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5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1971년 10월15일, 고려대학교에 진주한 수도경비사령부 장갑차 ]
▶ 2010년 타잔의 아들 '보이' 조니 셰필드 별세
▶ 2009년 일본 이야마 유타, 최연소 바둑 명인 등극
▶ 2002년 IBMㆍ히타치ㆍ선 등, 스토리지 기술 ‘블루핀’ 표준 자원 결의
▶ 2001년 KTF-LGT 품질향상 합의서 체결
▶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방한
▶ 2000년 김주진 아남반도체 회장, 한국인으로 첫 미 100대 부호에 선정
▶ 1994년 아리스티드 대통령, 망명지 미국에서 아이티로 귀국
▶ 1993년 청와대, 일제때의 총독관저건물인 舊본관의 철거 시작
▶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미국 방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20일)
▶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 개막. 65개국 4,361명 참가
▶ 1985년 서울시, 서울시내 택시요금체계를 거리· 시간병산제로 전환
▶ 1982년 농수산부, 초지개발 10개년 계획 발표
▶ 1981년 정부조직축소개편, 531개 직위 감축
▶ 1979년 도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출간
▶ 1976년 덴마크, 북한공관원 전원을 마약 등 밀수혐의로 추방
▶ 1973년 소양강땜 준공
▶ 1971년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 1969년 태백선(정선~나전) 개통
▶ 1966년 효봉 스님 입적
▶ 1964년 소련 수상 겸 제1서기 흐루시초프 해임. 새 수상에 코시긴, 제1서기 브레즈네프 임명
▶ 1962년 케네디, 알제리아 벨라 수상과 회담
▶ 1960년 독립운동가 문익상 사망
▶ 1950년 대동강 철교 폭파
▶ 1949년 육군포병학교 창설
▶ 1949년 한일통상협정 조인
▶ 1946년 좌익우파, 사회노동당으로 통합
▶ 1944년 `사막의 여우` 롬멜 장군, 히틀러 암살미수사건과 관련 자살
▶ 1940년 인도 간디, 불복종운동 개시
▶ 1934년 중국공산당 대장정 시작
▶ 1926년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출생
▶ 1925년 서울역사 운수영업 개시
▶ 1925년 조선일보의 정간해제와 집단해고 사건
▶ 1925년 서울운동장 개장
▶ 1917년 마타 하리 총살
▶ 1910년 인천에 상수도 개설
▶ 1907년 대한국민체육회 설립
▶ 1905년 일진회, 한일보호조약 촉구 성명
▶ 1897년 소련 작가 일리야 일프 출생
▶ 1844년 독일 철학자 니체 출생
▶ 1582년 그레고리력 사용 시작
▶ 1581년 기록상 최초의 발레 공연
▶ 1407년 경상도 개령, 지진 발생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서울 일원에 위수령, 10개 대학에 군대진주 한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때는 1971년 10월 15일 오전 10시 50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은‘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발표합니다. 이른바 ‘10ㆍ15 조치’로 불린 위수령 발동이었습니다.
김 대변인은 “북괴의 군사적 움직임과 대남공작의 새로운 양상에 비추어 시기적으로
이번 시험기를 이용한 일부 불순학생의 ‘데모’ 선동이 국가안위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
대통령특별명령이 내려지게 된 것”이라고 위수령 발동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죠.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은 계엄령 제 12조에 의한 병력지원을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수도방위사령부의 전신)에 요청합니다. 오전 11시 50분 고려대에는 수경사 병력
200명이 2대의 장갑차, 16대의 트럭을 타고 들이닥칩니다.
군인들은 캠퍼스 안에서 여학생과 ROTC 후보생을 제외한 학생 전원을 연행하죠. 이
런 광경은 서울대와 연세대, 성균관대 등 서울 시내 7개 대학(광주에서는 전남대)에서
똑같이 벌어집니다. 대학을 접수한 군은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주둔할 것’을 학교
당국에 통보하고 외부인과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차단합니다.
이날 오후 유재흥 국방부 장관은 “군은 박 대통령의 특별명령 9개항목이 달성 되는대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합니다. 유 장관이 언급한 ‘특별명령 9개항목’은
“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동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되고
있었죠. 군 당국은 이날 하루 동안 서울에서 학생 1,889명을 연행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영구집권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대학의 병영화를
시도했고, 그 첫 번째 조치가 대학생 교련과목의 신설이었습니다. 1969년 10월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는 이른바 ‘3선 개헌’을 통과 시킨 박정희 정부는 이듬해인 1970년 2월
23일, 국무회의를 열어 대학 교련 개정안을 확정, 새 학기부터 당장 시행토록 했죠. 그 내용은
종래의 예비역 교관을 현역으로 바꾸고, 매주 2시간씩 3학년까지 실시해오던 훈련을 매주
3시간씩 4년간 총 711시간을 이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조치는 학생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학생들의 저항은 1970년을 거쳐 이듬해인
1971년까지도 이어졌죠. 더군다나 그해 4월 27일에는 제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가까스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1학기 개강과 함께 교련 철폐 시위로
들끓던 대학가는 부정선거 논란까지 가세하자 걷잡을 수 없는 저항의 불길이 되어 타오르게
됩니다. 서울대와 고대, 성균관대 학생들은 ‘민주수호 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4ㆍ27 선거를 불법ㆍ부정ㆍ관권 선거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대정부 투쟁을 선언합니다.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은 군사교육거부로 상징화 했죠. 문교부는 5월 27일 서울대에
휴업령을 내렸고, 6월1일 서울대는 처음으로 시위 학생에 대해 자체 징계조치(제명 3,
자퇴권유2, 무기정학 17명)를 내립니다. 군부대를 일정 지역에 주둔케 하여 그 곳의 경비와
질서장악, 시설물 보호를 책임지도록 하는 위수령은 1970년 4월 대통령령 제 4949호로
정식 제정되었고, 박정희 정부가 내린 ‘10ㆍ15 조치’는 이에 따른 최초의 위수령이었습니다.
17일 각 대학은 시위 주동학생 174명을 제적했다고 문교부에 보고합니다.
당국은 제적된 학생들이 재입학하거나 편입학을 못하도록 학칙을 고칠 것을 대학에 지시하죠.
또 국방부는문교부로부터 제적학생 명단을 넘겨받아 1차로 47명에게 입영 영장을 발부합니다.
경찰도 시위 주동자와 제적 학생에 대해 특별 검거령을 내리죠. 이렇게 연행된 학생들은 바로
수도통합병원으로 끌려가 간단한 신검절차를 거쳐 논산행 입영열차를 타야했습니다.
시위 주동학생 제적, 학칙 개정, 영장 발부 등을 완료한 당국은 23일 오전 각 대학에 주둔한
병력에 철수 명령을 내리고 11월 9일에는 위수령을 해제하죠. 그리고 1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초헌법적 조치인 ‘10월 유신’을 단행, 영구집권을 위한 독제체제를 구축합니다.
글 출처 : http://blog.ohmynews.com/gompd/16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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