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8월13일>

 

 

 

 

[ 사진1. 월남전 파병 ]

 

 

 

▶ 2009년   북한,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씨 석방

 

▶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야스쿠니 신사 참배

 

▶ 1998년   러시아, 정치인을 포함해 3명의 승무원을 실은 소유즈 우주왕복선이 카자흐공화국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성공적으로 발사

 

▶ 1996년   전 연세대 교수 정석해씨 별세

 

▶ 1991년   원로 한학자 김종무씨 별세

 

▶ 1989년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 수상

 

▶ 1988년   건설부, 1992년까지 16조3천억원을 투입, 택지 5천7백만평을 마련해 주택 2백만호를 건설한다고 발표

 

▶ 1986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 구성

 

▶ 1980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정계은퇴 발표

 

▶ 1979년   중국, 산아제한정책 발표

 

▶ 1978년   베이루트 PLO본부 폭파

 

▶ 1978년   이란 반정폭동 격화

 

▶ 1977년   북괴, 리비아탁구팀 코치 김창제씨 납북기도

 

▶ 1977년    영국 런던서 전후최대의 인종폭동

 

▶ 1969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와 소련군 기갑부대 격렬한 무력충돌

 

▶ 1965년   1개사단 전투병력 월남파병 동의안 국회통과

 

▶ 1964년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

 

▶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

 

▶ 1960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프랑스로부터 독립

 

▶ 1959년   일본 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 인도 캘커타에서 재일교포북송협정 체결

 

▶ 1956년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실시

 

▶ 1955년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

 

▶ 1953년   소련 수소폭탄 실험

 

▶ 1952년   근로기준법 국회 제출

 

▶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 김윤근소장 등 사형 집행

 

▶ 1949년   지방체신관서설치법(법률 47호) 공포

 

▶ 1948년   한국-대만, 국교수립

 

▶ 1946년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사망

 

▶ 1943년   광복군, 버마전선에 사관1대 파견

 

▶ 1935년   심훈의 상록수, 소설 현상공모에 당선

 

▶ 1926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출생

 

▶ 1913년   독립의군부 사건 선고공판 열림

 

▶ 1912년   조선삼림미간지 및 산림산물특별처분령 공포 시행

 

▶ 1910년   나이팅게일 사망

 

▶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 조직

 

▶ 1907년   청, 자정원 설립

 

▶ 1899년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생

 

▶ 1898년   미국군, 마닐라 점령

 

▶ 1888년   세계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에 성공한 베어드 출생

 

▶ 1868년   페루 아리카(Arika 현재 칠레) 진도 9.0지진·쓰나미로 2만5674명 사망

 

▶ 1826년   프랑스 의사 라엔네크 사망

 

▶ 1396년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망

 

▶  232년   중국 삼국시대 촉한 시대의 전략가 제갈량(제갈공명) 사망

 

 

 

 

 

[ 사진2. 월남전 파병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경제가 아주 어렵던 시절

월남파병안 국회 통과와 월남전 파병으로 인해 우리 경제가

발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한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 사진3. 월남전 파병 ]

 

 


1961년 5월 16일 새벽, 고요한 적막을 깨고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예고하는 총성이었다. 40대의 젊은 군인 박정희,

그는 구국에 찬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혁명공약 4번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발표했다.

절망과 기아선상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문구이다. 절망은 어찌할 수 없고 희망이 없는 것이며,

기아선상은 먹을 것이 모자라 굶주림이 계속된다는 말이다.

 

 

 

 

[ 사진4. 월남전 파병 ]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인도 다음으로 2번째로

가난한 나라로서 희망이 없고 절망적이었으며

한 끼의 때(식사)를 걱정하는 절박한 현실이었다.

그 때 혁명의장 박정희는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경제개발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 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지만 우리에게는 3가지 중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오직 있는 것은 할 일없이 놀고 있는 실업자 즉, 풍부한 인력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2년 1월 13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 사진5. 월남전 파병 ]

 

 


박정희 의장은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 차관을 빌리려고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에 손을 내밀었지만 선진국은 냉담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자원도 없고 신용도 없는 나라에 뭘 믿고

돈을 빌려 주겠나! 돌이켜보면 그 당시 선진국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었다.

1963년 독일에 광부를 보내고 천신만고 끝에 우리나라 최초로

1964년 10월, 독일에서 3,750만$ 차관을 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참으로 암담한 그 때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늘이 준 기회가 왔다.

그건 다름 아닌 월남정부와 미국 존슨대통령의 월남파병 요청이었다.

1차로 의무병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 등 비전투요원을 파병하였다.

 

 

 

 

[ 사진6. 월남전 파병 ]

 

 


그 이후 월남전이 더욱 확전되어 많은 병력이 필요하였으나

미국 본토에서는 미국 국민들의 반전 여론으로 인해 더 이상

전투부대를 월남에 보내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전개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 2개 사단을 철수시켜

월남으로 보내는 것을 검토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사진7. 월남전 파병 ]

 

 

 

만약 전방에 배치되어 있는 미군 2개 사단이 빠지면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노리고 있던 북한이 제2의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보기가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며,

또한 6.25 전쟁 때 수천만$의 전비를 쓰고 수십 만 명의

전·사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우리를 도와준 혈맹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파병이

우리의 국가안보에 직결되어 있고, 국익을 위하며

우리나라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심 끝에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고,

국회는 파병동의안을 가결시켜 1964년 7월에 비전투부대를 파병하고

이어서 1965년부터 청룡, 맹호, 백마 등 전투부대를 차례로 파병하였다.

그리고 십자성 부대, 비둘기 부대 등 8개 부대가 이역만리

열대우림의 월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 사진8. 월남전 파병 ]

 

 


월남참전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 8개월 동안

325,517명의 한국군이 정부의 명령에 의해 목숨을 걸고 파병되어

전사·사망 5,099명, 부상 12,352명, 고엽제 휴유(의)증환자 10만 여명이 발생하는 등

우리 군의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공헌과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 사진9. 월남전 파병 ]

 

 


그 첫째로, 월남파병은 경제개발의 확실한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하였다.

파병당시 1964년 말 통계에 보면, 우리나라 총 외환 보유고가

1억2천만$, 총 수출액 9천7백만$, 국민1인당 GNP가 100$이었는데

월남 전쟁으로 인하여 국내로 유입된 달러가 자그마치

67억2천9백만$이었다(공식적인 것만). 1965년 당시 36년 동안

일본에게 압박·착취를 당한 보상으로 무상 3억$, 재정차관 2억$,

상업차관 3억$ 총 8억$를 여러 해에 걸쳐 유·무상으로 받는데 그쳤으며,

 

 

 

 

[ 사진10. 월남전 파병 ]

 

 

 

파병기간(1968. 2. 1 - 1970. 7. 7) 중 2년 5개월 만에 건설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428km에 이르며 1km당 당시 평균 공사비가

1억원 소요되어 총 428억원이 소요되었다. 참고로, 그 당시의

환율이 1$당 290원이었으니 총 1억4천7백만$가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월남 전쟁으로 인하여 들여온 67억$(차관, 국군현대화 무상지원금 포함)는

경부고속도로를 45개나 만들 수 있는 가히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따라서 이 엄청난 금액은 국가의 경제 발전을 확실히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사진11. 월남전 파병 ]

 

 


둘째, 파병의 댓가로 미국이 무상으로 지원해 준 15억$상당의

무기와 장비는 한국군이 현대화된 국군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에 절대 열세였던 국방력을 북한과 대등한 관계로 끌어 올리며

강력한 국군으로 변모시켰다. 그 결과, 전쟁억지력을 발휘하고

북한의 남침야욕을 분쇄시키어 한국군의 국방력 강화와 국가안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 사진12. 월남전 파병 ]

 

 


셋째, 월남파병은 6.25전쟁 때 도와준 21개국의 자유우방국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고

그 결과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쌓게 되어 믿음직한 자유우방국가로서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인 위상이 절대적으로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 사진13. 월남전 파병 ]

 

 


넷째,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월남)에 우리나라의 건설, 운송, 용역 등

79개의 기업과 7만 여명의 기술자들이 월남파병의 댓가로 진출하여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해외 진출에 반드시 필요한 실적과 경험을 쌓아,

월남을 철수하는 1973년에는 중동으로 진출하는 결정적인

브릿지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해 건설사들의 중동진출은

월남참전이 없었다면 감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 사진14. 월남전 파병 ]

 

 

 

따라서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월남전쟁 특수」를 통해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2차를 성공하였고,

1970년대에는「중동 건설특수」를 통하여 경제개발 3,4차 계획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한국경제 개발의

신화를 창조하며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 국가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굶주림과 절망에서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결국 오늘 날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는 초석이 되었던 것은 월남참전 용사들의 호국정신과 숭고한 희생의 댓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사진15. 월남전 파병 ]

 

 


돌이켜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19여년 통치기간 동안의 업적으로,

경제발전과 국가안보의 성공한 대통령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월남참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과 월남참전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5.16혁명공약 4번째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해낸다」를 확실히 지키고,

조국의 근대화에 찬란한 금자탑을 세우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길이 남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 사진16. 월남전 파병 ]

 

 


이렇듯 월남참전자들의 많은 희생과 숭고한 애국 충정의 호국정신은

온 국민이 존경하고 찬양하여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야 할 것이며,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월남참전자들의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예우를

타 단체와의 형평에 맞게 합당한 특별법을 만들어

정부가 스스로 앞장서 명예롭게 예우해 주어야 할 것이다.

 

 

 

 

[ 사진17. 월남전 파병 ]

 

 


그것이 바로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잡고 이 시대의 정치지도자들이 하여야 할 덕목이며

시대적 사명이라 할 것이다. 우리 32만 월남참전자들과 200만 가족은

국민 각자가 서로의 위치에서 국가를 생각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단결하여

다시 우리 대한민국이 역동적으로 활기를 되찾고 다시 한번 도약하여

세계 속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 풍요롭고 살기 좋은

1등 선진복지국가로 거듭나기를 염원해 본다.

 

 

 

                                  글 출처 : 경북문화신문 

 

 

 

         

 

 

 

 

 

 

 

 

 

 

 

 

 

 

 

 

 

 

 

 

 

 

 

 

 

 

 

 

 

 

 

 

 

 

 

 

 

 

 

 

 

 

 

 

 

 

 

 

 

 

 

 

 

 

 

 

 

 

 

 

 

 

 

 

 

 

발전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한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고요한 적막을 깨고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대한민국에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예고하는 총성이었다. 40대의 젊은 군인 박정희,

그는 구국에 찬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혁명공약 4번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발표했다.

절망과 기아선상은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문구이다. 절망은 어찌할 수 없고 희망이 없는 것이며,

기아선상은 먹을 것이 모자라 굶주림이 계속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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