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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0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 

 

 

 

▶ 2002년   영세중립국 스위스, 190번째로 유엔에 정식가입

 

▶ 2001년   골프선수 박희정, 미LPGA 윌리엄스챔피언십 골프대회에서 우승

 

▶ 1999년   일본 대중문화 2차 개방 발표

 

▶ 1998년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제24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추대

 

▶ 1996년   배타적경제수역(EEZ)법 발효

 

▶ 1996년   유엔총회,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채택

 

▶ 1994년   참여 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 창립

 

▶ 1994년   인천 송도 해상 신도시 기공

 

▶ 1987년   보험회사 전면개방

 

▶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 4년 만에 준공

 

▶ 1983년   후세인 요르단 국왕 내한

 

▶ 1982년   소련, 국제전화 폐쇄

 

▶ 1981년   피카소 그림 `게르니카`, 미국에서 스페인으로 반환

 

▶ 1981년   폴란드 노조, 자유비밀총선 촉구

 

▶ 1980년   시리아, 리비아 통합을 공식선언

 

▶ 1980년   미국, 중공에 군사장비 판매를 허가

 

▶ 1977년   사우디, 석유무기화 재선언

 

▶ 1976년   영국-유고 여객기 공중 충돌, 탑승자 176명 전원사망

 

▶ 1974년   기니비사우, 포르투갈로부터 독립

 

▶ 1970년   상공부, 우리나라 처음으로 불량상품전시회(406개 업체 1,539점)

 

▶ 1963년   미국 흑인, 버밍햄 백인학교에 첫 입학

 

▶ 1963년   케네디 미국대통령, 앨러배마 주병(注兵)을 연방군에 편입

 

▶ 1962년   조두형군 유괴사건 발생

 

▶ 1960년   김종필 중령 등 육사 8기생 11명 현석호 국방장관에게 정군(整軍)을 건의

 

▶ 1960년   일본 NHK 등 8개 방송국서 컬러TV방송 개시

 

▶ 1960년   아베베,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

 

▶ 1957년   헝가리문제 유엔특별총회 열어 대소(對蘇)비난 37개안 결의

 

▶ 1957년   국무회의, 김포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지정할 것을 의결

 

▶ 1955년   프랑스-모로코 자치협정 조인

 

▶ 1954년   세계 청소년 교육과 구제에 힘쓰는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한국 진출

 

▶ 1953년   주한미군, 송환거부하는 14,000여명의

 

                 중공군과 84명의 북괴군 포로들을 비무장지대로 이송 시작

 

▶ 1952년   서독, 대(對) 이스라엘 배상협정(관계수복협정) 조인

 

▶ 1951년   '라쇼몽(羅生門)' 베니스영화제서 대상

 

▶ 1951년   인도, 대일(對日)전쟁 종결 선언

 

▶ 1946년   영국-소련 통상협정 런던서 조인

 

▶ 1946년   맥아더 원수, 일본 관리방침 성명

 

▶ 1946년   부산일보 창간

 

▶ 1943년   독일군 로마점령

 

▶ 1940년   나치 독일기, 영국 버킹검궁을 폭격

 

▶ 1919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 해체

 

▶ 1919년   상해임시정부, 임시헌법 제정공포. 대통령제 채택

 

▶ 1919년   사이토(齋藤)총독 문화정치 공표

 

▶ 1919년   화가 안중식 사망

 

▶ 1919년   상제르망 강화조약 체결

 

▶ 1917년   중국 광동군정부 수립. 대원수(大元帥)에 손문

 

▶ 1910년   한말의 문장가 황현 사망

 

▶ 1887년   이탈리아의 기독교민주당 대통령(1955-62) 그론키 출생

 

▶ 1860년   유대인 역사가 두부노프 출생

 

▶ 1796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 완공

 

▶ 1484년   동국통감 간행

 

 

 

 

 [ 사진2.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돈을 요구하는 어린이

유괴사건이며, 아직까지 미제사건으로 남은

조두형어린이 유괴사건이 일어난지 53년이 

되는 날입니다. 조두형 유괴사건으로 전국민이

조두형군을 찾으려 노력 하였고, 그 당시에는 무척

젊었던 여가수 한명이 "두형이를 돌려줘요"라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노래는

 대한 늬우스 뒤의 문화영화 속에 등장하여 신파극이

유행하던 당시 영화를 보기 위해 준비했던 손수건들을

미리 적시기도 하였습니다. 그 여가수의 이름이 바로

이미자였습니다.

 

 

 

[ 영상1.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당시 이미자의 노래 "두형이를 돌려줘요" ] 

 

 

 

요즘시대에서는 거리 곳곳에 CCTV나 블랙박스가 있어

사각지대에서의 범죄가 일어나도 범죄자를 찾을수 있지만,

2000년도 전까지만 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범죄의

경우에는 범죄현장을 포착하기란 불가능하였습니다.

 

 

 

 [ 사진3.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 

 

 

 

조두형군 유괴사건은 1962년 9월10일.서울시

마부구(오늘날의 마포구) 공덕동에 살던 조두형 군

(당시 4세, 1959년생)8시30분경 자택에서 약 200m

떨어진 국민학교등교하던 누나를 따라 집을 나섰고,

오전 9시경 또래친구 이정섭군과 어울려 놀다 행방불명

되었다. 이후 소식이 없자 조두형군의 부모는 경찰에

신고하였는데 처음엔 조두형군이 길을 잃은 줄 알고

미아신고 후 다음날인 9월11일 신문에 후사금 2만원

(오늘날 약 500만원)을 걸고 광고를 냈다.

 

신문광고를 낸 당일 오후 7시경, 용산에 거주하는

한 여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 여자는 조두형이의

인상착의를 물어보고 전화를 끊었으며, 다음날인 9월 12일

아침 9시에 다시 전화를 걸어 "우리집에 있는 아이가 틀림없는

두형이다. 계속 울어대서 귀찮으니 데려가라"고 전했으나

이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당시로서는 위치추적 또한

불가능했던 탓에 찾아갈 수도 없었다.

 

 

 [ 사진4.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 

 

 

 

신문광고를 낸지 사흘만인 9월13일. 정오 부근조두형군의

자택에 협박장이 도착했다. 협박장에는 서대문 우체국의

소인이 찍혀 있었으며, 내용인 즉 "아이를 찾으려면 협상하자.

현금 20만원을 준비하지 않으면 본의 아닌 비극이 생길 것이다"

 

다음날 9월14일, 두번째 협박장이 도착했다.

"현상금 20만원을 건다고 광고를 내라. 안들으면 비극을

전할 것이다" 두형군의 부모는 협박장의 내용대로 이행했고,

다음날에는 또다시 세번째 협박장이 도착했다.

 

 

 [ 사진5.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6일 오후 5시까지 장위동 경원선 구일(九一)호

전신주 앞에 돌을 쌓아 두었으니 20만원을 갖다 두어라.

 

아이는 10시간 후에 돌려보내겠다"

이에 경찰은 가짜 돈을 놔두고 대기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19일과 22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계속되는 괴전화와 허위제보로 인해 인력과

자본이 낭비되었고, 경찰은 조두형 군이 유괴당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이유는

  

 첫번째

 

광고나 신문기사를 보고 돈을 떼먹으려던 범인이 둘이나 잡혔음

 

 두번째

 

편지를 보낸 소인이 서대문, 영등포, 청량리로 각각의 필적이 모두 다른것

 

 세번째

 

진짜 유괴범이라면 이미 현상금을 건 상태라 협박을 하지 않고도 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 때문

 

 

당시 4살짜리 아이를 돈 때문에 유괴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고 때문에 언론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 조두형군을 찾기 위한 범국민적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내무부, 체신부, 문교부, 한국전력,

여성 단체들까지 조두형군을 찾기 위해 애썼다.

 

 

 

 [ 사진6. 조두형군 어린이 유괴사건 박정희 대통령 담화 ] 

 

 

 

거국적 수사에도 조두형군의 행방파악에 진전이 없자

박정희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조두형 군을 유괴한 자는 한 시 빨리 자수하길 바란다.

자수하여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더불어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박경원에게 조두형군을

찾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특별 지시까지 내렸으나

단서부족, 허위제보 속출 등의 이유로 수사에 난항을 겪은 끝에

조두형 군은 영영 찾아내지 못했다.

행방도, 생사도 알지 못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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