리해역` 선포

 

▶ 1982년   에콰도르정부, 에콰도르전역에 비상사태 선포. 헌법기능 정지

 

▶ 1980년   부산 지하철 1호선 기공

 

▶ 1980년   북한,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공식발표

 

▶ 1979년   마산 창원에 위수령 선포

 

▶ 1973년   문화의날 선포

 

▶ 1968년   주간조선 창간

 

▶ 1964년   미국의 제31대 대통령(1929~33 재임) 후버 사망

 

▶ 1963년   거물 간첩 황태성 검거

 

▶ 1962년   중국-인도, 국경서 전면 충돌

 

▶ 1958년   태국, 무혈쿠데타 발생. 사리트 원수 정권장악

 

▶ 1951년   동경서 제1차 한일회담 개최

 

▶ 1947년   브라질, 대소련 단교

 

▶ 1946년   영국, 버마의 독립허용을 설명

 

▶ 1944년   레이테섬 상륙작전

 

▶ 1943년   일제, 우리나라에 학병지원제 실시

 

▶ 1940년   독립운동가 이범윤 사망

 

▶ 1935년   홍군(紅軍)의 대장정 1년 만에 끝나

 

▶ 1907년   베를린에서 제2회 독일노동자회의 열림

 

▶ 1904년   볼리비아와 칠레가 강화조약에 조인

 

▶ 1903년   미국-캐나다, 알래스카 국경확정

 

▶ 1891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출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 1859년   미국 철학자 존 듀이 출생

 

▶ 1854년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랭보 출생

 

▶ 17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6세 사망

 

▶ 1437년   경원성(慶源城, 둘레 1,755척)과 경흥성(慶興城, 2,186척) 완공

 

▶ 1361년   고려, 홍건적 10만군 삭주(朔州)·이성(泥城)에 침입

 

 

 

 

[ 사진2. 거물 간첩 황태성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평화통일 선전과 남북협상 공작을 위해 남파 된 거물급

간첩 황태성 간첩 사건을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황태성은 경상북도 상주군에서 출생하여 1923년 9월 8일

서울 제1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에 동맹휴학사건에

관련되어 퇴학당하였습니다.

 

 

 

[ 사진3. 한때 박정희 대통령의 멘토였으나 훗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형 당한 비운의 밀사 ]

 

 

 

그 뒤 1924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공산주의운동에 가담하였고,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경상북도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고 1946년 10월1일 ‘대구폭동’을

주동하다가 월북하였습니다. 월북한 뒤 북한의 대남공작 담당기관인

해주인쇄소 총무국장으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8월28일 이른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6·25전쟁 때는 군에

편입되어 남하한 뒤 서울에서 의용군 모집에 적극 활약하여

북한노동당으로부터 신임을 받았죠.

 

 

 

[ 사진4. 한때 박정희 대통령의 멘토였으나 훗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처형 당한 비운의 밀사 ]

 

 

 

그 뒤 평양으로 돌아가서 상업성 지방관리국장을 거쳐 상업성

부상까지 되었고, 1961년 6월 25일 황태성은 당시 대남공작

총책 이효순(李孝淳)의 소환을 받고 다음과 같은 지령을 띠고

남파되었습니다.

 

 

① 남한의 고위 지도층 가족을 포섭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접 접촉할 것.

② 앞의 사명을 수행하기 어려우면 경상북도에 가서 대구시를 중심로  

    당의 기반을 구축하고 신분을 합법화할 것.

③ 남한의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조성하여 4·19혁명 재판과 같은 혁명의

    계기를 만들 것.

④ 평화통일 선동 및 미군 축출을 위한 반미사상을 고취시킬 것.

 

 

1961년 8월 29일 평양을 출발하여 9월 1일서울에 잠입, 친척 되는

모 대학강사 김민하(金旼河)와 접촉, 북한에 있는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의 소식을 전하면서 포섭에 성공합니다. 포섭된 김민하를

통하여 조카딸 임미정(林美亭)과 그녀의 남편 권상릉(權相陵)을

포섭하고, 그 뒤 10월 9일 황태성은 자신의 중매로 박상희

(박정희의 형)와 혼인한 조기분 여인을 통해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 및 그녀의 사위인 김종필(金鍾泌)과 접촉하자

권상릉·임미정에게 편지를 휴대시켜 방문하도록하였으나,

조모 여인은 접촉을 거부하고 곧 수사당국에 신고하였습니다.

 

 

 

[ 사진5. 거물 간첩 황태성 윗줄 오른쪽에서 3번째 ]

 

 

 

이에 서울시 경찰국 수사진은 10월 20일 황태성을 검거하고

공작금 120만 환, 라디오 1대, 암호 문건 1조 등을 압수하는

한편, 임미정과 권상릉도 체포합니다. 그 뒤 황태성은 대법원의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처형됩니다.
이 사건은 광복 후 처음으로 현고위 지도층의 가족을 통하여

고위 지도층과 직접 접촉하기 위해 부상까지 지낸 거물급 인사를

 남파했다는 점에서 정부 고위층과의 관련설로 인하여 한때 정계는

물론, 세인의 의혹과 물의를 일으켰었죠. 따라서 정부는 그에 대한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국회가 국정감사를

통한 진상 규명에 들어갈 정도로 북한의 대남도발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글 출처 : http://www.douban.com/group/topic/53877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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