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계획 ]

 

 

 

 

▶ 2008년   '한국 중문학 태두(泰斗)' 차주환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 2002년   로또복권 발매 시작

 

▶ 2002년   장병희 영풍 명예회장 사망

 

▶ 2002년   기아차 국내업체로는 처음으로 중국형 신차 현지 합작생산

 

▶ 2001년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인 엔론사. 뉴욕법원에 파산 신청

 

▶ 199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의 기·예능보유자 하보경 사망

 

▶ 1999년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출범, 영국의 25년 통치 마감

 

▶ 1997년   9개 종금사 영업정지

 

▶ 1990년   마샬군도, 유엔안보리 신탁통치로부터 독립

 

▶ 1990년   일본인 최초 우주비행사, 소련 우주선 '소유즈 11호' 승선

 

▶ 1989년   부시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 몰타회담 

 

▶ 1988년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첫 여성 총리 취임

 

▶ 1983년   특정 재래식무기 금지 협약(CCW) 발효

 

▶ 1983년   미국 우주선 콜롬비아호 과학자들 우주서 아연과 알루미늄 합금 성공

 

▶ 1983년   소련 폭격기 9대 독도근해 출현

 

▶ 1982년   스페인 사회당수 수상에 취임  

 

▶ 1980년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 자살

 

▶ 1980년   대청다목적댐 준공

 

▶ 1977년   아랍강경국 수뇌. 반(反)사다트 회의

 

▶ 1975년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수립, 왕제 폐지

 

▶ 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로 53명 사망

 

▶ 1971년   아랍에미레이트연합,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68년   신탁은행 개점

 

▶ 1965년   베트 레이더 유도 미사일을 개발한 미국의 물리학자 드라이든 사망

 

▶ 1962년   인도 파키스탄에 불가침조약 제안

 

▶ 1961년   서기연호 사용 법령공포

 

▶ 1961년   제3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 개막(프랑스 파리)

 

▶ 1961년   국토건설단설치법 공포

 

▶ 1961년   재향군인회 결성

 

▶ 1961년   세제를 전면 개편(호별세, 교육세 폐지. 재산세 신설)

 

▶ 1961년   MBC 개국

 

▶ 1956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82명, `그란마호`를 타고 멕시코를 출발해 쿠바섬 상륙. 쿠바혁명 시작

 

▶ 1954년   석공광부 7천여명 파업

 

▶ 1954년   미국, 대만 상호방위조약 조인

 

▶ 1952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당선자 내한

 

▶ 1951년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개시   

 

▶ 1947년   장덕수 전 동아일보 부사장 피살

 

▶ 1946년   이승만 도미.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

 

▶ 1945년   알바니아 총선(민주전선 압승)

 

▶ 1944년   이탈리아계 프랑스 작가 필리포 마리네티 사망

 

▶ 1942년   시카고대 페르미, 우라늄 핵분열 연쇄반응실험 성공

 

▶ 1923년   오페라 소프라노 가수 칼라스 출생

 

▶ 1918년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 사망

 

▶ 1915년   원세개 황제를 잠칭

 

▶ 1911년   혁명군 남경 점령

 

▶ 1902년   한국 최초의 극장 협률사, 일반인을 상대로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 공연

 

▶ 1901년   질레트, 일회용 안전면도기 발명

 

▶ 1899년   미국-영국 사모아군도 분할협정 체결

 

▶ 1897년   러시아 금본위제 채택

 

▶ 1885년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 출생

 

▶ 1823년   먼로 미국 대통령, 고립주의 외교노선 천명 

 

▶ 1814년   `새디즘`이란 용어를 낳은 프랑스의 작가 사드 사망

 

▶ 1804년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

 

▶ 1547년   스페인 군인 에르난 코르테스 사망

 

 

 

 

[ 사진2.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

 

 

 

지리산 공비토벌작전계획

1951년 말 국군의 후방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공비들은 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이후

퇴로가 차단당한 북한 인민군 패잔병과 호남·영남지역의 지방공비들이었다. 이들은 점

차 전투력을 재정비한 후 병참선을 차단하거나 전투근무지원 시설 등을 위협했다.
육군본부는 호남지역에서 준동하고 있던 이들 공비의 수를 총 4,000명 정도로 판단하고,

후방의 암적 존재인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하여 지리산 일대의 공비를 완전 섬멸하도록 했다. 지리산 공비

는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구성되었다. 공비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와 같은 만행을 자행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전역에까지 파급되었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국민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육군본부는 후방지역 군사시설 보호와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호남지역에

서 준동하는 공비를 섬멸하기 위해 2개 사단 규모의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 사진3.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계획 ]

 

 


지리산 공비토벌부터, 백야사 창설

 

1951년 11월 25일 백야전전투사령부(이하 백야사)를 설치하게 됐으며, 사령관에는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 참모장에 김점곤 대령, 작전참모에 공국진 대령, 정보참모에

유양수 대령, 군수참모에 장우주 중령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 준장),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 그리고 서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김용배 준장) 및 경찰

부대가 배속되었다. 백야사는 전주로 이동하여 11월 26일부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로부터

서남지구 공비토벌 임무를 인수함과 동시에 서남지구전투사령부와배속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육본은 백야사의 설치에 따라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속초와 춘천에서 호남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양개 사단의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에 배속된 경비부대

와 예비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백야사는

육본의 작전계획에 따라 양개사단의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된

경비부대와 예비연대 그리고 경찰부대를 저지부대와 거점수비대로 운용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정부는 12월 1일 서남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서 공비토벌작전을 위한 1단계 조치

를 취했다. 또한 이 지역의 민간인 이동을 통제하고 마을간의 전화 교신도 차단했다.

 

 

 

[ 사진4.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투입 된 세스나 경비행기 L19 ]

 

 


백야사의 쥐잡기 작전

백야사는 1951년12월2일부터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면 개시했다. 이 작전은 4단계로

구분하여 실시됐으며, 각 단계별 작전은 엄격한 통제하에 기동타격부대와 저지부대 그리고

거점수비대로 운용했다. 기동타격부대는 공비의 주력을 포착섬멸하고, 저지부대는 충분한

종심을 두고 배치하여 공비의 퇴로를 차단 저지하면서 기동타격부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작전명 쥐잡기(Rat Killer) 작전은 제1기작전(1951.12.2~12.14), 제2기작전(1951.12.16~

1952.1.4), 제3기작전(1952.1.4~1.31), 제4기작전(1952.2.4~3.14)으로 구분하여 실시했

다. 제1기 작전기간 중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종합전과는 공비 사살 1,715명, 생포 1, 710명,

귀순 132명, 소총 509정, 자동화기 86정, 수류탄 676발, 백미 769석, 벼 416가마에 달했으

며, 잔여공비들은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형과 은거지를 버리고 토벌부대를 피해 분산 잠적

했다. 제2기작전은 전주를 주목표로 하여 그 주변의 산악으로 공격방향을 변경했다. 12월19일

부터 1월 4일에 이르기까지 국군8사단과 수도사단은 고지를 오르내리며 험한 지형 속에 숨어

있는 게릴라를 함정에 넣도록 행동했다. 백야사는 작전이 개시된 이후부터 12월말까지 공비

약 4천명 이상을 사살하고 약 4천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달성했다. 제3기작전은 호남지구

공비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재잠입하게 되자, 지리산·백운산·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

하여 공비잔당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백야사는 제3기작전에서 공비들의 핵심지도자로

활동하던 자들을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획했다. 제4기작전(52.2.4-3.14)은 제8사단이 1952년

2월 5일 전선으로 복귀하고, 백야사도 2월 6일부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됨에 따라 작전을 수도

사단이 전담하게 되었다. 수도사단은 백아산·모후산·조계산 지구에 대한 소탕작전과 반복수색

을 전개했다. 이 작전이 종료되자 수도사단은 3월 1 4일부로 임무를 서남지구전투사령관에게

인계하고 전선으로 복귀함으로써 백야사가 계획했던 임무는 모두 완료되었다.
제1기부터 제4기까지의 작전기간 중 백야사의 전과는 사살·포로·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했다. 육군은 1951년 11월 25일 백야사를 전주에 설치

한 이래 12월 초순부터 그 이듬해 3월 14일까지 호남지역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한 결과 남부군

을 비롯한 공비 주력을 격멸했다. 백야사는 육본계획에 따라 수도사단에 작전임무를 인계하고

춘천으로 이동한 후, 화천에서 제2군단으로 발족하여 수도·제3·제6사단을 예하에 두고 금성방면

의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글 출처 - 6·25전쟁60주년사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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