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안경을 고쳐 쓰고 있음 ]

 

 

 

 

 

▶ 2005년   차세대 전투기 F-15K 한국 도착

 

▶ 2002년   일본서 인체통신장치 개발

 

▶ 2002년   인터넷주소자원관리 공청회 개최

 

▶ 2002년   강화도에서 돼지콜레라 발생

 

▶ 2001년   케냐 은데레바, 여자 마라톤 세계신기록

 

▶ 2001년   `철인` 칼 립켄 주니어, 메이저리그 은퇴

 

▶ 2001년   미국,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군사지점 공격

 

▶ 1998년   '매슈 사건' 발생, 동성애자 매슈 셰퍼드(21) 나체에 구타당한 채로 발견

 

▶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일본 방문(~10.10)

 

▶ 1998년   탤런트 이낙훈씨 별세

 

▶ 1994년   한국-체코 문화교류협정 체결

 

▶ 1993년   흑인여류작가 토니 모리슨 모벨문학상 수상

 

▶ 1992년   미국-캐나다-멕시코, 북미자유무역협정 가조인

 

▶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한

 

▶ 1982년   서울시교육위원회, 1983년에 외국어고교 신설하기로

 

▶ 1982년   중국, 잠수함발사 미사일(SLBM)실험 성공

 

▶ 1982년   미국-소련 전략무기감축회담(START I) 재개

 

▶ 1981년   한국-일본 대륙붕 공동개발. 7소구 시추 개시

 

▶ 1980년   대학교수 겸직금지조치 해제

 

▶ 1980년   내무부, 인구 2만이상 면을 읍으로 승격

 

▶ 1979년   김형욱 前 중앙정보부장 파리서 실종

 

▶ 1978년   충남 홍성 지진 발생 (가옥 2800여채 균열, 강도 4)

 

▶ 1975년   동독-소련 새 우호조약 조인

 

▶ 1970년   닉슨, 인도차이나휴전 5개항 제시

 

▶ 1970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취임

 

▶ 1969년   진주 남강 다목적댐 준공

 

▶ 1964년   한국-우루과이, 국교 수립

 

▶ 1961년   프랑스원자력위원회, 정부의 지상핵실험 완료를 발표

 

▶ 1961년   일본-소련 국교회복 공동선언

 

▶ 1961년   한국음악협회 발족

 

▶ 1959년   미국 테너 가수 마리오 란자 사망

 

▶ 1958년   파키스탄서 쿠데타

 

▶ 1957년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 비준서 교환

 

▶ 1955년   앤더슨, 흑인 첫 뉴욕 오페라단에

 

▶ 1950년   유엔총회,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설치 결의

 

▶ 1950년   전남일보 창간

 

▶ 1949년   동독,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 1946년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

 

▶ 1940년   독일군, 루마니아 진주

 

▶ 1910년   일제, 조선귀족 75인에 작위 수여

 

▶ 1894년   미국의 의학자 겸 문필가 올리버 웬델 홈스 사망

 

▶ 1886년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서울에 병원 개설

 

▶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성립

 

▶ 1849년   '검은 고양이' 원작자 에드거 앨런 포 사망

 

▶ 1747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대 총장 디킨슨 사망

 

▶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신성동맹 함대, 이슬람 함대 격파

 

 

 

 

 

[ 사진2.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박정희 의장과 김형욱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박정희대통령 시절 최측근으로 무자비한 권력을 휘둘렀고, 권력에 위해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전 중앙정부부장 김형욱 죽음 관련 제기되는 주장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김 전 부장이'실제로 사망을 했는가'에 대한 의문도 풀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을 전제로 '마피아에 의한 살해설'과 '일본 납치 살해설'등 소문도 떠돌았다. 최근에는 '김형욱 암살에 실제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한 중앙정보부 공작원 출신의 증언을 바탕으로 '프랑스 파리 인근 양계장 살해설'이 제기됐고, 이후 비밀해제된 美국무부 비밀분서를 근거로 '사우디 납치 살해설'도 급부상했다.

 

 

 

 

 [ 사진3.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사 8기 동기생인 김형욱과 기념사진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 시사저널 "파리 교외 양계장서 살해"= 지난 4월 주간지 시사저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 교외의 양계장에서 닭 사료 분쇄기에 넣어져 끔찍하게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시사저널은 당시 김 전 부장 암살에 참여했다는 중앙정보부 특수비선공작원 출신 이모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 전 부장이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납치된 뒤 파리 교외 양계장의 분쇄기에 넣어져 닭 모이로 처리됐다"고 보도했다. 잡지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돼 특수 암살훈련을 받은 이씨 등은 1979년 10월 7일 밤 파리의 한 카지노에 딸린 레스토랑 앞에서 술에 취한 김 전 부장을 마취시켜 파리 북서쪽 4km 외곽의 한 양계장으로 데려가 살해했다. 잡지는 "이들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양계장 사료 분쇄기를 택했다"고 보도했다.

◇ 美 국무부 문서"파리 아닌 사우디서 실종"=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주간 동향 보고서 한국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종적을 감췄고, 실종 시점도 1979년 10월 7일이 아니라 10월 9일인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미 국무부가 1980년 2월 29일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이 문서에 따르면, 김 전 부장은 한인 남성 한 명과 79년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에 갔다. 보고서는 이어 "그러나 거기서부터는 행적이 묘연하다"고 적고 있다. 이는 "중정 특수공작원이 파리 외곽 양계장에서 분쇄기로 살해했다" 등의 김씨 프랑스 살해설을 부정하는 것이다.보고서는 "일본 정부가 파리 경찰을 상대로 김씨 실종 사건 정보를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워싱턴 주일대사관이 우리(국무부)에게 전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또 "프랑스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종결했다"고 밝혀, 당시 프랑스 경찰이 김씨의 실종 사건을 상세히 조사했음을 암시했다. 이에 대해 김씨 사건을 조사 중인 오충일 국정원 과거사위원장은 "그런 문서의 존재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 김 전 부장 며느리"한국으로 납치돼 살해"= 미국 뉴저지주 알파인에 살고 있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맏며느리 김경옥(49)씨는 지난 3월 "시아버님이 한국으로 납치돼 피살됐다는 얘기를 남편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도 아버님이 서울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믿고 있다"면서 "숨진 남편은 '이모씨(실종 사건 당시 파리대사관 공사)가 모든 일을 다했다'고 말하곤 했다"고 주장했다.

◇ 기타= 지난 3월 한겨레 신문은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은 당시 중정이 마피아를 통해 청부 살해했다"고 보도했다. 김 전 부장의 회고록을 집필했던 김경재 전 의원은 "김 전 부장이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장에 의해 살해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김형욱 실종 당시 모 언론사 파리주재 특파원을 지낸 박모(71) 씨는 "김형욱은 당시 파리주재 한국대사관 고위 인사들이 외국의 살인청부업자에게 시켜 살해한 뒤 센 강에 시체를 버린 것으로 알고있다"고 증언했다.

◇김형욱은 누구= 1963년부터 6년 3개월간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한때 권력의 2인자로까지 불렸다. 육군사관학교 8기로 5.16 쿠데타의 주역이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나면서 정권으로부터 배척당해 73년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당시 54세.
김씨는 박정희 정권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후 반독재 투사를 자처했다. 박동선 로비사건을 조사중이던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 정권을 성토한 그는 79년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썼다. 김경재 전 의원은 1980년대'박사월'이란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펴내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했다.  부인 신영순(74.미국 거주)씨는 88년 국회에 김씨의 실종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으나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90년 서울가정법원에 실종선고 신청을 냈다. 이어 81년 미 법원은 가족의 소송에 따라 그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렸다.

 

 

 

 

 [ 사진4. 5.16혁명 성공 후 중앙청에 나타난 박정희, 박종규, 김형욱, 차지철 (좌측부터) ]

 

 

 

 

진실위가 밝힌 김형욱 납치·살해 재구성

[김형욱 실종사건 주요 일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6일 오전 11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과 관련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다음은 진실위가 밝힌 중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한 주요 사건일지.

▲1973.4 = 김형욱 미국 망명
▲1977.6 = 김형욱 NYT 기자회견(2일)ㆍ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22일)서 박정희 대통령 비난
=박 정권, 민병권 무임소장관 미에 파견, 김형욱 설득.회유
=박 정권,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 3차례 개최
▲1977.12 =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1978.12 = 박 대통령, 윤일균 전 중정해외담당 차장에게 김형욱 회고록 관련 협상 추진 전화 지시
▲1979.4 = 일본 군소 출판사, 김형욱 회고록 출간
▲1979.9 = 이상열 주프랑스 중정 거점장, 김재규 중정부장 지시로 신현진(가명) 및 이만수(가명)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에게 김형욱 살해 임무부여(신씨 진술)
▲1979.10 = 신현진, 이상열 공사 접촉, 살해 위해 미화 10만달러.권총 준비요청
▲1979.10.1 = 김형욱 단신으로 프랑스 도착
▲1979.10.7 = 이상열 공사, 돈을 빌려달라는 김형욱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 이 공사와 신현진의 지시로 3국인 2명, 파리 샹젤리제 거리 '리도극장'앞에서 김형욱을 차량에 태운 후 뒤에서 가격, 파리 근교에서 소음기가 달린 소련제 권총으로 살해후 사체를 유기하고 그 위에 낙엽더미로 덮음
▲1979.10.13 = 신현진,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형욱 처리 결과 보고 (신현진 진술)
▲1979.10.18 = 이상렬, 은밀 귀국,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 10.19일 파리 귀환

1979년 9월 어느 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프랑스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駐)프랑스 중정 거점장이던 이상열 공사에게 김 전 부장 살해를 은밀히 지시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최고책임자로부터 직접 중대임무를 부여받은 이 공사는 9월말 파리에 머물고 있던 5∼6명의 중정 연수생들을 자택으로 불러 살해 가담자 물색에 들어갔다.
이 공사는 여기서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야"라고 이들을 질책하며 정의감을 부추기는 한편, 북한 관련 보고서를 제출토록 해 누가 적임자인 지 판단했다. 신현진(가명)과 이만수(가명)라는 두 젊은이가 그의 눈에 들었다. 10월 1일. 이 공사는 비밀리에 귀국해 김 중정부장을 만나 김형욱 납치.살해에 대한 구체적인 공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 공사는 김형욱을 살해할 도구로 쓰기 위해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김 중정부장으로부터 넘겨받았다.
다시 파리로 건너 온 이 공사는 자신이 점찍은 신현진, 이만수를 시내 모 카페로 조용히 불러내 "김형욱이 곧 파리로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있고,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그냥 놔둬서는 안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넌지시 운을 떼었다. 중정 직원들은 김 전 부장을 국가를 배신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터라 이 공사의 말은 이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며칠 뒤 이 공사는 더욱 미더웠던 신현진을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푸케 카페로 몰래 호출했다.

"자네에게 부여할 임무가 있네. 일단 임무를 전달받고 나면 자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네.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 김재규 부장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 해 줬으면 좋겠군".
"목표가 김형욱이죠?". 임무를 직감한 신현진은 "어려움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전 부장 살해를 위해 추가적인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신현진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살해 음모에 가담할 것을 약속받았다. 신현진은 같이 임무를 수행할 이만수를 이들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친분을 쌓도록 하는 한편, 파리 시내의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는 등 김형욱을 납치.살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갔다.

 

 

 

 

[ 사진5.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 당일 상황 재구성과 실종사건 관련 발언 ]

 

 

 

드디어 살해 당일인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어.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소개 시켜 주기로 하고 만나기로 했다네".

이 공사로부터 다급한 전화 받은 신현진은 이 공사에게로 달려갔다.

"두 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을 오라고 했어.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일꾼들을 어서 부르게".

 

신현진은 즉각 이만수와 3국인 친구 2명을 샹젤리제 거리로 불렀다. 이들 5명은 이 공사가 몰고나온 관용차인 '푸조 604' 안에서 살해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이만수는 미화 1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들고 개선문 근처 호텔방으로, 나머지 4명은 김형욱을 만나러 리도 극장 인근으로 차를 몰았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형욱은 카지노에서

며칠 밤을 샌 듯 초췌한 모습이었고 술 까지 마신 듯 취기까지 감돌았다. 이 공사는 제3국인 2명을 돈을 빌려줄 사람이라고 속이고 김 전 부장을 자신이 앉아있던 조수석에 태운 뒤 자리를 떴다. 그들을 태운 차가 전조등을 밝힌 채 어둑어둑해진 파리시내를 뚫고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가던 찰나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3국인 중 한 명의 주먹이 김 전 부장의 머리를 강하게 가격했고, 김 전 부장은 이내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용차는 유유이 파리 시내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작은 숲속에 도착했다. 신현진은 차에서 대기하고 3국인 친구 2명이 실신한 김 전 부장을 끌고 50m 가량 떨어진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김 전 부장을 내려놓은 뒤 주저없이 방아쇠를 7번 당겼고, 그 것으로 끝이었다.  이들은 급한 마음에 주검을 낙엽으로만 감춘 뒤 김 전 부장의 바바리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를 싸서 벨트로 묶어 차에서 대기 중이던 신현진에게 건넸다.

"잘했어". 신현진은 이들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곧장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 호텔로 이동해 10만달러가 든 가방을 3국인 친구들에게 전하며 "내일 중으로 프랑스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공사는 신현진에게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렸고, 수거해왔던 여권과 지갑을 건네주며 "철저히 인멸한 즉시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신현진은 돌아오는 길에 김 전 부장의 시계는 세느강에 던졌고, 바바리코트와 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자신이 살던 하숙집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흘후인 10월 10일. 귀국한 신현진이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한테 들으십시오'라는 이 공사의 보고문을 김재규 부장에게 보여주자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야?".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했다고 하자 김 중정부장은 "괜찮아. 소련제니까 발견돼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받게 될 거니 문제없어"라며 오히려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씩이 든 봉투 두 개씩을 두 손에 쥐어주었다.

"근무하고 싶은 데가 어딘가. 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게 어떤가. 내 직속기관이야". 신현진을 신뢰하는 듯한 말을 건네며 김 중정부장은 즉시 비서실장을 불러 "신군을 정책연구실로 발령내라"고 지시했다.

"집은 어디야. 앞으로 장가도 가려면 집이 있어야 겠구만. 한 40∼50평이면 되겠나. 알아보고 전화하게".

 

 

 

 

[ 사진6.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가계도 ]

 

 



김형욱 맏며느리 "진실위 조사 못믿어"
"아버님 피살전 스위스서 전화한 적 있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맏며느리 제니퍼 경옥 김(49)씨는 26일(현지시간) 김 전 부장이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살해됐다는 국정원 진실위의 중간조사 결과 발표와 관련, "남편에게 듣던 얘기와 달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남편으로 부터 아버님(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돼 피살됐거나 사우디로 끌려 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파리에서 살해됐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특히 '김형욱씨가 1979년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취리히를 경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는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내용을 지적하면서 "10월 7일 살해됐다는 진실위 발표는 날짜부터 맞지 않아 혼동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아버님이 당시 뉴저지를 떠나 파리에 머물며 도박을 하다 돈을 모두 잃고 스위스로 건너간 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매우 화난 상태에서 집으로 전화를 한 적이 있다"면서 "아버님은 분명히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스위스도 방문했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어 "진실위쪽으로부터 아버님 사건과 관련한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았으며, 전화 한통 받은 바 없다"면서 "조사가 정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김형욱씨가 실종된 지 1년 뒤인 1980년 그의 큰아들 정한씨와 결혼했으며, 정한씨는 지난 2002년 지병으로 숨졌다.

 

 

 

 

[ 사진7. 왼쪽-김형욱 전 중정보부장의 묘비 , 오른쪽-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생전 모습 ]

 

 

 

월간중앙

 

글 출처 : http://jtbcgolf.joins.com/news/news_view.asp?ns1=15368&page=&news_type=24&mode=&txt_search=&a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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