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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3일>

 

 

 

[ 사진1. 태조 왕건 ]

 

 

 

▶ 2009년   폴크스바겐, 포르쉐 인수

 

▶ 2005년   동해 총기탈취사건 검문하던 임종민 병장 무면허차량에 치어 사망

 

▶ 2002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시티 공습. 15명 사망·150명 부상

 

▶ 2001년   대한변호사협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법치주의에서 후퇴했다"는 결의문 채택

 

▶ 2001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직 정지

 

▶ 2001년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에 취임

 

▶ 1999년   주가 사상최대 71.70포인트 폭락

 

▶ 1995년   유조선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 19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에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

 

▶ 1985년   미국-중국간 핵협력협정 승인

 

▶ 1984년   관보 제1호 발행

 

▶ 1983년   바이타브락 제2봉 세계최초 등반 성공

 

▶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 1982년   일본정부, 방위력증강 5개년계획(83-87) 확정

 

▶ 1978년   서울 시내버스 한강대교서 추락 33명 사망, 13명 부상

 

▶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7년 만에 민정복귀

 

▶ 1972년   미국, 최초의 실험용 지구자원탐사위성 랜드새트 1호 발사

 

▶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 1967년   터키에 연 2일 대지진 사상자 수천명 발생

 

▶ 1962년   미국 텔스타통신 위성통해 첫 TV 우주중계

 

▶ 1961년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 1956년   바둑인 조치훈 출생

 

▶ 1952년   이집트서 쿠데타 발생, 나기브준장 실권장악

 

▶ 1951년   페탱 옥중 사망

 

▶ 1951년   기록영화의 선구자 로버트 플라어티 사망

 

▶ 1938년   총독부, 교원-관공리에게 제복 착용 지시

 

▶ 1936년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 1931년   소파 방정환 별세

 

▶ 1930년   이탈리아, 나폴리서 대지진. 2534명 사망, 4264명 부상(6000여 사상)

 

▶ 1926년   항일투사 박열의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옥중 자살(의문사)

 

▶ 1925년   일제, 한국서의 좌익운동자 대량 검거

 

▶ 1916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 1907년   도쿄 유학생팀과 기독교청년회원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공식경기 훈련원에서 열려

 

▶ 1906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제3회 범미(汎美)회의 열림

 

▶ 1904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사망

 

▶ 1903년   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 1894년   대원군, 입각해서 국정참여

 

▶ 1885년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북군 총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장군,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사망

 

▶ 1856년   인도의 사회운동가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  918년   왕건, 고려 건국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도 역사드리마에서 만났었던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읽고, 쓰다 보니 예전에 역사드라마 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최수종의 "태조왕건ㅎㅎㅎ"~~^^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년~943년, 재위 918년~943년)

 

왕건(王建)은 개성일대의 호족세력 출신으로 신라 말엽 후백제와 후고구려 등의 후삼국이

일어났을 때 철원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태봉의 궁예 예하에 들어가서 공을 세워서

자리를 굳히고 시중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궁예가 민심을 잃으면서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지원하다 대구의 팔공산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창(지금의 안동지역)전투에서 반격을 가하여

승리함에 따라서 대세를 잡았고, 935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자진해 935년 항복하고 견훤의

부자간 내분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자력으로 달성한 민족통일이였습니다.

이어서 거란에 의하여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명신상부한 민족통일을

달성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호족세력을 연합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척과의 통혼정책을 취하여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근친혼을 선호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호족세력의 비대화와 외척세력의 대두, 근친혼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왕위세습과정에서 호족세력과 자식들간의 왕위를 차지하기 투쟁을

야기 할 수밖에 없어 왕권의 위협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혼란은 5대 광종을

거쳐서 성종대에 가서야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사진2. 태조 왕건 ]

 

 

- 왕건의 출생 -

왕건(王建)은 신라말엽이던 877년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인 융()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탄생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서해의 용왕의 딸과 혼인하여 왕건을

낳았다고 하며 이런 이유로 왕씨일족의 겨드랑이에는 대대로 용의 비늘의 돋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나중에 유학이 들어오며 윤색이 가해져 당나라 황제(숙종)가 왕자 시절에 한반도를

유람하던 중에 아들을 얻은 것이 바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라는 전설도 왕건의

신성화를 위해 덧붙여진 것일 겁니다. 왕건의 탄생과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풍수도참설에

관한 전설이 전하여 옵니다.

 

융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송악산의 남쪽기슭에 집을 짓고 살고 있을 때 마침 당대에

도참설의 최고권위자이던 도선(道詵)국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하여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융의 부인이 남편에게 달려가서 이 말을 전하여 융은 급히 도선을 찾아

달려가 다시 듣기를 청하니,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 사진3. 도선국사 영정 ]

 

그리고 이어서 융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고는 한 번 절하고 그가 시킨대로 집을 짓고

살자 10달 후에 낳은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었으니 8771월 이였습니다.

그리고 민지가 지은 <<편년통록>>에 의하면 도선은 왕건이 17세 때에 다시 송악산을 찾아와

당신은 혼란할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당신이

구제하여 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알리고,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병법과

유리한 지형을 선정하고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과 산천형세를 보고 이치를 아는 법 등

각종 술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마는 넓고 툭 튀어

나왔으며, 턱의 살이 쪘다, 목소리가 우렁찼다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 후삼국 시대 - 

후삼국 시대(892~936)892년 견훤이 전라도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44년동안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10세기 초에 이르면서 농민불만의 폭발로 신라는 완전히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어서

궁예가 세운 태봉과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신라는 경주의 주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형세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후삼국시대라고 부릅니다.

 

호족을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은 각자 커다란 토지, 사병을 거느리고 백성과 토지를

지배하고 조세와 부역을 징발해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 중앙에 도전하여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농민들은 신변의 안전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인 국가에 숭종하기 보다는 반란군이나 초적, 군도 등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방을 지키던 군진(軍鎭)세력도 무장을 갖춘 상태이다 보니 관병이 아닌

사병으로 해상세력으로 변질되어서 지방세력의 군사적인 배경이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써는 기훤, 양길, 견훤, 궁예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벌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이씨라고 알려져 있으나,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비가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 진흥왕의 증손자인 각각

작진이 왕교파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이고 이 사람이 아자개입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경북 상주 가은현의 농민이었으나 후에 장군이 되었는데 견훤은

그의 장자입니다. 견훤은 체구가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한 그는 혼란한 정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무장이 되고 서남해의 변방에서 비장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나갑니다.

 

궁예는 애꾸눈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월래 신라의 왕족 출신입니다.

그는 제47대 헌안왕이나 제48대 문경왕과 궁녀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55일 단오날 태어났는데

당시에 지붕에 긴 무지개 같은 흰빛이 하늘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이에 일관이 중오일에 태어난 것이 이상하고 이상한 빛이 하늘에 서려 있으니

장래 국가에 화근이 될 아이입니다.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하여 왕은 자객을

보내 죽이게 하였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자객은 포대기에 쌓여진 아이를 빼앗아 마루아래로

던져 버립니다. 이때 아이를 기르던 유모가 몰래 숨어 있다 받아 궁예는 간신히 사는데

받으면서 잘못해 실수로 눈을 찔려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모는 궁예를 안고 신분을 감추고 몰래 숨어서 사는데 궁예가 장난이 심하자 하루는

궁예를 부른 뒤 정색을 하고는 궁예의 전력을 그 내력을 이야기 하자. 이에 궁예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영월에 있는 세달사에 들어가서 중이 되어 살았습니다.

 

궁예는 승려생활을 하며 자신의 꿈을 펴려고 궁리를 하던 어느날 절에 제사가 있어

바리떼를 들고 법당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어 입에

물고 가던 것을 바리떼 속에 떨어 뜨리고 날아갑니다. 주워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점을 치는 물건이였습니다.

 

이상하여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임금 왕()자가 씌어져 있어 이를 본 궁예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구나하며 불경대신 무예닦기에 열중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는데 정부인 위흥 각간과 놀아 나고 정사를 맡기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반란세력이 준동하자 자신의 꿈을 세우기 위해 891년 죽주(지금의 안성)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기훤을 찾아가서 의탁을 하나 기훤이 거만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고 홀대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기훤의 부하들과 함께 양길에게 투항을

하니 양길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후대를 하여 자신의 군사를 궁예에게 내주어

승려생활을 하여 지리적인 지세를 잘 아는 복원동쪽의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습니다.

 

궁예는 승려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치약산 석남사에 진을 치고 주천.내성 등 10여성을

차지하고 894년 명주(지금의 강릉)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고 군사의 수가 35백명 정도

되자 양길로부터 손을 끊고 철원을 거점으로정하고 다음해 관직을 정하여

국가체계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즈음 개성뿐만 아니라 예성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호족인

왕건부자가 896년에 궁예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로 삼고 맏아들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는 그곳 성주로 삼습니다.

 

이들이 궁에 밑으로 들어가면서 궁에는 송악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였고,

898년에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양길과 싸워 물리치면서

충청, 경기, 황해, 강원 등을 아우르는 신라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901년 고구려는 부흥과 신라타도를 외치면서 후고구려라 칭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궁예는 국력이 강화되면서 후고구려라는 이름대신 마진을 택하고 905

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바꿉니다.

 

이리하여 완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견훤이 후백제를 칭하고 양길의 부하에서

홀로 선 궁예가 후고구려를 내걸면서 한반도는 구세력인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어 장패에 돌입하여 나중에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세나라를 통일하기까지

무려 35년간 삼국간 대립기간을 거칩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가진 것은 후백제인데 후밷제는 정규군 중심으로써

나주지역을 제외한 전라도 전 지역과 경상도 진주, 합천 서남부지역, 동으로는 상주,

북으로는 청주와 공주를 석권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시킵니다.

후백제는 주로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데 비해 태봉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북부 등 주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펴는데 이는 그의 무리들이 호족세력과

초적의 무리가 연합을 해 결성되다가 보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것입니다.

 

견훤(甄萱)은 전라도 전 지역과 충청도의 일부지역을 평정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궁예와는 화친을 하면서 신라를 공략해 통일을 이루겠다는 구상이었으나 그의

생각은 번번히 궁예의 부하장수이던 왕건의 해상세력에 의하여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당시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광주, 청주, 당선(경기 남양), 괴양(괴산) 등을

평정하여 아찬으로 승진을 하고 903년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후에 나주)으로

가서 10여 군현을 공략하고 보루를 쌓아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진도마저

확보합니다. 특히나 그는 전함들을 이끌어서 나주를 근거로 하여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궁예세력의 확장에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서 궁예는 북으로는 대동강유역, 동남으로는 낙동강유역, 서남쪽으로는

나주를 거쳐 멀리 진도까지 판도를 넓힙니다. 당시 궁예는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왕건의 해상활동에 힘입어 한반도를

평정하루 수 있는 길을 선점하기에 이르릅니다.

 

 

- 왕건의 고려 건국(918) -

그런데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자신의 세력을 과신하고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시하들은 모반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죽이고, 궁녀와 후궁은 간통을 저질렀다면서

죽이고, 자신의 부인과 아들까지 죽이는 지경에 이르자 신하들은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여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미륵보살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청광보살, 인광보살이라고 부르게 하고

관심법이라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가 거듭되면서 부인이 이를 나무라자 궁예는

부인 강씨도 음행을 저지른 것으로 몰아붙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을 저지르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부인은 어이가 없어서, “어찌 제가 그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네 마음을 궤뚫어 보아 알수가 있느니라

하면서 불에 달구어진 무쇠 방망이를 가지고 와 음부에 넣어서 죽이고 그래도 분이

안풀려서 자신의 두 아들까지 데려와 죽이었는데 이때가 915년이였습니다.

궁예가 이처럼 죽인 것은 자신의 권력을 반대하거나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모두 불안에 떨었는데 왕건도 이에 불안을 느껴 914년 나주로 내려가서 이를 피하고

나주지역을 다시 확보합니다. 그런데 궁예가 왕건을 궁에 부릅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 볼수 있다.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궤뚫어 보리라궁예는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이때 최응이 짐짓 붓을 일부러 떨어뜨리고는 이를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귀속말로

속삭입니다. “장군! 복종하기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와집니다.”

이어 왕건은 역모를 인정하였습니다.

사실은 제가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웃는 낯으로 말하길.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궁예는 왕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더욱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반역할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예의

이러한 행동은 왕건과 주위 사람들의 위기감을 더욱 자극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건의 예하 장수들 복사귀(지겸), 홍술(), 백옥(배현경), 삼능산(신숭겸) 4기장이 권하자

왕건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자 부인유씨가 갑옷을 찾아 왕건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출정하도록 하자 왕건은 비로소 왕성을 향하여 진군하였씁니다.

 

왕건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혼자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왕건이 그렇게 하였다면 나의 명은 끝났구나!”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왕건과 싸워보았자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는 변복을 하고 궁성을 몰래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으나, 민심을 잃은 그는 강원도 포천 명성산 등을 전전하면서

숨어 지내다가 배가 고파 남의 보리이삭을 잘라먹다가 들켜서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왕건은 9186월 왕위에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搜)라고 하니

이것이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따라

새나라는 정치적인 안정과 민심수습을 착수하였으니, 그를 찬동하는 세력도 있었으나 잇달아

환선길 등 불만세력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다음해에 왕건은 궁예의 연고지인 철원에서

자신의 연고지인 개성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친교를 유지하고 후백제와도 일시적인 휴전을 모색하였으며

고려가 호족들로 구성되어서 이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호족들과 혼인을 통하여 우호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제를 개혁해 국가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후백제 견훤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축하사절을 보내

고려와는 유화책을 취하면서 약한 신라를 먼저 멸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상하에

920년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사를 무주로 보내자 신라 경명왕은 고려에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고려에서 김율을 보내자

견훤은 바로 철병하였습니다. 또한, 견훤은 경애왕 원년 924년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 군사로 안동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하지만 성사람들의 필사적인 방어와

왕건 지원에 힘입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음해 견훤이 3천명을 몰아 조물성을 다시 침략을

하나 왕건이 대응을 하였으나 실력을 가릴 수 없어 휴전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926년 견훤이 볼모로 고려에 보냈던 진호가 돌연 사망하자 견훤은 변사로

인정하고 고려의 인질 왕산을 살해하고 대군을 공주로 보내 고려를 침공 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고여 개국 초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나 낙동강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이

다툼을 계속하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는 지방호족들의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로 통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고려는 초기에 후백제에 비하여 열세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 경주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앉히어

신라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왕건은 경주를 방문해 신라 귀족의 환심을 삽니다.

이로 인하여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에 항복하면서 호족들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 왕건, 공산성전투(927)에서 견훤에게 패하다.-

 

 

 

 

 

 

태조 10년 왕건은 대구 공산성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해 지자

신숭겸은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왕건을 탈출시킨 후 어차를 타고 적진을 향하여

돌진합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집중 공격을 하여서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김락장군도 전사하게 됩니다.

 

 

 

 

 

 

 

- 왕건, 고창전투(930)로 승리를 잡는다. -

9297월 견훤은 갑병(甲兵) 5천여명을 거느리고서 의성부를 공격하였고, 왕건의

충실한 지지자이던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습니다. 이어 영주를 침범하고, 문경과 고창군을

포위하는데, 이에 왕건이 그해 12월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창을 구하기 위하여 출전합니다.

고려군은 사실 전투가 벌어질 당시 대구 공산성전투에서 패배한 전력도 있고 하니,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개국공신 홍유와 시중 공훤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하여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이 길로 죽령으로는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사전에 길을 닦아 두는게 좋겠습니다.”

하면서 미리 도망갈 길을 제안하자, 유금필이살길을 생각하지 말아야 승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싸우기도 전에 패배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반박하자

왕건은 유금필의 손을 들어줄 정도였으니 고려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진 상황이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당시 이 고장 고창의 성주이던 김선평(金宣平), 행장이던

권행(權行 또는 ), 향민이던 장길(張吉)은 잘 아는 사이였는데 성민들을

이끌고 와서 고려군에 가세하여 힘을 보태었습니다. 김선평은 이 지역 사람이라

지리에 밝았습니다.

 

고려군이 먼저 병산(甁山)에 주둔하고, 견훤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을

대치하는데 거리가 500m정도로 근접하여 대치하였습니다. 당시 전설에 의하면 와룡면의

서지동과 송현동일대 등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간신히 혈로를 뚫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고려는 이 전투에서 백제군과 맹렬히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군에게 향후 삼국간의 싸움에 승기를 제공한 것으로

의의가 있는데 후백제의 시랑이던 김악(金握)이 생포되고 전사자가 8천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견훤은 패배하자 군사를 돌려서 순주를 공격해 민가를 약탈하여 돌아갔고, 왕건은 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를 관망하던 신라 성주들이나 장군들이

급속히 고려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하게 됩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승리 후 비로소 후백제와의 관계에서

열세를 극복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차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신라침력과 팔공산 전투에 대한 성과이기도 합니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왕건이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하는 왕건에게 지지를 보낸 것입니다. 견훤은 경주에 침입을 하여서 경애왕을 지결케

하고 왕비와 후궁들을 욕보이며 노략질을 하고 왕제 효렴과 재상 영경 등 인질들을 잡고

능묘를 파헤치고 수많은 재물을 노략질하여 돌아갔습니다.

 

이후에도 수시로 신라의 변경을 침입해 위협을 가하며 신라인들에게 적대감을 심어주었던

반면 고려는 신라가 위급할 때 마다 도와주도록 하여 고려와 가까워지게 하였을 뿐,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해 천하의 인심을 잃어 대권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경순왕은 931년 사신을 보내 하례하며 회견을 청하자 그는 기병 50여명만을

대동하고 신라의 금성을 방문하자 경순왕은 임해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줍니다.

왕건은 경주에서 10여일을 보낸 후에 돌아오는데 경순왕은 혈성까지 따라 나와서

왕건을 환송합니다. 그는 신라를 방문해서 상당한 호감을 주었는데 신라인들은,

옛날에 견훤이 왔을 때는 늑대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니

부모를 뵈온 것 같다.” 하며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신라인의 마음을 샀습니다.

 

반면에 후백제는 932(태조15) 견훤의 심복이던 장군 공직이 왕건에게 귀부하였는데

그는 월래 신라 출신으로 신라가 혼란스러워지자 후백제에 항복하여 견훤 부하가 된

자였으나 견훤이 무도하다며 아들과 함께 고려에 귀부한 것이였습니다. 왕건은 공직의

요청으로 일모산성(문의)을 쳐서 함락시키자 견훤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해군을 보내

고려의 예성강을 공격하였으나 왕건은 염주, 배주, 청주에서 배 1백여척을 불사르고

저산도의 목마 3백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933년 견훤은 장자 신검에게 군사를 주어 청도지역의 습산성과 경주지역의

아불진 등지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건은 후백제가 다시 경주를 침입할 것을

우려해 정남대장군을 보내 의성부를 지키던 유금필을 보내 신라를 보호하게 합니다.

유금필은 신검군사를 도중에 만나는데 후백제군은 이들을 보자마자 도망쳐 습산성을

구하고 귀로에 신검군사를 만나 장수 7명을 사로잡아 개선하였습니다.

 

9349월 왕건은 견훤과 운주에서 만나 일전을 치르는데 이 싸움으로 웅진이북 30여성이

자진하여 귀부하였습니다. 이 중 능주와 운주는 월래 전에 태봉국이였으나 후백제쪽으로

돌아선 곳인데 이를 다시 회복한 것으로써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고려와 후백제가 다투는 가운데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견훤은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전실부인으로부터 신검, 양검,

용검을 두고 후실 소생인 넷째아들인 금강을 두었는데 견훤은 적자인 신검을 태자로 삼지않고

금강을 태자로 삼습니다.

 

그러자 이찬 능환이 아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충동질하여 완주출신 40여명을 주축으로

935년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견훤은 6개월 후 막내아들 능예,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몰래 금산사를

탈출합니다. 왕건은 첩자를 통하여 견훤의 귀순의사를 확인하고는 유금필 등에게 전함

40척을 나주에 보내어 개경에서 견훤을 맞이합니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라 부르고

극진히 대우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은 후백제의 압박과 내정파탄에

견디지 못하고 93511월 신료들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고 시랑 김봉휴를 보내서

항복의사를 밝힙니다. 왕건이 복속을 허락하자 경순왕 김부를 낙랑왕으로 봉하고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를 시집보내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후에 고려5대 경종의

왕비가 됩니다.

 

견훤과 함께 왕건은 후백제 공격에 나서는 당시 고려군 875백명 이었는데, 이중

70%가 지방세력과 발해유민이고 왕건 중앙군은 15천여 명일 정도로 호족세력의 지원이

절대적이였습니다. 고려 중군에 흑수부의 철리부 여진기병이 95백명이나 되었는데

북방정책의 효과를 보여주기로 합니다. 이들은 일선군의 일리천을 마주하고서 대치합니다.

 

이때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견훤에게 항복을 하였고, 고려군이

공격을 하자 후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져 도망을 치기 시작하고 일부는 창을 거꾸로 겨누자

신검은 급히 완산주로 도망을 칩니다. 고려군이 황산의 탄령을 넘어서자 항복을 합니다.

 

왕건은 신검을 살려주고 용검과 양검은 귀양을 보냈다가 참형에 처하는 한편

견훤은 자신에게 배반을 한 능환을 참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왕건의 나이는 60세로

고려를 세운지 19년만에 통일을 이룹니다. 견훤은 왕건이 신검을 살려주고 사로잡은 후

작위를 주는데 사로 잡은 백제 군사는 모두 풀어 줍니다. 견훤은 이것을 분하게 여겨서

번민을 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게 됩니다.

이로써 태조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 왕건의 최후 -

왕건은 제위 26년째인 9434월 병석에 눕게 되는데 대광 박술희를 불러서

후세 국왕들에 대한 고려의 통치이념과 방향을 남깁니다. 박술희에게 군국의 일을 맡기고, 병상을 지키던

재상 염상과 왕규, 박수문에게 기무를 맡깁니다. 943529일 왕건은 신덕전에 나아가

학사 김악에게 유언을 작성케하고 6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죽어서 현릉에 묻히고 앞서 죽은 제1비인 신혜왕후와 합장됩니다.

 

 

 

 

 

그는 죽기 직전 신하들에게 나는 죽는 일을 집에 돌아가는 일처럼 여기고 있다.

 슬퍼할 것 없다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오열을 참지 못하자

 생명이 덧 없음을 모르느냐?” 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궁예의 밑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발탁되었고, 고려를

세운 뒤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이나 통일 후에도 항상 남을 배려하여 살았고 화해와 타협을

기조로 살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 "태조 왕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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