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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북한, NLL침범으로 서해에서 우리 고속정과 2분간 교전 ]

 

 

 

 

▶ 2009년   북한, NLL 침범...서해에서 2분간 교전  

 

▶ 2008년   '대우건설 인수 청탁' 이주성 전 국세청장 체포  

 

▶ 2005년   제1회 코나미컵 아시아시리즈(일본 11.10~11.13)

 

▶ 2005년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방북

 

▶ 2004년   42세 로저 클레멘스,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7번째 사이영상 수상

 

▶ 2001년   아시아 최대 축구전용구장 '상암구장' 개장

 

▶ 2001년   중국 세계무역기구(WTO)에 정식 가입

 

▶ 2000년   국내 최대길이 서해대교 개통

 

▶ 1997년   디지털 TRS 상용서비스 개시

 

▶ 1990년   민중당 창당

 

▶ 1983년   MS, GUI 운용체계(OS) 윈도우 최초 공개

 

▶ 1982년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 사망

 

▶ 1977년   한국여자배구 월드컵대회서 최초의 소련팀 격파

 

▶ 1977년   북한외교관, 밀수사건으로 노르웨이서 추방

 

▶ 1973년   자카르타서 제1회 신생국경기대회 개최

 

▶ 1965년   문화대혁명의 발단이 된 눈문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 문회보에 발표

 

▶ 1964년   기자협회보 창간

 

▶ 1961년   최고위, 장면 전총리의 연금 해제와 불기소 발표

 

▶ 1956년   진보당 창당. 위원장 조봉암, 간사장 윤길중

 

▶ 1955년   메디칼센터 설치결정

 

▶ 1952년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 사표제출

 

▶ 1951년   미국 뉴저지-캘리포니아간 직통 전화 최초 성공

 

▶ 1951년   미-영-불-터키 방위기구 설치계획을 발표

 

▶ 1950년   한-미 화폐환율 2,500대 1로 인상

 

▶ 1939년   일제, 창씨개명제 공포

 

▶ 1938년   케말 파샤 터키 초대 대통령 사망

 

▶ 1937년   브라질 신헌법 공포. 독재 성립

 

▶ 1934년   중국 국민정부군, 서금 점령

 

▶ 1920년   조선교육령 개정 공포

 

▶ 1915년   동경 유학생 이광수, 신익희, 장덕수 등 조선학회 설립

 

▶ 1904년   경부선 철도 완공

 

▶ 1891년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 사망

 

▶ 1888년   유럽열국, 아프리카 노예무역 금지결의

 

▶ 1871년   스탠리, 리빙스턴 구해내

 

▶ 1851년   근대 발생학의 창시자인 영국의 동물학자 밸푸어 출생

 

▶ 1759년   독일 극작가 쉴러 출생

 

▶ 1541년   스위스 의학자 겸 화학자 파라셀수스 사망

 

▶ 1483년   독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출생

 

▶ 1389년   고려, 지진 발생

 

 

 

 

[ 사진2. 북한, NLL침범으로 서해에서 우리 고속정과 2분간 교전 ]

 

 

 

천안함 사건이 발생하기 약 5개월 전인 2009년 11월 10일.대한민국의 서해 NLL 해상에서는

포 소리가 울렸습니다. 2009년 가을의 서해 NLL, 과연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제3연평해전, 서해교전?]

 

바다 위에 분계선이 정확히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 이유로, 종종 월선 소식을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곤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업지도선 등이 NLL(북방한계선) 근처에서 조업하고

 있는 어선들에게 주의를 주는 등 신경을 많이 쓰고 있죠. 2009년 9월 4일, 북한의 경비정이

 백령도 동북방 10km 지점에서 NLL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실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해상에서의 경계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파도가 일렁이는바다, 해수에 떠있는 금가루로눈이 부시던 2009년

가을, 그날도 남과 북은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NLL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하고 있었습니다.

 

 

 

[ 사진3. 선체 밀어내기 중인 참수리 325호정 ]

 

 

 

2009년 11월 10일 오전 10시 33분 경


우리 해군의 서해 백령도 레이더 기지에 NLL에 접근 중인
북한 경비정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오전 11시 22분~25분 사이에 두 번에 걸쳐서 즉시 북상할 것을

요구하는 경고통신을 실시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무시한 등산곶 383호는 오전

11시 27분에 NLL을 넘기에 이릅니다(대청도 동방 11.3km). 다시 해군 2함대사령부는

11시 28분~31분 사이 두 번에 걸쳐 되돌아가지 않을 시 사격하겠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음을 경고한다내용으로 경고통신을 합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북한의 경비정에 사격할 것임을 재차 경고했지만,
북한의
경비정

(등산곶 383호)은 이를 무시한 채 무려 2.2km를 더 남하하기에 이릅니다. 더는 좌시할

 없었던 우리 해군의 고속정이 11시 36분에 북한 경비정의 전방 해상에 경고사격

가했습니다.  경고사격이 가해지자 드디어 북한의 경비정이 반응을 보입니다. 등산곶

383호에서 우리 해군의 고속정(참수리 325호정)을 향해 약 50여발을 직접

사격하기에 이르렀고, 우리 해군의 고속정도 40mm 함포 200여발로 즉각 응사

 합니다. 11시 37~39분, 약 2분에 걸쳐 교전이 벌어졌고 이 결과 북한의 등산곶

383호는 연기를 뿜으며 반파된 채 다른 군함에 예인돼 NLL을 통과해 북상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측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함선 외부 격벽에 15개의

 탄흔이 남았습니다. 이에 반해 북한의 피해는 극심했습니다. 경비정이 반파되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1명 사망했고 3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측되었습니다.

 

 

 

[ 사진4. 대청해전 상황도, 연합뉴스 ]

 

 

 

지난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5단계였던 교전규칙이 2004년 개정을 통해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3단계로 간소화되었고 현장지휘관의 재량권이 강화된 것이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북한의 경비정을 신속하게 퇴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으로 평가되었죠.이 교전을 두고

한때 제3연평해전 혹은 서해교전으로 불리우기도 했었지만, 장소가 연평도 근해가 아니라는

 점, 제1,2 연평해전이라는 표기를 원용하는 한편 해군의 사기를 높이고 해군의 승리를 평가

한다는 근거로 대청해전이라 명명되었습니다.



[참수리 325호정의 두 번째 참전 그리고 2010년의 비극]

참수리 325호정. 이 고속정에는 또 다른 참전의 기억이 있습니다.
1999년 제1연평해전에

참전하여 ‘선체밀어내기’ 작전으로 우리 해군에 승리를 가져다 준 전력이 있습니다. 이 참수리

325호정이 그로부터 10년 후, 대청해전 제1선에서 북한의 경비정에 맞서 우리의 바다를 다시

 한 번 지켜냈습니다.

 

 

 

[ 사진5. 대청해전 후, 전투상황을 전투배치 모습 재연중인 참수리 승조원들, 연합뉴스 ]

 

 

 

또한 제2연평해전에서 서해의 꿈으로 잠들었던 참수리 357호정 역시도 제1연평해전에

참전한 전력이 있었습니다. 제1연평해전 당시 참수리 357호정의 정장이었던 연제영 소령이
대청해전에서는 고속정 233 편대장으로 참전하여
현역 장교로는 최초로 해전을 통해 두 번의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고 합니다. 연제영 소령 뿐 아니라 대청해전으로 우리의 바다를 지켜낸

해군장병 47명에게 그들의 노고를 격려하며 훈장, 포장, 표창이 수여되었습니다.(무공훈장 6명,

무공포장 5명, 대통령표창 4명, 국무총리표창 6명, 국방부장관표창 10명, 합참의장표창 16명).

 이 사건이 있은 후 같은 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부는 관영통신인 조선중앙통신을

 통하여 대한민국 해군에게 ‘남측이 무장도발 행위를 하였다’며 ‘사죄를 하고 책임을 지라’는

 요구를 합니다. 이틀 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남측의 계획된 도발"이라며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엄포했죠. 그러면서도 북한은 해전의 피해에 대해 함구를 합니다.

그러나 이듬해 4월, 대청해전 직후 김정일이 ‘바다의 결사대’를 강조했었던 사실이 북한의 건군절

기념 방송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또한 대청해전에서 승리한 쪽은 북한 해군이라며 “작년 말 북방

한계선 고수를 운운하며 날뛰던 6척의 적(남한) 함선 무리를 징벌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뿐 아니라, 대청해전 17일 후에 서해함대사령부에 김정일이 방문하는 등 보복의 준비를 했던

것이 드러나기도 했죠.

 

 

 

[ 사진6. 북한의 서해함대사령부 군관 김광일 ]

 

 

 

피해 상황을 함구하며 승리했다 주장하던 북한은 그로부터 약 1년 뒤인 2010년 10월,

 대청해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북한병사 ‘김주혁’의 동상을 건립하고 그가 다녔던 평양

축전중학교를 김주혁 중학교로 개칭하는 행사를 노동신문을 통해 보도하며 그의 전사를 인정합니다.

제1,2연평해전을 비롯, 관련된 해전의 피해사실을 모두 함구해 오던 북한이 처음으로 해전의

피해를 시인한 것이죠.

 

 

 

[ 사진7. 대청해전에서 전사한 김주혁 ]

 

 

 

대청해전 발발 후 5개월여만에 침몰한 천안함.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벌어진 연평도 포격 도발.
북한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NLL은 위기 속에 지켜지고

 있습니다. NLL, 그리고 서해 5도.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곳에 너무도 많은 희생과 눈물

묻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늘 첨예한 그곳에 우리는 우리의 친구, 가족을 ‘희생’과

 ‘의무’의 이름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불안한 서해 NLL, 그곳은 군인들만 지키는 곳이

아닙니다. 군인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평범한 ‘국민’들이

지켜가고 있는 것이죠. 우리도 그 평범한 국민의 일원입니다. 그들에게만 모든 의무와 책임을

지우기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그곳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성숙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사진8. 서해에서 기동중인 참수리 고속정 ]

 

 

글 출처 : http://mpva.tistory.com/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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