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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5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명예혁명 ]

 

 

 

▶ 2010년   '미술사학계 거목(巨木)' 진홍섭 전 교수 별세

 

▶ 2008년   '쥐라기 공원'의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 사망

 

▶ 2005년   원로 동양화가 박원수씨 별세

 

▶ 2005년    제12차 남북이산가족상봉

 

▶ 2002년   `국민통합21` 창당, 정몽준의원을 대통령후보와 당대표로 추대

 

▶ 2000년   일본 마이니치 신문, '일본 구석기 유적 날조' 보도

 

▶ 1998년   조치훈 명인, 세계최연소-세계최단지로 1,000승 달성

 

▶ 1998년   국제천문연맹, 아마추어 천문가 이태형씨가 국내서 첫 발견한 소행성 공식 인정

 

▶ 1997년   영국 자유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 사망

 

▶ 1996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재선

 

▶ 1996년   민속학자 김두하 옹 별세

 

▶ 1995년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재 창설

 

▶ 1993년   유럽통합군 창설

 

▶ 1991년   필리핀, 태풍`셀마`로 4천여명 사망.실종

 

▶ 1991년   영국 언론재벌 총수 맥스웰 사망

 

▶ 1991년   고당 조만식선생 국립묘지에 안장

 

▶ 1989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사망

 

▶ 1986년   김대중씨,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대권출마를 포기하겠다고 선언

 

▶ 1984년   다니엘 오르테, 니카라과 대통령선거 당선

 

▶ 1982년   자원관리법안 국회제출

 

▶ 1981년   정부, 제2제철 광양만에 건설키로 확정

 

▶ 1980년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공포

 

▶ 1980년   한국-바누아트 국교 수립

 

▶ 1979년   이란, 대(對)미 우호조약 파기 선언

 

▶ 1978년   한국-투발루 국교 수립

 

▶ 1974년   제1회 세계식량회의 로마서 개막

 

▶ 1973년   미국의 고생물학자 로머 사망

 

▶ 1970년   춘천호(의암댐)서 나룻배 전복

 

▶ 1966년   휴 헤프너의 `플레이 보이`왕국 공개

 

▶ 1962년   제5차 개헌안(대통령중심제-단원제) 공고

 

▶ 1961년   미국 국제개발처(AID) 발족 

 

▶ 1960년   미국 슬랩스틱 희극의 아버지 마크 세넷 사망

 

▶ 1958년   이승만대통령 월남방문

 

▶ 1956년   유엔, 중동경찰군제 창설 결의

 

▶ 1951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 파견

 

▶ 1949년   한국, 유엔식량농업기구 가입

 

▶ 1945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결성

 

▶ 1944년   프랑스의 생물학자 알렉시 카렐 사망. 혈관봉합술 발달 공로로 1912년 노벨의학상 수상

 

▶ 1940년   에콰도르 대통령 롤도스 아길레라 출생

 

▶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최초로 대통령에 3선

 

▶ 1937년   조선중앙일보 폐간

 

▶ 1922년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 1916년   아인슈타인, 일반상대성이론 발표

 

▶ 1916년   폴란드 독립선언

 

▶ 1915년   불교중앙학교 설치 인가. 뒤에 혜화전문 동국대학으로 발전

 

▶ 1914년   독일의 생물학자 아우구스트 바이스만 사망

 

▶ 1914년   독일군, 1차 대전 중에 일어난 아프리카 최초의 `탕가 전투`에서 영국군에 대승

 

▶ 1914년   영국-프랑스, 對터어키 선전포고. 키프러스 합병 선언

 

▶ 1913년   비비안 리 인도에서 출생

 

▶ 1913년   러시아-중국, 외몽고협정

 

▶ 1912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 당선

 

▶ 1911년   이탈리아, 트리폴리를 합병

 

▶ 1911년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경성섬유 창립

 

▶ 1906년   의병장 최익현, 대마도서 순국

 

▶ 1904년   전독립협회원, 고종 밀지 휴대하고 미국으로

 

▶ 1888년   독립운동가 이규갑 출생

 

▶ 1879년   영국 물리학자 맥스웰 사망

 

▶ 1854년   프랑스의 유기화학자 폴 사바티에 출생

 

▶ 1750년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 출생

 

▶ 1688년   영국 명예혁명

 

▶ 1605년   영국서 화약음모사건 발발, `가이포크스데이`라 불림

 

▶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등, 반란 일으킴

 

 

 

 

1688년 11월 5일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혁명은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너는 그것을 떨어트려야 한다.The revolution is not an apple that falls when it is ripe. You have to make it fall.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혁명의 무기다.It is not just a simple game, it is a weapon of the revolution.-체 게바라(Che Guevara

명예혁명의 원인중 하나는 제임스 2세의 반동정치였다.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돼 일으킨 최초의 시민혁명인 청교도 혁명, 전제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정치 체제를 바꾼 명예혁명. 이 두 혁명은 영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이다.

특히 명예혁명과 관련해 체결한 권리장전은 영국의 절대주의를 종식시켰고 의회정치의 기초를 확립시켰다. 나아가 미국의 독립선언, 프랑스의 인권선언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많은 나라의 헌법에 있어 권리와 의무 규정의 기본이 되고 있다.


1. 배경
명예혁명 이전에 영국에는 청교도혁명이 있었다. 이때 잠시 영국에서는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되었다. 하지만 청교도라는 종교가 너무 금욕주의적인 생활을 강요하다보니 사람들의 불만을 사서 공화정을 폐지하고 왕정이 복고된다.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영국은 안팎으로 위기에 처해, 안으로는 의회파가 장로파, 독립파, 수평파로 갈려 그 골이 깊어만 갔고, 밖으로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반란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왕을 처형한 나라라 해서 유러의 군주들은 영국을 두려움과 적의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국왕의 처형은 분명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독립파의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탁월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여 스코틀랜드 장로파와 손잡고 왕정복고를 꾀하던 찰스 1세의 아들을 프랑스로 쫓아버렸다.

한편 항해조례를 발표, 네덜란드와 해상권을 두고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1654년 크롬웰은 호국경 자리에 올랐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대였다. 크롬웰이 1658년 사망하고 그로부터 꼭 2년 만인 1660년 5월 29일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런던에 입성했다.

런던 시민은 환호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거리는 꽃으로 수놓아지고 종소리가 울려퍼졌으며 깃발이 휘날렸다. 창문과 발코니마다 사람들과 트럼펫 소리가 가득 차고, 수많은 군중이 길을 메웠다. 찰스 1세가 처형당한 지 11년 만에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왕위에 오른 사람이 찰스 2세다. 찰스 2세는 가톨릭이었기 때문에 헨리 8세 때 영국 국교는 성공회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을 복고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의회에서 심사율이라는 법을 제정하게 된다. 심사율이란 성공회신자가 아닌 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다.

의회는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가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왕위계승권에서 제외시키려는 노력을 하지만 실패한다. 따라서 찰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자 찰스 2세의 아우인 요크 공작, 즉 제임스 2세가 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회 걱정대로, 제임스 2세는 심사율을 무시하면서까지 가톨릭 신자들을 공무원에 임명하는 등, 한층 더 적극적으로 가톨릭 복고를 추진하고, 전제정치까지 더해 이미 청교도혁명 때 사라진 절대왕정을 복구하려고 한다.

2. 전개
제임스 2세의 이같은 정치에 반발한 의회는, 네덜란드의 윌리엄과 그에게 시집을 간 메리 스튜어트(제임스 2세의 장녀)를 설득해, 군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고, 이에 응낙한 윌리엄과 메리는 영국에 군대와 함께 돌아온다. (제임스 2세의 다른 자식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였다.)

이에 훗날 앤 여왕으로 즉위하는 제임스 2세의 차녀인 앤 스튜어트와 다수의 귀족들과 호족들이 의회에 동참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려 한다. 이 사실을 안 제임스 2세는 군대가 런던으로 진입하기 전에 미리 프랑스로 도망 간다. 따라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혁명에 성공하였다 하여 명예혁명이라 이름을 붙인다.

사람들이 찰스 2세에게 바란 것은 입헌군주제였으나 그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루이 14세를 한껏 동경하며 지낸 인물로 꿈은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었다.

찰스 2세는 돌아오자마자 부왕의 처형에 서명한 판사들 중 살아있던 13명을 처형시키고 크롬웰의 시체를 파내어 그 목을 잘라버렸다. 그런가 하면 몰수되었던 왕당파의 토지를 무상으로 원소유주에게 돌려주고, 카톨릭을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왕당파가 왕의 비호 아래 다시 고개를 쳐들어 의회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이 의회를 '기사의회'라고 비꼬았다. 1670년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다. 자신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20만 파운드를 받는 외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원조를 받으며, 프랑스를 도와 전쟁에 참여한다는 조건이었다.

그의 친불정책은 국내 자본가들의 이해와 상충되는 것이었으며, 국민감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카톨릭 세력만이 그를 환영했다. 불안을 느낀 의회는 심사율, 인신보호율을 제정했다. 심사율은 비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내용이고, 인신보호율은 아무 이유 없이 인민을 체포, 구금하지 못하며, 구금된 자는 20일 이내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이다.

1679년 이번엔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의회와 왕의 대립이 벌어졌다.
찰스 2세는 아들이 없어 그 동생 제임스가 왕위를 잇도록 했는데, 제임스는 형보다 더한 전제주의자인데다 카톨릭 교도였기 때문에 일부 의원이 반발,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세 번이나 의회를 해산한 끝에 제임스 배척안을 부결시켰다. 배척파들은 망명을 떠났다. 철학자 존 로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제임스 배척파는 청교도가 주축이었고, 반대파는 지주, 귀족, 성직자들이 중심이었다. 양파는 각각 전자는 휘그 당, 후자는 토리당이라 불렀다. 이것이 영국 정당의 기원이다.


1688년 5월 제임스 2세의 두 번째 왕비 마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명예혁명의 발단이다.

첫째 왕비의 소생인 메리와 앤은 신교도로 어려서부터 신교 교육을 받은 터였지만 새 왕비 마리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의회는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휘그당과 토리 은 손을 잡고 제임스 2세를 몰아내기로 했다.
의회가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오린지 공 윌리엄이었다.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입성했다. 딸과 사위에게 쫓긴 제임스 2세는 12월 왕비와 아기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3. 결말
의회는 메리와 윌리엄을 공동 즉위시키고 유명한 '권리선언'을 승인케 했다. '권리선언'의 주요 내용은, 모든 법률의 제정 또는 폐지는 의회를 거쳐야 하며,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갖는다는 것으로 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입헌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영국인들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성공한 명예로운 혁명이란 뜻에서 이 사건을 명예혁명이라 불렀다.

 

 

글 출처 : http://www.dailyjeonbuk.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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