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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 영상1. 일본 항복선언 히로히토 일왕 ]

 

 

 

 

▶ 2010년   '사랑의 교회' 옥한흠 원로목사 별세

 

▶ 2009년   신라 문무대왕비 상단부 발견

 

▶ 2000년   비전향장기수 63명 북한으로 송환

 

▶ 1999년   북한, 사해 북방한계선(NLL) 무효 주장하며 서해 해상군사분계선 선포

 

▶ 1998년   스위스 여객기 대서양에 추락, 탑승객 229명 전원 사망

 

▶ 1998년   언론인 유건호씨 별세

 

▶ 1996년   체코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 사망

 

▶ 1993년   국내최초 다목적 경비행기 '창공91호' 개발

 

▶ 1989년   제30회 국제기능올림픽 폐막. 한국 8연패

 

▶ 1987년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내한

 

▶ 1981년   미국, 중성자탄 생산 시작

 

▶ 1980년   전두환 대통령 새 내각 구성

 

▶ 1980년   남덕우 국무총리 서리 취임

 

▶ 1975년   학도호국단 발단식

 

▶ 1969년   최초의 패킷교환방식 `아르파넷` 등장, 인터넷의 효시

 

▶ 1964년   제1차 대전 영웅 미국의 알빈 요크 사망

 

▶ 1962년   소련-쿠바 군사경제원조 협정 조인

 

▶ 1957년   정부, 말레이지아연방 정식 승인

 

▶ 1949년   중국 중경에 대화재 1,700명 사망

 

▶ 1947년   미주(美洲) 19개국, 미주 상호원조조약 조인 (리오조약)

 

▶ 1946년   소년 노동법 제정

 

▶ 1945년   동경에 GHO(연합군사령부) 설치

 

▶ 1945년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 선언

 

▶ 1945년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1945년   연합군최고사령부, 미국-소련 양군의 한반도분할점령책 발표

 

▶ 1945년   일본 연합군총사령부 육해군 해체와 군수생산을 중지하는 지령1호 발표

 

▶ 1937년   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 사망

 

▶ 1933년   이탈리아-소련, 불가침조약 조인

 

▶ 1920년   소련 바크서 제1회 동방민족대회 개최 (37 민족대표 참가)

 

▶ 1919년   강우규 의사, 조선총독에 폭탄

 

▶ 1919년   미국 공산당 시카고서 창립

 

▶ 1912년   시인 노천명 출생

 

▶ 1911년   일본-중국간 경봉철도 연장에 관한 협약 조인

 

▶ 1906년   드레스덴서 범게르만회의(제1회) 개최

 

▶ 1890년   프랑스인 신부 뮈텔, 조선천주교 8대 주교에 임명

 

▶ 1879년   안중근 의사 출생

 

▶ 1813년   프랑스 장군 모로 사망

 

▶ 1666년   영국 런던에 대화재

 

                 주택 13,200호 성바오로교회 등 86교회 소실 (세계 5대 화재의 하나)

 

 

 

 

[ 사진2.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45년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한 날입니다.

또한, 미국과소련 양군의 한반도 분할점령책을 발표를 하였습니다.

 

 

 

[ 사진3.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미국·소련 38도선 경계로 점령” 발표

1945년 9월2일. 이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해 8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시기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설상가상 소련마저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벼랑 끝에 몰렸다. 일본은 8월10일 연합군에 항복을 통보했다. 그리고 9월2일 일본의 도쿄만 요코하마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USS 미주리 선상에서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 외상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한국에 실질적인 광복은 8월15일 찾아왔지만 공식적으로 광복을 확인한 것은 9월2일인 셈이다.

 

 

 

[ 사진4.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바로 이날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분할 점령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분할 점령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독립의 기쁨을 누려보기도 전에 분단의 씨앗이 뿌려졌다.

 

 

[ 사진5.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한반도 분할은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의 산물이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1946년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고,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다고 봤다. 얄타회담의 합의에 따라 소련은 8월8일 선전포고와 동시에 대일전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향해 진격해왔고 한반도 진입은 금세 이뤄졌다. 8월24일 소련 극동방면군은 평양 진입에 성공했다. 소련군이 순식간에 한반도에서 세를 확장하자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을 선언하자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국은 다급해졌다.

 

 

 

[ 사진6.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한반도 점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한계선을 신속히 결정했다. 당시 미군 주둔지는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필리핀이었다. 미국 측은 소련이 이미 한반도 동북부를 차지하고 있어 서울, 부산, 인천 등의 주요 도시를 확보하기 위해 38도선 분할을 결정했다. 8월13일 분할 점령안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소련도 즉각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물밑에서 분할 점령에 대한 양측 간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9월8일 미군이 남한에 들어왔다.

 

 

[ 사진7.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은 한반도를 지리적으로 분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냉전 논리에 따라 이념적으로도 한민족을 갈라놓았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는 척 했지만 실상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지도를 펴놓은 채 군사적 편의에 따라 설정된 38선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휴전선으로 바뀐 채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를 갈라놓고 있다.

 

 

 

[ 사진8.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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