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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9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왼쪽-이순신 장군 영정 , 오른쪽-이순신 장군 동상 ]

 

 

 

 

▶ 2009년   첫 EU 대통령 선출

 

▶ 2009년   패션모델 김다울 프랑스 자택에서 사망

 

▶ 2008년   행남자기 김준형 창업주 별세

 

▶ 2004년   광주, 수능 '휴대전화 부정' 사건

 

▶ 2002년   7만7000여t 중유 실은 유조선 스페인해안 침몰. 해양오염 심각

 

▶ 1999년   중국, 러-미에 이어 세 번쩨로 무인우주선 발사

 

▶ 1995년   크바스니에프스키 폴란드 대통령에 당선

 

▶ 1987년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사망

 

▶ 1984년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회담 예비접촉 열려

 

▶ 1984년   멕시코시티 가스공장서 대규모 폭발사고 544명 사망. 주민35만명 대피

 

▶ 1982년   미국, 퍼싱II 미사일 발사 성공

 

▶ 1981년   여-야, 야간통금해제를 정부에 건의

 

▶ 1980년   KAL기 김포공항서 착륙중 화재 15명 사망, 15명 부상

 

▶ 1979년   계엄 당국의 휴교 조처 해제로 대학교 전면 개교

 

▶ 1979년   이란, 미국 인질중 여자등 13명 석방

 

▶ 1978년   북경에 모택동비판 대자보 등장

 

▶ 1977년   인도에 해일 발생. 2만여명 실종

 

▶ 1977년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이스라엘 방문

 

▶ 1975년   유엔총회, 한국문제의 서방-공산측 두 결의안 동시채택

 

▶ 1975년   한-이란 각료공동회의. 한국의 대(對)이란 기술자 파견, 건설참여 등 10개항 조인

 

▶ 1968년   한국-스와질란드 국교 수립

 

▶ 1965년   바티칸 공의회, 신앙의 자유 선언안을 승인

 

▶ 1963년   몬트리올서 캐나다여객기 추락 117명 사망

 

▶ 1961년   네루-나세르-티토, 나세르에서 중립국 수뇌회의

 

▶ 1960년   북한, 남북연방제 제안

 

▶ 1957년   유엔총회, 군축위 확대안을 채택(25개국 구성)

 

▶ 1946년   대일(對日) 우편물 정식인가

 

▶ 1946년   유네스코, 파리에서 제1차 총회

 

▶ 1942년   소련군, 스탈린그라드서 독일군에 대반격 개시

 

▶ 1942년   대종교 주요간부 21명 구속

 

▶ 1924년   신사상연구회 화요회로 개칭

 

▶ 1917년   인도수상 인디라 간디 출생

 

▶ 1863년   링컨, 게티즈버그 연설(Gettysburg Address)

 

▶ 1828년   슈베르트 사망

 

▶ 1600년   영국 왕 찰스1세 출생

 

▶ 1598년   이순신 장군 노량해전에서 전사

 

 

 

 [ 사진2. 노량해전 ]

 

 

 

노량해전

 

          조선 선조 31년(1598년)에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이 왜병과 대결한 마지막 해전,

         이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명나라 장군 진린과 더불어 싸웠으며, 승리와 함께 전사함.

 

7년간 조선을 황폐화시킨 임진왜란(1592년~1598)에 정점을 찍은 결정적인 해전.

오늘날 경상남도 남해군 노량리와 하동군 노량리 사이의 좁은 물길이 거센 해협의 주도권을

놓고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전선 83척과 명나라 전선 63척이 일본의 500여 전선과 격

렬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던 왜군은 명나라의 참전과 조선군의 활약으로 패

을 거듭하며 기세가 꺾인 상황이였다. 결정적으로 일본 통일 이후 15만 대군을 이끌고 한반

도를 침략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는 사이 왜군 수뇌부 사이에 전파되면서 조선

정벌론은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왜군은 퇴각을 모색했다.

 

 

 

 [ 사진3. 노량해전 ]

 

 

 

이때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은 명나라군과 함께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의 퇴로를 막기로 결

정했다. 양민들을 무참히 학살, 약탈한 왜군이 또 언제 조선 땅을 노릴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한명도 살려보낼 수는 없었다. 조선군은 순천왜성에 주둔해 있던 왜란의 선봉장 중 하나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와 순천 왜교에서 전투를 벌여 큰전과를 올렸고, 궁지에 몰린 고니시는

사천과 고성에 주둔 중이던 왜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12월15일, 일본 수군 6만여명과 500여척

함선이 남은 군을 모아 퇴각하기 위해 노량으로 집결했다.

 

 

 

 [ 사진4. 노량해전 ]

 

 

 

이튿날 새벽 4시, 이들의 진입을 예견해 이순신이 미리 매복을 시켜놓은 조선의 함선들이 일본

함선을 향해 맹렬하게 포를 쏘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일본 함선 50여척이 격파됐고

200여명의 애군이 사망했다. 오전 8시, 아침 해가 노량 앞바다를 비췄을 때 일본군 전함은 이미

200척 이상이 완전히 파괴되고 150여척이 파손 된 상태였다. 일본 수군은 150여척의 남은 배

이끌고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 사진5. 이순신 장군 장검 ]

 

 

 

조선과 명의 수군은 이들을 추격했으나,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살아남아 일본에 귀환한 배는 겨우 50여척으로 알려졌다. 사망한 이들은 대부분

일반 병사들이었고, 왜군 지휘부는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전쟁 후 일본의 권력지형은

크게 바뀌었다. 임진왜란에 불참하며 도요토미를 견제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어

첫 쇼군(將軍)이 됐다. 전란 이후 조산과 관계개선을 꾀한 그는 화려하게 치장하됐던 도요토미의

분묘를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폭파함으로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에게 사루 책임을 물었다.

 

 

 

 [ 사진6. 이순신 장군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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