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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30일>

 

 

 

 

[ 사진1.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 2009년   인도 마지막 왕비 갸야트리 데비 타계

 

▶ 2009년   연안호, 북한 장전항에 예인

 

▶ 2005년   MBC 음악캠프 생방송 중 성기노출 사건 발생

 

▶ 2004년   배우 출신 오기 지카게, 일본 여성 최초 참의원 의장 선출

 

▶ 2003년   빌 뮬러 미국 야구 사상 최초로 한 경기서 좌우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

 

▶ 2001년   가수 황금실씨 별세

 

▶ 2000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재선

 

▶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제83대 총리에 선출

 

▶ 1994년   영국의 추리 ㅣ소설가 로빈 쿡 암으로 사망

 

▶ 1991년   IBMㆍ모토로라ㆍ애플 3사 ‘파워PC동맹’ 체결

 

▶ 1983년   미국-중국, 무역분쟁 종식

 

▶ 1981년   감비아 좌익 군사쿠데타

 

▶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 1978년   알바니아 단원(斷援)에 반발 중국 비난

 

▶ 1978년   비동맹회의, 베오그라드선언 채택

 

▶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 19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헬싱키서 개막

 

▶ 1971년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 1965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망

 

▶ 1963년   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3개국 수뇌회담

 

▶ 1961년   신문윤리 실천요강 채택

 

▶ 1959년   대법원,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결정

 

▶ 1958년   아이슬란드 영해 12마일 확대 선언

 

▶ 1953년   역도산, 일본프로레슬링협회 결성

 

▶ 1953년   미국 상원, 한국부흥비 2억불 사용 승인

 

▶ 1952년   국제적십자총회 세균전 금지협약 가결

 

▶ 1946년   전국학생연맹 결성. 위원장 이철승

 

▶ 1940년   범미상회담, 공동방위결의를 채택(아바나선언)

 

▶ 1938년   랑군서 불교도와 회교도 충돌. 사상 3000여명

 

▶ 1935년   문고본 대명사 '펭귄북스'출간

 

▶ 1934년   부민관 기공

 

▶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개막

 

▶ 1932년   조만식 등 평양에서 건중회 설립

 

▶ 1930년   제1회 월드컵 결승전 우루과이-아르헨티나

 

▶ 1928년   미국 조지 이스트먼 최초의 칼라영화 공개

 

▶ 1921년   소련-터어키 평화조약 성립

 

▶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평양) 발기대회

 

▶ 1913년   독일, 대군비(大軍備) 확장안 제정

 

▶ 1912년   메이지(明治)일왕 사망

 

▶ 1909년   한국 최초의 한자전(漢字典) 발간

 

▶ 1909년   파킨슨 법칙` 만들어 낸 영국의 역사가 파킨슨 출생

 

▶ 1907년   제1차 러일협약 조인

 

▶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서 맨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

 

▶ 1900년   영국, 광산법 제정 소년의 지하노동 금지

 

▶ 1898년   독일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사망

 

▶ 1893년   프랑스 샴조약 체결(프랑스 메콩강 동안 획득)

 

▶ 1863년   미국 자동차왕 헨리 포드 출생

 

▶ 1818년   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출생

 

▶ 1771년   영국 시인 그레이 사망

 

▶ 1718년   식민지 개척자이자 종교운동가, 윌리엄 펜 사망

 

 

 

 

[ 사진2.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양팀 포지션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30년 7월30일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이 치뤄진 날입니다. FIFA월드컵은 전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지구촌 축제입니다. 22명의 사람이, 68m x 105m의 공간에서, 공 하나를 놓고

 펼치는 게임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시간을 거슬러

1930년 7월30일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결승전 현장으로 떠나보록 할까요~~^^

 

 

 

[ 사진3.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최초 우승자 ]

 

 

 

세계 축구의 진정한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로 1930년에 개최된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은 주최국 우루과이와

라이벌 아르헨티나의 싸움이였습니다. 참가팀 간의 실력 차이가 컸고, 당시 유럽 축구의 패권을 쥐고 있던 팀들이

거리가 멀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불참해 다소 맥이 빠지는 대회였다고는 하지만, 두 팀의 경기만은 달랐습니다.

 

남미를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당대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두 팀의 자존심 싸움이었기에 그 경기 수준은 당시 대회의

다른 경기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1930년 7월 30일 몬테비데오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벌어진 이 경기는

초대 월드컵이 자랑해 하는 명승부로 역사에 남았음은 물론입니다.

 

 

 

[ 사진4.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 양립한 당대 최강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

 

영국에서 태어난 축구가 유럽을 토대로 그 입지를 굳히고 있을 1920년대 무렵, 유럽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에게서 축구를 전수받은 남미는 그 나름대로 축구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최전선에는 바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있었고, 성장을 거듭한 이들은 월드컵 개막에 앞서 벌어졌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가질 정도로 빼어난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죠.

메달을 나눠 가졌다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한데, 사실 이 두 팀 중 어느 팀이 금메달을 차지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당대 최강이었기 때문에 우루과이는 '외팔이 골잡이' 엑토르 카스트로, 페드로 세아, 엑토르 스카로네, 호세 안드라데 등 무시무시한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도살자'로 악명높았던 루이스 몬티, 카를로스 페우셀레, 페드로 수아레스 등을 앞세운 아르헨티나 역시 우루과이 못지않을 정도로 화려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즉, 두 팀은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당대의 스타군단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1930년 월드컵을 사실상 이 두 팀 중 누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대회라고 정리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회가 개막된 이후 두 팀은 경쟁하듯 결승전까지 내달렸죠. 아르헨티나는 조 예선 전승 그리고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6-1로 크게 승리하며 결승전에 손쉽게 안착했고, 우루과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조 예선 전승으로 준결승전에 오른 뒤 유고슬라비아를 6-1로 대파했으니. 팬들은 두 팀의 파죽지세는 당연한 듯 여겼고, 그 시선은 두 팀의 결승전으로 모였습니다.

 

 

 

[ 사진5.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 공을 두고 다툰 치열한 신경전 -

 

경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빠뜨려서는 안 될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결승전에 사용할 공을 두고 다툰 이야긴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회 공인구'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주최 측이 지목한 '인정구'의 개념이었는데, 대회 내내 잡음이 없던 이 인정구가 결승전을 앞두고 도마에 올랐습니다.

주최 측이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하겠다고 공표하자 아르헨티나가 발끈하고 나선 것입니다. 홈팀인 우루과이가 자국산 볼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편파의 소지가 있다는게 아르헨티나 측 주장의 요지였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산 축구공을 사용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죠. 그러자 이번에는 우루과이 측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당초 예정대로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거죠.

신경전치고는 유치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강의 자리를 놓고 다퉈야 했던 당시 두 팀의 입장에서는 제법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딱히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주최 측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게 우루과이 축구공과 아르헨티나 축구공을 모두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형평성에 꼭 맞는 결정이었기에 두 팀 모두 더 이상 불평을 할 수 없었고 결국, 양 측은 아르헨티나산 축구공이 전반전에, 우루과이산 축구공이 후반전에 사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 사진6.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상단:우루과이(후반전) , 하단:아르헨티나(전반전) ]

 

 

 

                                             - '축구공 전쟁' 그 승자는? - 


경기 전부터 말 많았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대격돌을 보기 위해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는 약 9만 3천여 명의 축구팬들이 운집했고, 결승전에 앞서 지독한 신경전을 펼친 두 팀의 대격돌을 지켜보기 위해 우루과이 홈 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팬도 라플라타 강을 넘어 몬테비데오에 집결해 힘을 불어넣었고요.

벨기에 출신 장 란게누스 주심의 휘슬로 시작된 이 경기에서 먼저 기선을 제압한 팀은 우루과이였습니다. 홈의 기세를 등에 업은 우루과이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상대를 몰아붙였으며, 그리고 전반 12분 만에 선제골을 잡아냈습니다. 파블로 도라도의 강력한 땅볼 슈팅이 아르헨티나 수문장 후안 보타소의 다리 사이로 빠지면서 골로 연결되었습니다. 순탄한 출발이었죠.

그렇지만, 자국산 축구공을 사용하겠다고 고집했던 아르헨티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8분 뒤 아르헨티나는 손쉽게 동점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프란시스코 바라요의 침투패스를 이어받은 페우셀레가 우루과이 GK 엔리케 바예스트로스를 제치고 손쉽게 동점골을 만들어냈었죠.

이어 전반 37분 대회를 통해 스타로 등극한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역전골을 터뜨리며 기어이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습니다다.

득점 직후 우루과이 선수단과 관중은 스타빌레가 오프사이드였다며 반발했지만, 란게누스 주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자국산 축구공을 사용했던 전반전을 2-1로 앞선 채 마무리 지었습니다.
                                                                                              

  

 

[ 사진7.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하게 된 후반전. 반드시 뒤집겠다는 의욕을 보인 우루과이의 맹공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후반 12분 세아의 동점골로 이내 경기의 균형을 이릅니다. 세아의 득점으로 올림픽 결승전에서의 악몽이 떠오른 아르헨티나는 페우셀레, 마리오 에바리스토, 스타빌레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지만, 외려 후반 23분 산토스 이리아르테에게 강력한 중거리슈팅으로 역전골을 내줬고, 자연히 우루과이 팬들이 가득한 경기장은 환호로 들끓었습니다.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해서인지 아르헨티나는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였고, 스타빌레가 회심의 슈팅으로 골문을 겨냥했지만, 크로스바를 맞히는 불운까지 겹칩니다. 우루과이는 좀처럼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후반 44분 도라도의 크로스를 받은 카스트로가 깔끔한 헤딩골을 작렬하며 경기에 쐐기를 박습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면서 월드컵에서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를 꺾고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선수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팀의 승리를 지켜본 우루과이 팬들도 황홀경에 빠져들었죠. 경기 이튿날까지 몬테비데오는 축제의 분위기로 뜨거웠고, 우루과이 정부 역시 국경일로 선포하며 위대한 승리를 기념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기묘하게도 아르헨티나산 축구공을 사용했던 전반전과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했던 후반전의 내용이 판이했다는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지금도 우루과이는 당시 결승전에 사용했던 두 나라의 공을 박물관에 전시하며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축구공이 경기 결과에 영향을 끼쳤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확실한 점은 두 팀의 자존심 싸움은 월드컵이 낳은 첫 번째 명승부로 역사의 첫 줄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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