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6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백마고지 전투 ]
[ 영상1. 백마고지 전투 3인의 영웅 ]
▶ 2010년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정식 서명
▶ 2009년 헌법학 권위자 권영성 교수 별세
▶ 2000년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4차 총 폐업
▶ 2000년 장종훈, 국내 프로야구 사상 첫 300홈런 신기록 달성
▶ 1999년 인천지하철 1호선 개통
▶ 1998년 한국은행 초석세운 미국의 아서 블룸필드 박사 사망
▶ 1997년 '프리온' 단백질 발견한 미국 프루시너 교수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 1994년 한국-멕시코, 이중과세방지협정 체결
▶ 1992년 안기부,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적발 발표
▶ 1987년 MS 사무용 SW 엑셀 2.0 버전 출시
▶ 1986년 삼성전자, 세계 최초 초소형 4mmVTR 개발
▶ 1982년 아시아-태평양우편연합(APPU) 집행이사회 개막
▶ 1982년 한국-노르웨이 경제, 기술협력협정 서명
▶ 1981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피살
▶ 1977년 육림의 날 제정
▶ 1977년 미국-소련, 국경회담 개최
▶ 1977년 미국, MX미사일 개발을 발표 ▶ 1976년 태국 군부쿠데타 발생 ▶ 1976년 중국 4인방 체포 ▶ 1976년 소련, 북한에 차관 중단 ▶ 1973년 서울 인구 600만 돌파, 세계 6위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 1972년 서울 인구 600만 돌파, 세계 6위 ▶ 1972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첫 대규모 일본 관광객 입국 ▶ 1971년 남북적십자, 3차 예비회담. 본회담의 서울, 평양 교대 개최에 합의 ▶ 1956년 한미우호통상조약 체결 합의 ▶ 1955년 반공대회헌장 조인 ▶ 1955년 조선실록 간행 착수 ▶ 1953년 한일회담 3차회의 ▶ 1953년 일본 해상보안청, 독도에 표주 건립 ▶ 1952년 백마고지 전투 ▶ 1951년 동경에서 한국-일본예비회담 개최 ▶ 1950년 나비연구가 석주명씨 별세 ▶ 1946년 경향신문 창간 ▶ 1931년 미국 단엽기(單葉機) 미스 비도르호 태평양 무착륙비행 성공 ▶ 1927년 첫 유성영화 '재즈 싱어' 개봉 ▶ 1926년 미국에서 토키(발성)영화 성공 ▶ 1913년 원세개, 중국 초대대통령에 취임 ▶ 1908년 오스트리아, 보스티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 ▶ 1906년 소련 소비에트 결성 ▶ 1905년 모스크바 카잔철도 수리공장 노동자 파업(모스크바에 처음으로) ▶ 1896년 영국 풍자만화가 뒤 모리에 사망 ▶ 1887년 건축가 르코르뷔지에 출생 ▶ 1875년 독립운동가 김혁 선생 출생 ▶ 1860년 프랑스군, 북경교외의 원명원을 점령 ▶ 1552년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 출생 ▶ 1351년 고려, 공민왕 즉위 ▶ 671년 신라, 당군을 축출
[ 사진2. 백마고지 전투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동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이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벌인 전투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진 날입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중동군 14,000여명의 사상자를, 한국군은 3,396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내는 치열한 전투로 10일의 전투기간동안 12차례나 쟁탈전이 반복됐고, 고지의 주인이 바뀐 것도 7차례나 됐지만 끝까지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럼 백마고지 전투의 치열했던 현장의 이야기를 한번 들여다 볼까요??
[ 사진3. 백마고지 전투 ] 주인이 7번 바뀐 백마고지 전투는?
백마고지전투는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다. 백마고지 (395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10일동안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에서 국군의 전투능력과 투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결전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다. 제9사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계속해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 하에 둘 수 있었다. 또 중부지역의 작전을 위해 필수적인 주요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중부지역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할수 있게 됐다. 또한 한국군지휘관의 전투 지휘능력과 한국군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 사진4. 백마고지 전투 ]
백마고지의 전략적 중요성
백마고지 전투는 1 9 5 2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비교적 쉽게 타결될 것으로 판단했던 포로 협상이 타결점을 찾지 못하면서 다시 피를 흘리는 군사작전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비교적 전선이 안정된 서부와 동부지역보다는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의 역곡천 일대에서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한 쟁탈전이 다시 불을 뿜었다. 백마고지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야산으로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 효성산(△596) 남쪽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해발 395m의 고지였다. 이 일대는 6·25전쟁 전까지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쯤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접촉이 계속되자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평범한 야산이 일약 관심을 모으는 핵심지역으로 부각, 이 지역이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서남쪽 철원 꼭지점의 견부를 구성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이 이 지역을 점령한다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 하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부대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많은 통로를 사용할 수없었다.
[ 사진5. 백마고지 전투에서 부상 당한 우리나라 국군 ]
1951년 백마고지 확보 배경
395고지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국군 제9사단은 1951년 10월17일 미 제3사단과 교대, 이 지역에 배치된 이후부터 방어태세를 재정비하고, 예상되는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던 차 1951년 11월초 휴전회담에서 현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게 되자, 이 일대를 아군에게 내주고 효성산 일대로 물러난 중공군 제42군(군단)이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백마고지 전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1951년의 전투는 판문점에서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회담기간 중인 11월3일,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이 방어중인 국군 제29연대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됐다. 그러나 이 때의 공격은 아군도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 중인 제29연대가 비교적 쉽게 격퇴했다. 중공군은 11월 5일 오후 9시를 기해 증강된 대대 규모로 또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제29연대 제1대대는 끝내 395고지 일대의 진지를 지탱하지 못하고 백마고지를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사단에서는 제28연대의 2개 대대로 역습을 감행해 하루 만에 고지를 탈환, 전초전을 아군의 승리로 매듭지었다. 이후 이 일대의 전선은 소강상태가 계속돼 1952년 전반기까지는 특별한 접촉이 없었다. 그동안 국군 제9사단은 제7대 사단장 박병권 준장이 도미 유학차 이임하고, 춘천 전투의 영웅인 김종오 소장이 제8대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연대장들도 모두 교체돼 이 지역의 방어를 위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정면의 중공군도 부대를 교체했는데, 새로 투입된 부대는 6·25전쟁에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마오쩌둥으로부터 만세군(萬歲軍)이라는 영웅 칭호를 얻은 제38군이었다. 이들은 투입되자마자 공세
[ 사진6. 백마고지 전투 ] 백마고지 전투 경과 및 결과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6일 시작됐다. 이날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부터 국군 제9사단은 10월15일까지 3개 사단을 교대로 투입하면서 인해전술을 감행하는 독립고지인 백마고지에 무려 9개 연대가 서로 얼키며 설키는 대접전이 전개되었다. 제9사단은 10일간의 전투에서 395고지를 사이에 두고 12차례나 쟁탈전을 반복했다. 고지의 주인이 바뀐 것도 7차례나 됐지만 끝까지 고지를 장악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 사진7. 백마고지 전투 ] 백마 3군신의 탄생
이 전투에서 제30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제1소대장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 등은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공격 정면에 지형상 포병 및 공군 화력으로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적 특화점에 수류탄 다발을 안고 육탄 돌입하여 파괴함으로써 국군이 백마고지를 탈취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마고지 3군신(軍神)으로 불리고 있는 용사들이다.
[ 사진8. 백마고지 전투 3인의 용사 ]
백마고지와 백마부대의 유래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은 8,234명이 사살되고, 추정살상 6,098명과 포로 57명 등 14,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제9사단도 3,41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또한 작전기간 중 피아간에 중공군이 55,000발, 아군이 219,954발의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총 274,954발이라는 막대한 양의 포격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됐다. 유엔군의 항공기도 754회나 출격해 폭격을 가함으로써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극심한 폭격과 포격으로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고, 사단을 백마(白馬)부대라고 부르게 됐다.
[ 사진9. 백마고지 전투 포탄 ]
글 출처 : http://www.imhc.mil.kr/user/imhc/download/war625/3K16.pdf
준비에 착수함으로써 조만간 새로운 공격이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중공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폭이 2㎞밖에 안되고 길이가3㎞ 남짓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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