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30일>

 

 

 

 

[ 사진1.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 2009년   인도 마지막 왕비 갸야트리 데비 타계

 

▶ 2009년   연안호, 북한 장전항에 예인

 

▶ 2005년   MBC 음악캠프 생방송 중 성기노출 사건 발생

 

▶ 2004년   배우 출신 오기 지카게, 일본 여성 최초 참의원 의장 선출

 

▶ 2003년   빌 뮬러 미국 야구 사상 최초로 한 경기서 좌우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

 

▶ 2001년   가수 황금실씨 별세

 

▶ 2000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재선

 

▶ 1998년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제83대 총리에 선출

 

▶ 1994년   영국의 추리 ㅣ소설가 로빈 쿡 암으로 사망

 

▶ 1991년   IBMㆍ모토로라ㆍ애플 3사 ‘파워PC동맹’ 체결

 

▶ 1983년   미국-중국, 무역분쟁 종식

 

▶ 1981년   감비아 좌익 군사쿠데타

 

▶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 발표 

 

▶ 1978년   알바니아 단원(斷援)에 반발 중국 비난

 

▶ 1978년   비동맹회의, 베오그라드선언 채택

 

▶ 1977년   백건우.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

 

▶ 19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헬싱키서 개막

 

▶ 1971년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 1965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사망

 

▶ 1963년   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3개국 수뇌회담

 

▶ 1961년   신문윤리 실천요강 채택

 

▶ 1959년   대법원,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결정

 

▶ 1958년   아이슬란드 영해 12마일 확대 선언

 

▶ 1953년   역도산, 일본프로레슬링협회 결성

 

▶ 1953년   미국 상원, 한국부흥비 2억불 사용 승인

 

▶ 1952년   국제적십자총회 세균전 금지협약 가결

 

▶ 1946년   전국학생연맹 결성. 위원장 이철승

 

▶ 1940년   범미상회담, 공동방위결의를 채택(아바나선언)

 

▶ 1938년   랑군서 불교도와 회교도 충돌. 사상 3000여명

 

▶ 1935년   문고본 대명사 '펭귄북스'출간

 

▶ 1934년   부민관 기공

 

▶ 1932년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개막

 

▶ 1932년   조만식 등 평양에서 건중회 설립

 

▶ 1930년   제1회 월드컵 결승전 우루과이-아르헨티나

 

▶ 1928년   미국 조지 이스트먼 최초의 칼라영화 공개

 

▶ 1921년   소련-터어키 평화조약 성립

 

▶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평양) 발기대회

 

▶ 1913년   독일, 대군비(大軍備) 확장안 제정

 

▶ 1912년   메이지(明治)일왕 사망

 

▶ 1909년   한국 최초의 한자전(漢字典) 발간

 

▶ 1909년   파킨슨 법칙` 만들어 낸 영국의 역사가 파킨슨 출생

 

▶ 1907년   제1차 러일협약 조인

 

▶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서 맨셰비키와 볼셰비키로 분열

 

▶ 1900년   영국, 광산법 제정 소년의 지하노동 금지

 

▶ 1898년   독일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사망

 

▶ 1893년   프랑스 샴조약 체결(프랑스 메콩강 동안 획득)

 

▶ 1863년   미국 자동차왕 헨리 포드 출생

 

▶ 1818년   영국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출생

 

▶ 1771년   영국 시인 그레이 사망

 

▶ 1718년   식민지 개척자이자 종교운동가, 윌리엄 펜 사망

 

 

 

 

[ 사진2.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양팀 포지션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30년 7월30일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결승전이 치뤄진 날입니다. FIFA월드컵은 전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지구촌 축제입니다. 22명의 사람이, 68m x 105m의 공간에서, 공 하나를 놓고

 펼치는 게임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그럼 이제부터 시간을 거슬러

1930년 7월30일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결승전 현장으로 떠나보록 할까요~~^^

 

 

 

[ 사진3.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최초 우승자 ]

 

 

 

세계 축구의 진정한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로 1930년에 개최된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은 주최국 우루과이와

라이벌 아르헨티나의 싸움이였습니다. 참가팀 간의 실력 차이가 컸고, 당시 유럽 축구의 패권을 쥐고 있던 팀들이

거리가 멀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불참해 다소 맥이 빠지는 대회였다고는 하지만, 두 팀의 경기만은 달랐습니다.

 

남미를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당대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두 팀의 자존심 싸움이었기에 그 경기 수준은 당시 대회의

다른 경기에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1930년 7월 30일 몬테비데오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벌어진 이 경기는

초대 월드컵이 자랑해 하는 명승부로 역사에 남았음은 물론입니다.

 

 

 

[ 사진4.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 양립한 당대 최강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

 

영국에서 태어난 축구가 유럽을 토대로 그 입지를 굳히고 있을 1920년대 무렵, 유럽에서 넘어온 이민자들에게서 축구를 전수받은 남미는 그 나름대로 축구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그 최전선에는 바로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있었고, 성장을 거듭한 이들은 월드컵 개막에 앞서 벌어졌던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가질 정도로 빼어난 모습을 보이기에 이르렀죠.

메달을 나눠 가졌다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한데, 사실 이 두 팀 중 어느 팀이 금메달을 차지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당대 최강이었기 때문에 우루과이는 '외팔이 골잡이' 엑토르 카스트로, 페드로 세아, 엑토르 스카로네, 호세 안드라데 등 무시무시한 선수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도살자'로 악명높았던 루이스 몬티, 카를로스 페우셀레, 페드로 수아레스 등을 앞세운 아르헨티나 역시 우루과이 못지않을 정도로 화려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즉, 두 팀은 실력과 명성을 겸비한 당대의 스타군단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1930년 월드컵을 사실상 이 두 팀 중 누가 더 강한지를 가리는 대회라고 정리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대회가 개막된 이후 두 팀은 경쟁하듯 결승전까지 내달렸죠. 아르헨티나는 조 예선 전승 그리고 미국과의 준결승전에서 6-1로 크게 승리하며 결승전에 손쉽게 안착했고, 우루과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조 예선 전승으로 준결승전에 오른 뒤 유고슬라비아를 6-1로 대파했으니. 팬들은 두 팀의 파죽지세는 당연한 듯 여겼고, 그 시선은 두 팀의 결승전으로 모였습니다.

 

 

 

[ 사진5.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 공을 두고 다툰 치열한 신경전 -

 

경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빠뜨려서는 안 될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결승전에 사용할 공을 두고 다툰 이야긴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대회 공인구'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주최 측이 지목한 '인정구'의 개념이었는데, 대회 내내 잡음이 없던 이 인정구가 결승전을 앞두고 도마에 올랐습니다.

주최 측이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하겠다고 공표하자 아르헨티나가 발끈하고 나선 것입니다. 홈팀인 우루과이가 자국산 볼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편파의 소지가 있다는게 아르헨티나 측 주장의 요지였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산 축구공을 사용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죠. 그러자 이번에는 우루과이 측에서 아르헨티나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당초 예정대로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거죠.

신경전치고는 유치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강의 자리를 놓고 다퉈야 했던 당시 두 팀의 입장에서는 제법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딱히 실마리를 찾지 못하던 주최 측은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게 우루과이 축구공과 아르헨티나 축구공을 모두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형평성에 꼭 맞는 결정이었기에 두 팀 모두 더 이상 불평을 할 수 없었고 결국, 양 측은 아르헨티나산 축구공이 전반전에, 우루과이산 축구공이 후반전에 사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 사진6.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상단:우루과이(후반전) , 하단:아르헨티나(전반전) ]

 

 

 

                                             - '축구공 전쟁' 그 승자는? - 


경기 전부터 말 많았던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대격돌을 보기 위해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는 약 9만 3천여 명의 축구팬들이 운집했고, 결승전에 앞서 지독한 신경전을 펼친 두 팀의 대격돌을 지켜보기 위해 우루과이 홈 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팬도 라플라타 강을 넘어 몬테비데오에 집결해 힘을 불어넣었고요.

벨기에 출신 장 란게누스 주심의 휘슬로 시작된 이 경기에서 먼저 기선을 제압한 팀은 우루과이였습니다. 홈의 기세를 등에 업은 우루과이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상대를 몰아붙였으며, 그리고 전반 12분 만에 선제골을 잡아냈습니다. 파블로 도라도의 강력한 땅볼 슈팅이 아르헨티나 수문장 후안 보타소의 다리 사이로 빠지면서 골로 연결되었습니다. 순탄한 출발이었죠.

그렇지만, 자국산 축구공을 사용하겠다고 고집했던 아르헨티나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8분 뒤 아르헨티나는 손쉽게 동점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프란시스코 바라요의 침투패스를 이어받은 페우셀레가 우루과이 GK 엔리케 바예스트로스를 제치고 손쉽게 동점골을 만들어냈었죠.

이어 전반 37분 대회를 통해 스타로 등극한 기예르모 스타빌레가 역전골을 터뜨리며 기어이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습니다다.

득점 직후 우루과이 선수단과 관중은 스타빌레가 오프사이드였다며 반발했지만, 란게누스 주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자국산 축구공을 사용했던 전반전을 2-1로 앞선 채 마무리 지었습니다.
                                                                                              

  

 

[ 사진7.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 ]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하게 된 후반전. 반드시 뒤집겠다는 의욕을 보인 우루과이의 맹공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후반 12분 세아의 동점골로 이내 경기의 균형을 이릅니다. 세아의 득점으로 올림픽 결승전에서의 악몽이 떠오른 아르헨티나는 페우셀레, 마리오 에바리스토, 스타빌레로 이어지는 삼각편대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지만, 외려 후반 23분 산토스 이리아르테에게 강력한 중거리슈팅으로 역전골을 내줬고, 자연히 우루과이 팬들이 가득한 경기장은 환호로 들끓었습니다.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해서인지 아르헨티나는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였고, 스타빌레가 회심의 슈팅으로 골문을 겨냥했지만, 크로스바를 맞히는 불운까지 겹칩니다. 우루과이는 좀처럼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후반 44분 도라도의 크로스를 받은 카스트로가 깔끔한 헤딩골을 작렬하며 경기에 쐐기를 박습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면서 월드컵에서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를 꺾고 최후의 승자가 됩니다. 선수들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고, 팀의 승리를 지켜본 우루과이 팬들도 황홀경에 빠져들었죠. 경기 이튿날까지 몬테비데오는 축제의 분위기로 뜨거웠고, 우루과이 정부 역시 국경일로 선포하며 위대한 승리를 기념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기묘하게도 아르헨티나산 축구공을 사용했던 전반전과 우루과이산 축구공을 사용했던 후반전의 내용이 판이했다는 점이 참 흥미롭습니다. 지금도 우루과이는 당시 결승전에 사용했던 두 나라의 공을 박물관에 전시하며 후세에 전하고 있으며, 축구공이 경기 결과에 영향을 끼쳤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확실한 점은 두 팀의 자존심 싸움은 월드컵이 낳은 첫 번째 명승부로 역사의 첫 줄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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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9일>

 

 

[ 사진1.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결혼 ]

 

 

 

▶ 2010년   40년간 우리 모두들 웃긴 "원맨쇼 1인자" 코미디언 백남봉씨 별세

 

▶ 2009년   덩샤오핑 부인 줘린 여사 타계

 

▶ 2009년   귀화한국인 이참 관광공사 사장 임명

 

▶ 2002년   박희정, 미 LPGA투어 사이베이스 빅애플클래식에서 LPGA 진출 후 첫 우승

 

▶ 2002년   법륜 스님, 막사이사이상 평화부문 선정

 

▶ 2000년   변종하 화백 별세

 

▶ 1990년   몽골 최초의 자유선언 실시, 인민혁명당(공산당) 승리

 

▶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 5개월간 핵실험 중지 발표

 

▶ 1983년   영국 영화배우 데이비드 니븐 사망

 

▶ 1983년   인도 미그27기 생산

 

▶ 1983년   공격형 헬기대대 창설 추진

 

▶ 1981년   바니 사드르 이란 대통령 프랑스로 망명

 

▶ 1981년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결혼

 

▶ 1980년   바누아투, 영국-프랑스로부터 독립

 

▶ 1978년   베오그라드서 비동맹제국 외상회의 개막

 

▶ 1975년   미주기구(OAS) 대 쿠바봉쇄 해제 결의

 

▶ 1967년   미국 항공모함 포레스탈호 통킹만서 화재. 인명 261명-비행기 29대 손실

 

▶ 1966년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 1965년   김해서 군인 30여명 난동 경찰서 습격하고 기자 납치

 

▶ 1965년   서해안에 큰 해일(인천 개항이래 최대)

 

▶ 1964년   계엄령(6월3일) 해제

 

▶ 1961년   동독, 서독으로의 피난민 유출방지 조치를 강화

 

▶ 1960년   제5대 국회의원(민의원-참의원) 선거

 

▶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발족

 

▶ 1955년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씨로 결론

 

▶ 1952년   국회 특별위, 중석불 사건 조사결과 발표  

 

▶ 1948년   한국, 첫 하계올림픽 출전

 

▶ 1946년   전승(戰勝) 연합국대표 21개국 파리서 국제평화회의 개최

 

▶ 1942년   문학평론가 김현 출생

 

▶ 1921년   히틀러, 나치스당 당수 선출

 

▶ 1905년   국제연합 제2대 사무총장을 지낸 다그 함마셸드 출생

 

▶ 1905년   가쓰라 . 태프트 밀약

 

▶ 1894년   청일전쟁중 첫 육상교전이 성환-수원에서 전개됨

 

▶ 1890년   빈센트 반 고흐 사망

 

▶ 1856년   독일 작곡가 슈만 사망

 

▶ 1836년   파리 개선문 완공

 

▶ 1835년   영국 정치가 미첼 토마스 새들러

 

▶ 1588년   영국 해군, 스페인 무적함대 격파

 

 

 

 

[ 사진2.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다정한 모습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 된 영국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의 결혼부터

다이애나의 사망까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사진3.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결혼 ]

 

 

1961년 영국의 명문 귀족가문인 스펜서 백작의 1남 3녀의 막내딸로 내어난

다이애나는 런던의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 1981년 7월29일 세인트 폴 성당에서

찰스왕세자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 사진4. 영국 찰스 황태자-다이애나 결혼 ]

 

 

애초에 찰스는 다이애나의 언니인 새러와 교제를 했으나 여왕의 권고와

다이애나의 청순함에 반해 그녀를 일생의 반려자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다이애나는 결혼 1년만에 윌리엄을 2년 후에는 아들 해리를 낳았습니다.

찰스에게는 결혼 전부터 왕실 시종무관의 부인이였던 카밀라 파커 볼스가 있었습니다.

 

 

 

[ 사진5. 다이애나  ]

 

 

다이애나와 찰스 사이가 원만치 않은 것은 1986년경부터 였으나, 결정적으로 금이 간 것은

1992년  다이애나가 자신의 결혼생활을 포함한 영국왕실에 관한 내용의 <다이애나-그녀의 진실>을

발간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이어 영국왕실은 다이애나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했고, 영국의 대중지들은

찰스와 카밀라의 관계를 폭로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그 결과 1992년 12월 두 사람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별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사진6. 다이애나  ]

 

 

별거중인 1994년 7월 찰스는 TV에 출연해 자신이 카밀라와 혼외정사를 가졌음을 시인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왕실근위대 소속 휴이트 대위는 다이애나와의 5년의 '관계'를 폭로했습니다.

급기야 엘리자베스여왕은 이혼을 권고했고, 1996년 8월 다이애나는 이혼을 하면서

'the princess of wales(왕세자비)' 라는 공식함을 유지한 채 위자료로 2천2백50만달러를 받게 됩니다.

 

 

 

[ 사진7. 다이애나  ]

 

 

다이애나는 이후 공식 활동에 주력을 했고, 에이즈, 암, 심장병 연구를 포함한 다양한 봉사활동에

나섰으며, 특히 대인지뢰 추방 국제캠페인에 적극 관여해 앙골라, 보스니아를 순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 8월31일 다이애나는 당시의 연인이였던 이집트 재벌2세 "도디 알 파예드"와 파리에서

파파라치의 추격을 피하려 고속 질주하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 사진8. 다이애나 침실 성적표 ]

 

 

 '존 F 케네디 주니어 10점 만점, 찰스 1점',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생전에 잠자리를 함께한

남성들에 대한 '침실 성적표'를 몰래 매겼던 것으로 드러 났습니다. 시사 주간 슈피겔 등 독일 언론은

다이애나의 최측근이였던 시몬 시먼스가 최근 펴낸 '다이애나, 마지막 이야기' <사진>이라는 책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습니다.

 

 

 

[ 사진9. 다이애나  ]

 

 

시먼스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증세를 보이던 다이애나의 인생 상담역을 해 주던 절친한 친구로써,

그는 다이애나가 애인들과 은밀한 정사를 나눈 뒤 들려 준 평가 점수를 공개했습니다.

10점 만점을 받은 사람은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외아들인 존 F 케네디 주니어였습니다.

그는 피플지가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꼽을 만큼 매력과 지성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95년 1월 뉴욕에서 이뤄졌고, 당시 총각으로 시사잡지 조지의 발행인을 맡고 있던 케네디 주니어는

다이애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기 전이였습니다.

 

 

 

'Death of Princess Diana'

 

 

 

[ 사진10. 다이애나 교통사고 지점 ]

 

 

이집트 재벌 2세와의 염문으로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아온 다이애나는 "파파라치"의 집요한 추적을

벗어나려다 변을 당했습니다. 다이애나와 연인 도디 알 파예드는 30일 오후 도디의 리츠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벤츠 600 승용차편으로 호텔을 나섰고 파파라치들은 오토바이로 이들을 추적했습니다.

다이애나 일행은 센강 북안의 강변도로를 타고 달리다 알마교 밑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5~6명의 파파라치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집요하게 달라붙자 갑자기 속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통제력을 잃은 운전사는 중간 기둥과

터널벽을 차례로 들이받았습니다. 슈베느망 프랑스 내무장관은 사고 당시 메르세데스는 시속 1백km로 달리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엄청난 충돌 충격으로 승용차의 앞부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됐으며,

맨 앞부분의 라디에이터가 승용차 앞 좌석 승객에게까지 뚫고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 사진11. 다이애나 교통사고 현장 ]

 

 

'카드가 아니라 인생을 가지고 도박을 해요.'

 

다이애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말처럼 그녀는 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사랑을 찾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만 바빴던 철없는 왕세자비가 아니라, 지뢰반대 운동에 참가해 몸소 지롸밭을 걸으며

세계평화를 희망했고, 인도 캘커타죽음의 집을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왕궁과 대중매체를

 뛰어넘어 국민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사진12. 다이애나 생전에 활짝 웃는 사진 ]

 

 

그러나 그녀는 1997년 8월31일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을 했습니다.'다이애나 사랑을 찾아서'의 저자 앤드루 모튼은

"성취와 행복을 위한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하려는 순간 삶을 마감했다" 고 말했습니다.

또한, 힐러리 클린턴은 "다이애나는 삶이 자신을 바닥에 쓰러뜨릴 때마다 다시 일어서서 꿋꿋이 나가갔던

용기와 끈기를 보여준 여성이다" 라고 찬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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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8일>

 

 

 

 

[ 사진1. 제1차 세계대전 ]

 

 

 

 2010년   파키스탄 최악의 항공 참사… 악천후 속 여객기 추락, 탑승자 152명 전원 사망

 

▶ 2004년   현대자동차의 누적 수출대수 1000만대 돌파

 

▶ 2004년   농촌운동가이자 용신봉사상 제1회 수상자인 이한옥 여사 별세

 

▶ 2003년   미국 사이클선수 암스트롱 ‘투르 드 프랑스’서 5연패 달성

 

▶ 1992년   중요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 예능보유자 문육지씨 별세

 

▶ 1990년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에 취임

 

▶ 1989년   하세미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에 선출

 

▶ 1989년   11호태풍 쥬디, 경남 부산지역 강타 20명 사망 실종

 

▶ 1985년   가르시아 페루 대통령에 취임, 40년 만에 평화적 정권교체

 

▶ 1984년   제23회 LA올림픽

 

▶ 1983년   북한 청진항 중국에 개방

 

▶ 1981년   한국-인도네시아 해상화물 분담에 관한 해운협정 체결

 

▶ 1981년   정부, 교육세 신설

 

▶ 1980년   영국-사우디 외교관계 재개 합의

 

▶ 1980년   첫 여성기술사(박광자, 정영선) 탄생

 

▶ 1979년   한국 레슬링선수단에 몽고서 첫 비자

 

▶ 1978년   경북도교위 가짜교사 자격증사건 관련 74명 구속

 

▶ 1976년   중국 당산 지역 진도8.2 지진 24만여명 사망

 

▶ 1971년   사법파동 시작     

 

▶ 1968년   핵분열 발견으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 화학자 오토 한 사망

 

▶ 1961년   혁명재판 개정

 

▶ 1957년   멕시코시와 아카폴코 부근에 지진

 

▶ 1953년   제1차 판문점 정전회담 개최

 

▶ 1946년   북조선노동당 결성(위원장 김일성)

 

▶ 1945년   미국 B25폭격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에 충돌. 14명 사망

 

▶ 1945년   미군 B29기 일본 중소도시 폭격 격화

 

▶ 194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해체

 

▶ 1937년   화북주둔 일본군, 총공세를 개시 북경 점령

 

▶ 1928년   제9회 암스테르담 올림픽 개막

 

▶ 1926년   미국-파나마동맹조약 성립

 

▶ 1914년   1차대전 시작

 

▶ 1902년   철학자 칼 포퍼 출생

 

▶ 1902년   미국, 프랑스 파나마운하회사로부터 파나마에 대한 권리를 4천만불에 매수

 

▶ 1887년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마르셀 뒤샹 출생

 

▶ 1858년   대서양에 해저전선 매설작업 시작

 

▶ 1821년   페루,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804년   독일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 출생

 

▶ 1794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 화성(현재의 수원) 기공

 

▶ 1794년   로베스피에르 처형 

 

▶ 1750년   바흐 사망

 

▶ 1741년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 사망

 

 

 

 

[ 사진2. 제1차 세계대전 ]

 

 

 

오늘의역사 이 시간에는

1914년 세기의 전쟁으로 알려진 제1차대전에

대해서 포스팅 해보려 합니다.

 

 

 

[ 사진3. 제1차 세계대전 ]

 

 

 

사라에보사건을 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그의 부인인 조피(Sophie Chotek)가 세르비아계의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1894~1918)에게 암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 사진4. 제1차 세계대전 ]

 

 

 

사건의 배경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로 보스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오랜 기간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오스만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고양되었다. 특히 슬라브인들에게는 오스만제국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남슬라브 단일국가를 건설하자는 범슬라브주의가 확산되었고, 19세기 초반 두 차례에 걸친 봉기로 오스만제국에게서 자치권을 획득했던 세르비아가 그 중심에 있었다.

 

 

 

[ 사진5. 제1차 세계대전 ]

 

 

 

러시아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러한 범슬라브주의를 지원했다. 1877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제국은 산스테파노조약으로 이스탄불을 제외한 모든 유럽의 영토를 잃었다.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루마니아가 독립했고 불가리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자치권을 얻었다.

 

 

 

[ 사진6. 제1차 세계대전 ]

 

 

 

그러나 열강들의 개입으로 발칸반도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제국의 서부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반도로의 동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고, 지중해 지역과 중앙아시아 등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 마침내 유럽의 열강들은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산스테파노 조약을 수정했다. 그 결과 불가리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다시 오스만제국으로 반환되었으며,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를 동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려고 했으며, 1908년에는 보스니아를 완전히 병합했다.

 

 

 

[ 사진7. 제1차 세계대전 ]

 

 

 

이러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책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했으며, 이 지역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나 ‘검은 손(Crna ruka)’ 등 범슬라브주의에 기초한 비밀결사가 1910년 이후에 잇달아 구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 사진8. 제1차 세계대전 ]

 

 

 

사건의 경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내 조피와 함께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그 날은 그들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에게 점령국 황태자 부부의 방문은 애초부터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날은 세르비아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 비투스 축일(Vidovdan)이자, 세르비아왕국이 오스만제국에 패한 코소보 전투가 벌어진 치욕의 날이라 세르비아인들의 반감은 더욱 커진 상태였다. 이에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비밀결사인 ‘검은 손’은 이들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 사진9. 제1차 세계대전 ]

 

 

 

열차를 타고 보스니아에 도착한 대공 부부는 오전 10시를 조금 지난 시각에 일행과 함께 4대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처음에는 무하메드 메드메흐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1886〜1943)가 총으로 대공 부부를 저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계획이 실패했다. 그러자 네델리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1895〜1916)가 차량 행렬에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대공 부부가 탄 차가 지나간 다음에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대공 부부는 무사하고 뒤 따르던 차에 타고 있던 12명만 부상을 입었다. 암살에 실패한 차브리노비치는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경찰들에게 곧바로 체포되었다.

 

 

 

[ 사진10. 제1차 세계대전 ]

 

 

 

대공의 행렬은 속도를 높여 시 청사로 갔다. 시청에 도착한 대공 부부는 일정을 바꿔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위문하러 병원으로 갔다. 그러나 도중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임신 중이던 조피는 복부에 총을 맞았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머리에 총을 맞았다. 대공 부부를 살해한 프린치프는 독을 마시고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 사진11. 제1차 세계대전 ]

 

 

 

사건의 영향

대공 부부를 살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세르비아계의 학생으로 비밀결사인 '검은 손’의 일원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암살에 사용한 폭약과 권총 등이 세르비아 정부에게서 지급되었다는 자백이 나왔다.

 

 

 

[ 사진12. 제1차 세계대전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며 7월 23일에 세르비아에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반대하는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그 단체들과 관련된 관리들을 해임하며, 암살과 관련된 모든 자들을 처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관리가 세르비아에서 이를 조사할 수 있게 허용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통보한 48시간 이내에 세르비아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리자, 1879년 오스트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은 독일이 러시아에 총동원령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본격화하였다.

 

 

 

[ 사진13. 제1차 세계대전 ]

 

 

 

한편, 대공 부부의 암살에 가담한 네델리코 차브리노비치, 다닐로 일리치(Danilo Ilić), 미하일로 요바노비치(Mihaijlo Jovanović) 등은 모두 징역 16년에서 교수형에 이르는 형을 받았다. 대공 부부를 직접 저격해 살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20세가 넘지 않은 미성년이어서 교수형을 면하고 징역 20년의 형을 받았으나, 1918년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 사진14. 제1차 세계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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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7일>

 

 

 

 

[ 사진1. 6.25 전쟁 휴전 협정 ]

 

 

 

 

[ 영상1. 6.25 전쟁 휴전 협정 ]

 

 

 

▶ 2009년   박세직 향군회장 별세

 

▶ 2005년   행정계층구조 개편을 위한 주민투표 제주에서 첫 실시

 

▶ 2005년   美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 발사

 

▶ 2003년   미국 코미디언 밥 호프 별세

 

▶ 2002년   정부 `항공기운항 안전법` 시행결정. 기내 휴대폰·흡연 벌금 최고 100만원

 

▶ 2002년   우크라이나 에어쇼에서 저공곡예 전투기가 관중석 덮쳐 83명 사망

 

▶ 1999년   "해방신학" 대가 카마라 주교 별세

 

▶ 1998년   클린턴 미국대통령 섹스 스캔들과 관련, 클린턴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르윈스키양이 특별검사에게 실토

 

▶ 1996년   집중호우로 군부대 매몰

 

▶ 1996년   애틀랜타 도심 올림픽공원서 폭탄테러 - 2명 사망, 110명 부상

 

▶ 1991년   콘돌호 통일쌀 5천톤 북송

 

▶ 1989년   대한항공 여객기, 리비아 트리폴리항공에 착륙중 추락 (사망-실종 80명, 부상 119명)

 

▶ 1989년   살아있는 사람의 간이식 수술 세계최초로 성공

 

▶ 1985년   63빌딩 준공

 

▶ 1981년   경남 거창서 신석기시대 지석군 발견

 

▶ 1981년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남북체육회담 개최 촉구

 

▶ 1980년   팔레비 전 이란국방 사망

 

▶ 1976년   중국 당산에 강진 65만명 사망

 

▶ 1976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일본수상, 록히드사건으로 구속

 

▶ 1974년   미국 하원 사법위 닉슨대통령 탄핵 결의

 

▶ 1972년   AFP통신, 임표(林彪) 쿠데타사건 보도

 

▶ 1969년   양평서 시외버스 남한강 추락, 50여명 사상

 

▶ 1965년   고 이승만 전대통령 장례식

 

▶ 1965년   미군기 월맹미사일기지 첫 폭격

 

▶ 1963년   박정희 의장, 민정(民政) 이양 일정 발표

 

▶ 1961년   한국-니제르 국교 수립

 

▶ 1956년   야당계 민의원 지방선거에 대한 관권개입 규탄(국민주권옹호투쟁위 결성)

 

▶ 1955년   오스트리아 독립

 

▶ 1954년   베트남, 제네바협정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

 

▶ 1953년   6.25전쟁 휴전협정 조인

 

▶ 1950년   공산군, 하동서 진주방면으로 침입(채병덕소장 전사)

 

▶ 1949년   최초 제트여객기 "코맨" 비행 성공

 

▶ 1945년   영국 총선거(26일)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애틀리 내각 성립

 

▶ 1938년   서울 시장에 가격표를 붙인 상품 등장

 

▶ 1917년   스위스의 외과의사 코허 사망 - 1909년 갑상선 연구로 노벨상 수상

 

▶ 1915년   평남북에 대홍수

 

▶ 1914년   주시경 선생 사망

 

▶ 1909년   舊 한국은행 조례 공포

 

▶ 1907년   보안법 공포

 

▶ 1894년   갑오경장 단행

 

▶ 1877년   "자장가 변주곡"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도흐나니 출생

 

▶ 1862년   신소설 작가 이인직 출생

 

▶ 1844년   근대 물리과학의 창시자 돌턴 사망

 

▶ 1830년   프랑스 7월혁명 (~7.29)

 

▶ 1498년   무아사화 일어남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6.25전쟁 휴전협정에 대해서 포스팅 해드리겠습니다.

 

 

 

 

[ 사진2. 6.25 전쟁 휴전 협정 ]

 

 

 

6·25가 발발한지 만 3년1개월, 휴전협상개시 2년여 만인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유엔측 대표 해리슨 중장과 북한 대표 남일이 18통의 휴전협정문서에 서명했다.

 

 

 

 

[ 사진3. 6.25 전쟁 휴전 협정 ]

 

 

 

무기휴회 상태였던 휴전협상이 타결을 볼 수 있었던 것은 1953년 3월 1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공산측이 부상병포로 우선교환에 합의해왔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도 휴전협정 후에도 한국을 계속 방위하겠다고

언명하면서 협상을 촉구했다.

 

 

 

 

[ 사진4. 6.25 전쟁 휴전 협정 ]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4월 12일 성명을 통해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주장했고

국회도 4월 21일 북진통일을 결의했다. 6월 8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되자 9일부터

 전국적으로 격렬한 데모가 잇따랐고 이 대통령은 6월 18일 반공포로 2만7천명을 석방했다.

 

 

 

 

[ 사진5. 6.25 전쟁 휴전 협정 ]

 

 

 

6월 22일 이 대통령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회담을 갖고 한국정부의

휴전협정 동의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중국군 즉시 철수,

제네바정치회담의 시한설정 등 3개항을 제시했다.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로버트 특사를 한국으로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연내에 체결하다"는 조건을 제시하고 7월 24일

휴전협정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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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4일>

 

 

 

 

[ 사진1. 이승만대통령 내외가 살았던 이화장 ]

 

 

 

2010년   윤필용 사건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 별세

 

2005년   토튼햄 핫스퍼스, 피스컵 우승

 

2005년   김인경 US여자주니어 골프 우승

 

2000년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 오픈 우승 ( 최연소 그랜드슬램 달성)

 

1993년   러시아, ()루불 지폐 사용금지 발표

 

1988년   김용강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 휴전성명 발표

 

1977년   지탄역서 열차충돌 160여명 사상

 

1974년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사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974년   포르투갈, 헌법 제1조를 폐기해 해외영토의 독립을 승인

 

1974년   경향신문, MBC에 흡수통합

 

1959년   닉슨-흐루시초프, 부엌논쟁

 

1951년   미국의 발명가 알버트 반스 사망

 

1951년   정부, 탄핵재판소 구성

 

1948년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취임

 

1945년   부민관에서 폭탄 폭발사건 발생. 대한애국청년당, 부민관에 투탄의거

 

1934년   작가 이상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재 시작

 

1929년   부전조약(不戰條約) 발효

 

1927년   일본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龍之介) 자살

 

1923년   연합국-터키간에 로잔강화조약 조인 (그리스-터키전쟁 종결)

 

1915년   이스트랜드 증기선 시카고강서 전복 812명 사망

 

1908년   청년터키당 혁명 (익년 황제 폐지)

 

1907년   제3차 한일협정 (정미7조약) 조인

 

1907년   광무 신문지법 제정

 

1901년   한발로 전국에 방곡령 발포

 

1897년   여성 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 출생

 

1886년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출생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57년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 출생 -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

 

1853년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델랑드르 출생

 

1841년   노르웨이 의학자 헨리크 한센 출생

 

1837년   영국 런던서 전신메시지

 

1802년   프랑스 작가 앙리 뒤마 출생

 

1689년   송시열, 서거

 

▶   612년   을지문덕 살수대첩(고구려 구양왕22)

 

 

 

 

 

[ 사진2. 이승만 대통령 ]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 5월 31일 초대 국회 개원,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초대 국회 제33차 본회의에서 무기명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개표결과 180표로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이 1표를 얻었다.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선출됨에 따라 이날 국회 주최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리게 됐다. 

7월 27일 국회에 출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이윤영을 지명했으나 

인준이 부결됐고 2차 지명을 받은 이범석이 8월 1일 인준을 받았다. 

 

 

 

 

 

[ 사진3. 이승만대통령 내외가 살았던 이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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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3일>

 

 

 

[ 사진1. 태조 왕건 ]

 

 

 

▶ 2009년   폴크스바겐, 포르쉐 인수

 

▶ 2005년   동해 총기탈취사건 검문하던 임종민 병장 무면허차량에 치어 사망

 

▶ 2002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가자시티 공습. 15명 사망·150명 부상

 

▶ 2001년   대한변호사협회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법치주의에서 후퇴했다"는 결의문 채택

 

▶ 2001년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탄핵으로 대통령직 정지

 

▶ 2001년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에 취임

 

▶ 1999년   주가 사상최대 71.70포인트 폭락

 

▶ 1995년   유조선 씨프린스호, 전남 여천군 해상에서 좌초

 

▶ 1985년   남북국회회담 첫 예비접촉(판문점)에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

 

▶ 1985년   미국-중국간 핵협력협정 승인

 

▶ 1984년   관보 제1호 발행

 

▶ 1983년   바이타브락 제2봉 세계최초 등반 성공

 

▶ 1982년   국제포경위원회, 포경전면금지를 결정

 

▶ 1982년   일본정부, 방위력증강 5개년계획(83-87) 확정

 

▶ 1978년   서울 시내버스 한강대교서 추락 33명 사망, 13명 부상

 

▶ 1974년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7년 만에 민정복귀

 

▶ 1972년   미국, 최초의 실험용 지구자원탐사위성 랜드새트 1호 발사

 

▶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서 사상 최대 흑인폭동

 

▶ 1967년   터키에 연 2일 대지진 사상자 수천명 발생

 

▶ 1962년   미국 텔스타통신 위성통해 첫 TV 우주중계

 

▶ 1961년   한국-코트디부아르 국교 수립

 

▶ 1956년   바둑인 조치훈 출생

 

▶ 1952년   이집트서 쿠데타 발생, 나기브준장 실권장악

 

▶ 1951년   페탱 옥중 사망

 

▶ 1951년   기록영화의 선구자 로버트 플라어티 사망

 

▶ 1938년   총독부, 교원-관공리에게 제복 착용 지시

 

▶ 1936년   "홍도야 우지 마라" 초연(初演)

 

▶ 1931년   소파 방정환 별세

 

▶ 1930년   이탈리아, 나폴리서 대지진. 2534명 사망, 4264명 부상(6000여 사상)

 

▶ 1926년   항일투사 박열의 일본인 애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옥중 자살(의문사)

 

▶ 1925년   일제, 한국서의 좌익운동자 대량 검거

 

▶ 1916년   영국의 화학자 램지 사망 - 네온·아르곤·크립톤·크세논 등 4가지 비활성 기체를 발견

 

▶ 1907년   도쿄 유학생팀과 기독교청년회원팀의 우리나라 최초의 농구 공식경기 훈련원에서 열려

 

▶ 1906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제3회 범미(汎美)회의 열림

 

▶ 1904년   현대 공중보건 서비스의 기초를 세운 영국의 의사 사이먼 사망

 

▶ 1903년   포드자동차 첫 판매, "모델 A"

 

▶ 1894년   대원군, 입각해서 국정참여

 

▶ 1885년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북군 총사령관을 지낸 미국의 장군, 미국 제18대 대통령(1869-77 재임) 율리시스 그랜트 사망

 

▶ 1856년   인도의 사회운동가 발 간가다르 틸라크 출생

 

▶  918년   왕건, 고려 건국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여러분들도 역사드리마에서 만났었던

고려를 건국한 태조왕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글을 읽고, 쓰다 보니 예전에 역사드라마 본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최수종의 "태조왕건ㅎㅎㅎ"~~^^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년~943년, 재위 918년~943년)

 

왕건(王建)은 개성일대의 호족세력 출신으로 신라 말엽 후백제와 후고구려 등의 후삼국이

일어났을 때 철원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태봉의 궁예 예하에 들어가서 공을 세워서

자리를 굳히고 시중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궁예가 민심을 잃으면서 신숭겸, 배현경,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이를 지원하다 대구의 팔공산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창(지금의 안동지역)전투에서 반격을 가하여

승리함에 따라서 대세를 잡았고, 935년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자진해 935년 항복하고 견훤의

부자간 내분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어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그는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자력으로 달성한 민족통일이였습니다.

이어서 거란에 의하여 멸망한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명신상부한 민족통일을

달성하였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세력을 형성하며 호족세력을 연합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척과의 통혼정책을 취하여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근친혼을 선호하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호족세력의 비대화와 외척세력의 대두, 근친혼의

성행은 필연적으로 왕위세습과정에서 호족세력과 자식들간의 왕위를 차지하기 투쟁을

야기 할 수밖에 없어 왕권의 위협으로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치열한 혼란은 5대 광종을

거쳐서 성종대에 가서야 안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사진2. 태조 왕건 ]

 

 

- 왕건의 출생 -

왕건(王建)은 신라말엽이던 877년 한주 송악군에서 사찬(沙湌)인 융()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의 탄생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서해의 용왕의 딸과 혼인하여 왕건을

낳았다고 하며 이런 이유로 왕씨일족의 겨드랑이에는 대대로 용의 비늘의 돋아났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나중에 유학이 들어오며 윤색이 가해져 당나라 황제(숙종)가 왕자 시절에 한반도를

유람하던 중에 아들을 얻은 것이 바로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라는 전설도 왕건의

신성화를 위해 덧붙여진 것일 겁니다. 왕건의 탄생과 관련하여 <<고려사>>에는 풍수도참설에

관한 전설이 전하여 옵니다.

 

융이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 송악산의 남쪽기슭에 집을 짓고 살고 있을 때 마침 당대에

도참설의 최고권위자이던 도선(道詵)국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 기장을 심을 터에 어찌하여 삼을 심었는가?”

이 말을 들은 융의 부인이 남편에게 달려가서 이 말을 전하여 융은 급히 도선을 찾아

달려가 다시 듣기를 청하니, “내가 일러주는 대로 집을 지으면 내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이를 얻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이라고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 사진3. 도선국사 영정 ]

 

그리고 이어서 융은 도선이 주는 봉투를 받고는 한 번 절하고 그가 시킨대로 집을 짓고

살자 10달 후에 낳은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었으니 8771월 이였습니다.

그리고 민지가 지은 <<편년통록>>에 의하면 도선은 왕건이 17세 때에 다시 송악산을 찾아와

당신은 혼란할 때에 상응하여 하늘이 정한 명당에 태어났으니 삼국 말세의 백성들은 당신이

구제하여 줄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알리고,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는 병법과

유리한 지형을 선정하고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법과 산천형세를 보고 이치를 아는 법 등

각종 술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마는 넓고 툭 튀어

나왔으며, 턱의 살이 쪘다, 목소리가 우렁찼다라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 후삼국 시대 - 

후삼국 시대(892~936)892년 견훤이 전라도 광주를 점령하고 왕을 칭한 때부터

936년 고려가 한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44년동안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10세기 초에 이르면서 농민불만의 폭발로 신라는 완전히 통치권을 상실하게 되어서

궁예가 세운 태봉과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신라는 경주의 주변만을

간신히 유지하는 형세가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후삼국시대라고 부릅니다.

 

호족을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은 각자 커다란 토지, 사병을 거느리고 백성과 토지를

지배하고 조세와 부역을 징발해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 중앙에 도전하여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농민들은 신변의 안전도 보장을 받지 못하고 착취의 대상이

될 뿐인 국가에 숭종하기 보다는 반란군이나 초적, 군도 등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방을 지키던 군진(軍鎭)세력도 무장을 갖춘 상태이다 보니 관병이 아닌

사병으로 해상세력으로 변질되어서 지방세력의 군사적인 배경이 됩니다.

 

후삼국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써는 기훤, 양길, 견훤, 궁예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벌주에서 태어난 견훤은 이씨라고 알려져 있으나, 견훤의 후손이 지었다는

<<이비가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 진흥왕의 증손자인 각각

작진이 왕교파라는 여성을 아내로 맞아 각간 원선이고 이 사람이 아자개입니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경북 상주 가은현의 농민이었으나 후에 장군이 되었는데 견훤은

그의 장자입니다. 견훤은 체구가 장대하고 무예가 출중한 그는 혼란한 정국을 이용하기

위하여 무장이 되고 서남해의 변방에서 비장으로 세력을 형성하여 나갑니다.

 

궁예는 애꾸눈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월래 신라의 왕족 출신입니다.

그는 제47대 헌안왕이나 제48대 문경왕과 궁녀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두가지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런데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55일 단오날 태어났는데

당시에 지붕에 긴 무지개 같은 흰빛이 하늘까지 닿았다고 합니다.

 

이에 일관이 중오일에 태어난 것이 이상하고 이상한 빛이 하늘에 서려 있으니

장래 국가에 화근이 될 아이입니다.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됩니다.” 하여 왕은 자객을

보내 죽이게 하였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자객은 포대기에 쌓여진 아이를 빼앗아 마루아래로

던져 버립니다. 이때 아이를 기르던 유모가 몰래 숨어 있다 받아 궁예는 간신히 사는데

받으면서 잘못해 실수로 눈을 찔려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모는 궁예를 안고 신분을 감추고 몰래 숨어서 사는데 궁예가 장난이 심하자 하루는

궁예를 부른 뒤 정색을 하고는 궁예의 전력을 그 내력을 이야기 하자. 이에 궁예는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영월에 있는 세달사에 들어가서 중이 되어 살았습니다.

 

궁예는 승려생활을 하며 자신의 꿈을 펴려고 궁리를 하던 어느날 절에 제사가 있어

바리떼를 들고 법당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어 입에

물고 가던 것을 바리떼 속에 떨어 뜨리고 날아갑니다. 주워 이를 자세히 살펴보니

점을 치는 물건이였습니다.

 

이상하여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임금 왕()자가 씌어져 있어 이를 본 궁예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구나하며 불경대신 무예닦기에 열중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성여왕이 즉위하였는데 정부인 위흥 각간과 놀아 나고 정사를 맡기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반란세력이 준동하자 자신의 꿈을 세우기 위해 891년 죽주(지금의 안성)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기훤을 찾아가서 의탁을 하나 기훤이 거만하고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고 홀대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기훤의 부하들과 함께 양길에게 투항을

하니 양길은 그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후대를 하여 자신의 군사를 궁예에게 내주어

승려생활을 하여 지리적인 지세를 잘 아는 복원동쪽의 지역을 공략하게 하였습니다.

 

궁예는 승려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치약산 석남사에 진을 치고 주천.내성 등 10여성을

차지하고 894년 명주(지금의 강릉)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고 군사의 수가 35백명 정도

되자 양길로부터 손을 끊고 철원을 거점으로정하고 다음해 관직을 정하여

국가체계를 갖춥니다. 그리고 이즈음 개성뿐만 아니라 예성강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호족인

왕건부자가 896년에 궁예 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궁예는 왕륭을 금성태수로 삼고 맏아들

 왕건에게는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는 그곳 성주로 삼습니다.

 

이들이 궁에 밑으로 들어가면서 궁에는 송악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였고,

898년에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양길과 싸워 물리치면서

충청, 경기, 황해, 강원 등을 아우르는 신라북부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901년 고구려는 부흥과 신라타도를 외치면서 후고구려라 칭하고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나 궁예는 국력이 강화되면서 후고구려라는 이름대신 마진을 택하고 905

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바꿉니다.

 

이리하여 완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견훤이 후백제를 칭하고 양길의 부하에서

홀로 선 궁예가 후고구려를 내걸면서 한반도는 구세력인 신라와 함께 후삼국시대를

열어 장패에 돌입하여 나중에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세나라를 통일하기까지

무려 35년간 삼국간 대립기간을 거칩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가진 것은 후백제인데 후밷제는 정규군 중심으로써

나주지역을 제외한 전라도 전 지역과 경상도 진주, 합천 서남부지역, 동으로는 상주,

북으로는 청주와 공주를 석권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시킵니다.

후백제는 주로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떨친데 비해 태봉은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북부 등 주로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펴는데 이는 그의 무리들이 호족세력과

초적의 무리가 연합을 해 결성되다가 보니 당연한 결과라고 할것입니다.

 

견훤(甄萱)은 전라도 전 지역과 충청도의 일부지역을 평정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궁예와는 화친을 하면서 신라를 공략해 통일을 이루겠다는 구상이었으나 그의

생각은 번번히 궁예의 부하장수이던 왕건의 해상세력에 의하여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당시 왕건은 궁예의 부하가 되어 광주, 청주, 당선(경기 남양), 괴양(괴산) 등을

평정하여 아찬으로 승진을 하고 903년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후에 나주)으로

가서 10여 군현을 공략하고 보루를 쌓아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진도마저

확보합니다. 특히나 그는 전함들을 이끌어서 나주를 근거로 하여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며 궁예세력의 확장에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의 활약에 힘입어서 궁예는 북으로는 대동강유역, 동남으로는 낙동강유역, 서남쪽으로는

나주를 거쳐 멀리 진도까지 판도를 넓힙니다. 당시 궁예는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왕건의 해상활동에 힘입어 한반도를

평정하루 수 있는 길을 선점하기에 이르릅니다.

 

 

- 왕건의 고려 건국(918) -

그런데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자신의 세력을 과신하고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하는데 시하들은 모반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죽이고, 궁녀와 후궁은 간통을 저질렀다면서

죽이고, 자신의 부인과 아들까지 죽이는 지경에 이르자 신하들은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여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미륵보살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청광보살, 인광보살이라고 부르게 하고

관심법이라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행위가 거듭되면서 부인이 이를 나무라자 궁예는

부인 강씨도 음행을 저지른 것으로 몰아붙입니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을 저지르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부인은 어이가 없어서, “어찌 제가 그러한 일을 하겠습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네 마음을 궤뚫어 보아 알수가 있느니라

하면서 불에 달구어진 무쇠 방망이를 가지고 와 음부에 넣어서 죽이고 그래도 분이

안풀려서 자신의 두 아들까지 데려와 죽이었는데 이때가 915년이였습니다.

궁예가 이처럼 죽인 것은 자신의 권력을 반대하거나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데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 모두 불안에 떨었는데 왕건도 이에 불안을 느껴 914년 나주로 내려가서 이를 피하고

나주지역을 다시 확보합니다. 그런데 궁예가 왕건을 궁에 부릅니다.

그대가 어젯밤에 사람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그대는 나를 속이지 마라! 나는 능히 사람의 마음을 궤뚫어 볼수 있다.지금 곧 정신을

집중시켜 그대의 마음을 궤뚫어 보리라궁예는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이때 최응이 짐짓 붓을 일부러 떨어뜨리고는 이를 줍는 척하면서 왕건에게 귀속말로

속삭입니다. “장군! 복종하기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와집니다.”

이어 왕건은 역모를 인정하였습니다.

사실은 제가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궁예는 웃는 낯으로 말하길.

그대는 과연 정직한 사람이다. 다시는 나를 속이려 들지 마라

 

궁예는 왕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왕건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더욱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반역할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궁예의

이러한 행동은 왕건과 주위 사람들의 위기감을 더욱 자극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왕건의 예하 장수들 복사귀(지겸), 홍술(), 백옥(배현경), 삼능산(신숭겸) 4기장이 권하자

왕건이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자 부인유씨가 갑옷을 찾아 왕건에게 옷을 입혀 주면서

출정하도록 하자 왕건은 비로소 왕성을 향하여 진군하였씁니다.

 

왕건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궁예는 길게 탄식을 하면서 혼자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왕건이 그렇게 하였다면 나의 명은 끝났구나!”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왕건과 싸워보았자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는 변복을 하고 궁성을 몰래

빠져나가 목숨을 건졌으나, 민심을 잃은 그는 강원도 포천 명성산 등을 전전하면서

숨어 지내다가 배가 고파 남의 보리이삭을 잘라먹다가 들켜서 강원도 평강에서

살해되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왕건은 9186월 왕위에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搜)라고 하니

이것이 후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건국이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움에 따라

새나라는 정치적인 안정과 민심수습을 착수하였으니, 그를 찬동하는 세력도 있었으나 잇달아

환선길 등 불만세력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다음해에 왕건은 궁예의 연고지인 철원에서

자신의 연고지인 개성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신라와 친교를 유지하고 후백제와도 일시적인 휴전을 모색하였으며

고려가 호족들로 구성되어서 이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 호족들과 혼인을 통하여 우호세력을

확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관제를 개혁해 국가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후백제 견훤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자 축하사절을 보내

고려와는 유화책을 취하면서 약한 신라를 먼저 멸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상하에

920년 견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사를 무주로 보내자 신라 경명왕은 고려에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고려에서 김율을 보내자

견훤은 바로 철병하였습니다. 또한, 견훤은 경애왕 원년 924년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성과 문소성 군사로 안동부근의 조물성을 공격하지만 성사람들의 필사적인 방어와

왕건 지원에 힘입어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견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음해 견훤이 3천명을 몰아 조물성을 다시 침략을

하나 왕건이 대응을 하였으나 실력을 가릴 수 없어 휴전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926년 견훤이 볼모로 고려에 보냈던 진호가 돌연 사망하자 견훤은 변사로

인정하고 고려의 인질 왕산을 살해하고 대군을 공주로 보내 고려를 침공 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고여 개국 초 후백제와 휴전을 모색하나 낙동강 서부 일대에서 쉴 새 없이

다툼을 계속하였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는 지방호족들의 독자적으로

고려나 후백제로 통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두 나라 모두 중국과 통교를 하며 일종의

외교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고려는 초기에 후백제에 비하여 열세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 경주를 침입하여 약탈하고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앉히어

신라 사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왕건은 경주를 방문해 신라 귀족의 환심을 삽니다.

이로 인하여 경상도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에 항복하면서 호족들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 왕건, 공산성전투(927)에서 견훤에게 패하다.-

 

 

 

 

 

 

태조 10년 왕건은 대구 공산성전투에서 견훤에게 포위되어 전세가 위급해 지자

신숭겸은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왕건을 탈출시킨 후 어차를 타고 적진을 향하여

돌진합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알고 집중 공격을 하여서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김락장군도 전사하게 됩니다.

 

 

 

 

 

 

 

- 왕건, 고창전투(930)로 승리를 잡는다. -

9297월 견훤은 갑병(甲兵) 5천여명을 거느리고서 의성부를 공격하였고, 왕건의

충실한 지지자이던 성주 홍술을 전사시켰습니다. 이어 영주를 침범하고, 문경과 고창군을

포위하는데, 이에 왕건이 그해 12월 친히 군사를 이끌고 고창을 구하기 위하여 출전합니다.

고려군은 사실 전투가 벌어질 당시 대구 공산성전투에서 패배한 전력도 있고 하니,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개국공신 홍유와 시중 공훤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하여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이 길로 죽령으로는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사전에 길을 닦아 두는게 좋겠습니다.”

하면서 미리 도망갈 길을 제안하자, 유금필이살길을 생각하지 말아야 승부를 결정할 수

있는데 싸우기도 전에 패배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반박하자

왕건은 유금필의 손을 들어줄 정도였으니 고려군의 사기는 매우 떨어진 상황이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당시 이 고장 고창의 성주이던 김선평(金宣平), 행장이던

권행(權行 또는 ), 향민이던 장길(張吉)은 잘 아는 사이였는데 성민들을

이끌고 와서 고려군에 가세하여 힘을 보태었습니다. 김선평은 이 지역 사람이라

지리에 밝았습니다.

 

고려군이 먼저 병산(甁山)에 주둔하고, 견훤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을

대치하는데 거리가 500m정도로 근접하여 대치하였습니다. 당시 전설에 의하면 와룡면의

서지동과 송현동일대 등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전투에서 견훤은

간신히 혈로를 뚫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고려는 이 전투에서 백제군과 맹렬히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는 고려군에게 향후 삼국간의 싸움에 승기를 제공한 것으로

의의가 있는데 후백제의 시랑이던 김악(金握)이 생포되고 전사자가 8천여명이나 되었습니다.

견훤은 패배하자 군사를 돌려서 순주를 공격해 민가를 약탈하여 돌아갔고, 왕건은 이

전투에서 승기를 잡으면서 고려와 후백제 사이를 관망하던 신라 성주들이나 장군들이

급속히 고려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하게 됩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승리 후 비로소 후백제와의 관계에서

열세를 극복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차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견훤의 신라침력과 팔공산 전투에 대한 성과이기도 합니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왕건이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하는 왕건에게 지지를 보낸 것입니다. 견훤은 경주에 침입을 하여서 경애왕을 지결케

하고 왕비와 후궁들을 욕보이며 노략질을 하고 왕제 효렴과 재상 영경 등 인질들을 잡고

능묘를 파헤치고 수많은 재물을 노략질하여 돌아갔습니다.

 

이후에도 수시로 신라의 변경을 침입해 위협을 가하며 신라인들에게 적대감을 심어주었던

반면 고려는 신라가 위급할 때 마다 도와주도록 하여 고려와 가까워지게 하였을 뿐,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해 천하의 인심을 잃어 대권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경순왕은 931년 사신을 보내 하례하며 회견을 청하자 그는 기병 50여명만을

대동하고 신라의 금성을 방문하자 경순왕은 임해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줍니다.

왕건은 경주에서 10여일을 보낸 후에 돌아오는데 경순왕은 혈성까지 따라 나와서

왕건을 환송합니다. 그는 신라를 방문해서 상당한 호감을 주었는데 신라인들은,

옛날에 견훤이 왔을 때는 늑대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니

부모를 뵈온 것 같다.” 하며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신라인의 마음을 샀습니다.

 

반면에 후백제는 932(태조15) 견훤의 심복이던 장군 공직이 왕건에게 귀부하였는데

그는 월래 신라 출신으로 신라가 혼란스러워지자 후백제에 항복하여 견훤 부하가 된

자였으나 견훤이 무도하다며 아들과 함께 고려에 귀부한 것이였습니다. 왕건은 공직의

요청으로 일모산성(문의)을 쳐서 함락시키자 견훤은 이를 보복하기 위해 해군을 보내

고려의 예성강을 공격하였으나 왕건은 염주, 배주, 청주에서 배 1백여척을 불사르고

저산도의 목마 3백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933년 견훤은 장자 신검에게 군사를 주어 청도지역의 습산성과 경주지역의

아불진 등지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건은 후백제가 다시 경주를 침입할 것을

우려해 정남대장군을 보내 의성부를 지키던 유금필을 보내 신라를 보호하게 합니다.

유금필은 신검군사를 도중에 만나는데 후백제군은 이들을 보자마자 도망쳐 습산성을

구하고 귀로에 신검군사를 만나 장수 7명을 사로잡아 개선하였습니다.

 

9349월 왕건은 견훤과 운주에서 만나 일전을 치르는데 이 싸움으로 웅진이북 30여성이

자진하여 귀부하였습니다. 이 중 능주와 운주는 월래 전에 태봉국이였으나 후백제쪽으로

돌아선 곳인데 이를 다시 회복한 것으로써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고려와 후백제가 다투는 가운데 후백제의 국내 정세는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견훤은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전실부인으로부터 신검, 양검,

용검을 두고 후실 소생인 넷째아들인 금강을 두었는데 견훤은 적자인 신검을 태자로 삼지않고

금강을 태자로 삼습니다.

 

그러자 이찬 능환이 아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충동질하여 완주출신 40여명을 주축으로

935년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김제에 있는 금산사에 유폐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견훤은 6개월 후 막내아들 능예, 딸 애복, 애첩 고비 등과 몰래 금산사를

탈출합니다. 왕건은 첩자를 통하여 견훤의 귀순의사를 확인하고는 유금필 등에게 전함

40척을 나주에 보내어 개경에서 견훤을 맞이합니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라 부르고

극진히 대우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명목만 유지하던 신라의 경순왕은 후백제의 압박과 내정파탄에

견디지 못하고 93511월 신료들과 함께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고 시랑 김봉휴를 보내서

항복의사를 밝힙니다. 왕건이 복속을 허락하자 경순왕 김부를 낙랑왕으로 봉하고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를 시집보내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후에 고려5대 경종의

왕비가 됩니다.

 

견훤과 함께 왕건은 후백제 공격에 나서는 당시 고려군 875백명 이었는데, 이중

70%가 지방세력과 발해유민이고 왕건 중앙군은 15천여 명일 정도로 호족세력의 지원이

절대적이였습니다. 고려 중군에 흑수부의 철리부 여진기병이 95백명이나 되었는데

북방정책의 효과를 보여주기로 합니다. 이들은 일선군의 일리천을 마주하고서 대치합니다.

 

이때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이 견훤에게 항복을 하였고, 고려군이

공격을 하자 후백제군은 사기가 떨어져 도망을 치기 시작하고 일부는 창을 거꾸로 겨누자

신검은 급히 완산주로 도망을 칩니다. 고려군이 황산의 탄령을 넘어서자 항복을 합니다.

 

왕건은 신검을 살려주고 용검과 양검은 귀양을 보냈다가 참형에 처하는 한편

견훤은 자신에게 배반을 한 능환을 참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왕건의 나이는 60세로

고려를 세운지 19년만에 통일을 이룹니다. 견훤은 왕건이 신검을 살려주고 사로잡은 후

작위를 주는데 사로 잡은 백제 군사는 모두 풀어 줍니다. 견훤은 이것을 분하게 여겨서

번민을 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게 됩니다.

이로써 태조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 왕건의 최후 -

왕건은 제위 26년째인 9434월 병석에 눕게 되는데 대광 박술희를 불러서

후세 국왕들에 대한 고려의 통치이념과 방향을 남깁니다. 박술희에게 군국의 일을 맡기고, 병상을 지키던

재상 염상과 왕규, 박수문에게 기무를 맡깁니다. 943529일 왕건은 신덕전에 나아가

학사 김악에게 유언을 작성케하고 6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죽어서 현릉에 묻히고 앞서 죽은 제1비인 신혜왕후와 합장됩니다.

 

 

 

 

 

그는 죽기 직전 신하들에게 나는 죽는 일을 집에 돌아가는 일처럼 여기고 있다.

 슬퍼할 것 없다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오열을 참지 못하자

 생명이 덧 없음을 모르느냐?” 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궁예의 밑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발탁되었고, 고려를

세운 뒤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이나 통일 후에도 항상 남을 배려하여 살았고 화해와 타협을

기조로 살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물이 "태조 왕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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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2일>

 

 

 

[ 사진1. 노르웨이 폭탄 테러범 아르네스 베링 브레이비크]

 

 

 

▶ 2011년   노르웨이 살인마 브레이비크 (오슬로 정부청사 폭탄테러)

 

▶ 2009년   61년만의 최장 일식

 

▶ 2003년   한국 샴쌍둥이 자매 민사랑, 민지혜(생후4개월) 분리수술 성공

 

▶ 2000년   G8 (서방선진 7개국 + 러시아) IT헌장 채택

 

▶ 1999년   그린벨트 제도개선책 발표

 

▶ 1991년   제프리 다머의 광적인 살인극 `밀워키 호러` 발각

 

▶ 1989년   육군본부 신도안 새 청사 현판식(충남 논산군 두마면)

 

▶ 1983년   이스라엘-중국, 군원(軍援)협정

 

▶ 1983년   폴란드, 19개월 만에 계엄령 해제

 

▶ 1983년   북한 왕재산 경음악단 결성

 

▶ 1982년   한전, 원전 9-10호기 터빈발전기 등 6억달러 공공차관 도입계약 프랑스와 체결

 

▶ 1982년   정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기술과 관련 시정을 일본정부에 강력 요구

 

▶ 1980년   정부투자기관 산하기관 127개의 임직원 1,819명 강제해직 발표

 

▶ 1979년   매독 검사법을 개발한 미국의 면역학자 칸 사망

 

▶ 1976년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한반도문제 해결에 4자회담, 교차승인, 유엔동시가입 등 제의

 

▶ 1975년   마이크로소프트사, 세계 첫 마이크로컴퓨터 공급 계약

 

▶ 1972년   유럽 자유무역권 형성

 

▶ 1972년   소련 무인탐색선 비너스8호 금성 착륙

 

▶ 1971년   새 공해방지법 발효

 

▶ 1968년   체코주둔 소련군 철수 완료

 

▶ 1961년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 발표

 

▶ 1961년   경제기획원 신설

 

▶ 1955년   "카사노바" 박인수 1심 무죄

 

▶ 1950년   전남에 계엄령

 

▶ 1950년   언론출판에 특별조치령 공포

 

▶ 1950년   한국은행권, 국내 발행 유통

 

▶ 1950년   비상향토방위령 선포

 

▶ 1946년   미국 브레튼우즈서 연합국 경제회의 개회

 

▶ 1946년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결성

 

▶ 1946년   볼리비아 쿠데타, 비랴로엘 대통령 교수형

 

▶ 1943년   총독부, 학도전시동원체제 확립요강 시달

 

▶ 1934년   "신화적 갱스터" 딜린저 사살

 

▶ 1916년   연극인 이해랑 출생

 

▶ 1911년   안악(安岳)사건 공판 열림(안명근.김구 등 105인 유죄판결)

 

▶ 1907년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 등 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체포

 

▶ 1906년   이인직의 "혈의 누" 만세보에 연재 시작

 

▶ 1898년   모빌 조각을 창시한 미국의 조각가 콜더 출생

 

▶ 1822년   유전학자 멘델 출생

 

▶ 1784년   별의 위치를 측정한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 출생

 

▶ 1254년   몽고 차라대의 제1차 고려침입

 

▶ 124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의 위임을 받은 수도사 오한네스 데플라노 카르피니, 몽골 도착

 

 

 

 

[ 사진2.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노르웨이에서 가슴 아팠던 일에 대해서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많은 희생자를 나왔던 사건인데 그 살인범은

징역21년을 받았다는 내용을 읽고 나니, 너무 화가 나서 기사를 올립니다.

무고한 민간인 77명 죽이고 징역21년이라니,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인지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는군요.

 

지난 2011년 7월22일 평화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끔직한 테러가 일어났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을 총기와 폭탄으로 살해해 세계에 큰 충격을 던진"살인마"가 있었습니다.

바로 노르웨이의 극우주의자 아르네스 베링 브레이비크입니다.

 

 

 

[ 사진3.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브레이비크는 지난 2011년 7월 22일 오슬로의 정부청사 인근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켜 8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우퇴위아 섬에서

총기를 난사해 69명을 살해한 바 있습니다.

 

 

[ 사진4.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최근 노르웨이 현지언론은 "브레이비크가 자신의 인권을 침해받고 있다는

이유로 노르웨이 정부를 고소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을 폭력으로 앗아간 사람이 자신의 인권을 주장하는

역설적인 이 소송은 오슬로 법원에 접수됐고,

 

 

 

[ 사진5.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브레이비크의 변호인 외위스테인 스토비크는 "수감 중인 브레이비크가

 경비원과 의료진하고만 이야기할 정도로 극심하게 고립돼 있는 실정" 이라면서

"면회 제한과 편지 검열을 당하고 있어 유럽인권헌장에 보장된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 사진6.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현재 브레이비크는 77명을 살해한 혐의로 21년형을

선고받고 4년째 일라 교도소에 수감 중입니다.

그가 이렇게 낮은 형량을 받은 이유는 사형제가 없는 노르웨이에서는

21년이 법정 최고형이기 때문이죠.
이에 대해 교도소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 사진7.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사회에서 격리된 브레이비크가

교도소 내에서도 격리된 것은 다른 재소자들이 공공연하게

그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

이같은 이유로 교도소 측은 신변 안전을 위해 보통의 재소자 15명에게 들어가는 예산을

브레이비크 한 명에게 쓸 정도로 특별대우하고 있다고 합니다.

 

 

 

[ 사진8. 노르웨이 폭탄테러 현장 ]

 


그러나 브레이비크의 인권 타령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지난해 브레이비크는 법무부에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를 3로 바꿔달라" ,

"편안하게 게임을 즐길 수 있게 소파로 바꿔달라" ,

"성능 좋은 에어콘으로 교체해달라" 는 요구를 한 바 있고 합니다.

 

                                                                                                                    출처 : 나우뉴스 박종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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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21일>

 

 

 

 

[ 사진1. 제네바 협정 ]

 

 

▶ 2005년   중국, 위안화 2.1%전격 절상

 

▶ 2003년   한국양궁 제42회 세계선수권 대회서 15년째 우승 달성

 

▶ 2003년   한희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서 첫승

 

▶ 1998년   미국 최초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 사망

 

▶ 1997년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에 이회창 대표 선출

 

▶ 1996년   서울소년분류심사원 소년원생 150명 탈주

 

▶ 1994년   토니 블레어, 영국 제1야당인 노동당 당수로 당선

 

▶ 1993년   우리나라 위성방송 전송방식 `디지털`로 결정

 

▶ 1983년   택시 시간거리 병산제, 운전사 기록전산화, 전자미터 설치 등 교통안전기본계획을 확정

 

▶ 1983년   중국, 상해 등 외국인에 개방

 

▶ 1983년   우리나라 위성방송 전송방식 `디지털`로 결정

 

▶ 1981년   유엔안보리,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에 48시간내 전투행위 중지결의안 채택

 

▶ 1980년   비타르 전 시리아 수상 파리서 피살

 

▶ 1979년   카터 주한미군 철수 계획 수정

 

▶ 1978년   낙동강 연안 종합개발 착수

 

▶ 1977년   이집트-리비아, 국경지대서 군사충돌

 

▶ 1970년   제3차 한미국방장관 회담

 

▶ 1969년   미국 국무성, 대 중국 완화정책 발표

 

▶ 1969년   경인고속도로 전구간 개통

 

▶ 1968년   미국 현대무용 혁신가 세인트 데니스 사망

 

▶ 1964년   싱가포르서 중국인과 말레이지아인의 유혈충돌사건 발생

 

▶ 1961년   미국 유인로케트 발사 성공(제2호)

 

▶ 1960년   스리랑카의 반다라나이케, 세계 첫 여성 총리로 선출

 

▶ 1959년   세계최초 미국 원자력상선 사반나호 진수

 

▶ 1958년   대구 부정투표사건 고발

 

▶ 1956년   정부, 재일교포 북송에 국제적십자사에 항의

 

▶ 1954년   제네바 협정 조인

 

▶ 1951년   당인리발전소 5000kw 발전 시작

 

▶ 1949년   이스라엘-시리아 휴전협정 조인, 19개월 전쟁 종식

 

▶ 1944년   미군, 괌도 상륙

 

▶ 1941년   일본-프랑스, 인도방위협정 체결

 

▶ 1941년   독일 최초로 모스크바 공습

 

▶ 1932년   캐나다 오타와서 대영제국 경제회의 개막

 

▶ 1932년   영국제국 경제회의, 영국연방내의 특혜관세제도 채택(블록경제 형성)

 

▶ 1908년   영국, 포클랜드제도 보호령 선언

 

▶ 1899년   헤밍웨이 출생

 

▶ 1885년   청.일軍 "텐진조약" 따라 철병

 

▶ 1831년   벨기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 1816년   세계 최초의 통신사인 `로이터 통신사`의 창설자 로이터 출생

 

▶ 1792년   스코틀랜드 시인 번즈 사망

 

▶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함대 대해전

 

 

이 시간 오늘의 역사에서는

제네바 협정에 대해서 포스팅 해드리겠습니다.

 

 

           

 

          [ 사진2. 제네바 협정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결을 논의하던 제네바 회담 도중

                                 프랑스군 거점 디엔비엔푸가 56일간의 사투 끝에 1954년 5월 7일

                                      북베트남에 함락되면서 제네바 회담의 속도도 빨라졌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5년 9월 호치민이 독립을 선언했으나

                             2차대전 발발로 일본에 베트남을 빼앗긴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베트남 재정복을 목표로 1945년 10월에 남부를 점령한데 이어

                                             1946년 11월에 북부를 무력공격하면서 시작됐다.

 

 

 

[ 사진3. 제네바 협정 ]

 

 

프랑스군 9만5000명과 베트남인 130만의 생명을 앗아간

9년간의 전쟁에 프랑스 국민들도 진절머리를 내며 휴전을 원하고 있었다.

7월21일, 3개월에 걸친 회담 끝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프랑스·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가 조인 당사국이었고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강대국들도 회담에 참여, 자신의 입장을 내세웠다.

 

 

 

[ 사진4. 제네바 협정 ]

 

 

회담에서 북베트남 대표는 베트남의 즉각 독립, 모든 외국군 철수,

통일선거 실시 등 8개항을 주장했으나 강대국의 중재로 프랑스가

제시한 안(案)이 채택됐다. 북위 17도선을 잠정 군사경계선으로

북은 호치민이, 남은 프랑스가 지원하는 바오다이가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또 남북통일선거를 1956년에 실시하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남베트남 정권이

 이를 거부하면서 베트남은 새로운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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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18일>

 

 

 

 

[ 그림1.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칭송받은 의자왕(義慈王) ]

 

 

▶ 2005년   이미나, BMO 캐나디언오픈 우승

 

▶ 2004년   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 2004년   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 2002년   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 1995년   김대중, 신당창당 공식 선언

 

▶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 1990년   윤보선 전 대통령 별세

 

▶ 1989년   강수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 1986년   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 1983년   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 1983년   일본 중의원 해산

 

▶ 1983년   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 1982년   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 1982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 1981년   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 1976년   코마네치, 모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 1973년   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 1970년   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 1968년    인텔 창업

 

▶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 1965년   송추에 무장간첩침투

 

▶ 1963년   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 1963년   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 1962년   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 1956년   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 1952년   중석불사건, 국회서 말썽 조사위 구성

 

▶ 1949년   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 1944년   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 1921년   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글렌 출생

 

▶ 1919년   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신궁 세움

 

▶ 1918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출생

 

▶ 1907년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청년회원 등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 1907년   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 1907년   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 1895년   불가리아 독재 정치가 스탐볼로프 사망

 

▶ 1885년   영국-청나라 아편협정 체결

 

▶ 1872년   멕시코의 대통령(1861-72 재임) 후아레스 사망

 

▶ 1635년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 출생

 

▶ 1401년   신문고 설치

 

▶  660년   백제 의자왕 항복, 멸망

 

 

오늘의 역사 이시간에는 백제의 멸망과

삼천궁녀로 유명한 백제의 의자왕에 대해서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 그림2. 사비성 ]

 

 

백제의 멸망을 알기 위해서 5세기로 거슬러 올라 가 봅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깁니다. 그 후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475)를 옮기면서 대외교류가 위축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죠.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며, 문주왕 때는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며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사회가 안정되면서 다시 국력을 회복합니다. 538년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부여 사비성으로 옮기며 대외교류도 활발해 지고 나라의 진흥을 꾀합니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빼앗긴 한성을 되찾고자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수복하지만, 연합 했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게 되죠. 이때가 551년 즈음입니다. 성왕은 이에 복수하고자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맞서 싸우지만 전사합니다.

이후 무왕과 의자왕으로 이어지는 백제는 신라를 점령하기도 하지만 결국 660년 멸망하지요. 

구체적인 것은 아래를 보시겠습니다..

 

 

 

 

[ 사진3. 의자왕의 충신 성충 ]

 

 

 

백제의 흥망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전사까지 하게 된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혼인을 통해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551) 복수를 위해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554)하고 말았다.

 

 

[ 사진4. 의자왕의 충신 흥수 ]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백제는 이 때 금성 부근까지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이던 연개소문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목적이 신라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자, 대당 외교가 아니라 신라와 직접 군사 대결을 시도하여 659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돌궐-고구려-백제-왜 와, -신라의 십자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백제에 대한 당나라의 군사 개입을 불러왔다. 김춘추의 외교 담판으로 당나라는 6606월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그림5. 백제의 멸망을 초래한 황산벌 전투 ]

 

 

백제의 부흥운동과 후백제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부터 936년 동안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를 다시 세웠다. 그러나 견훤이 세운 백제는 역사가 짧고 본래의 백제와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이를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 사진1/그림6. 삼천궁여의 벽화와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던 부여의 낙화암 ]

 

 

 

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 "KBS TV, 역사추적"이 심층취재로 반영

 

‘KBS TV, 역사추적’이 20081220. 백제의 멸망을 불러온 의자왕(義慈王) 항복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멋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여기서 밝힌 새로운 사실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사비성을 장악했던 당나라 군대는 사비성을 빼앗고 의자왕을 사로잡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빠르게 사비성에 당도할 목적으로 사비성 외곽의 모든 성들을 그냥 지나쳐 사비성으로 내달렸다. 당군은 곧바로 사비성을 공략하여 궁성을 장악했으나 의자왕은 사비성에 없었다.

 

의자왕은 사비성 외곽의 네 성을 지키며 아직 굳건한 백제 병력으로 적이 차지한 사비성을 포위할 작전을 세웠다. 당시의 전력으로 볼 때 충분히 승산있는 전략이었다. 임진성은 흑치상지가, 옹진성은 예식장군이 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의자왕은 예식장군이 지휘하는 웅진(지금의 공주) 산성에 머물며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당군은 빠르게 사비성에 당도할 목적으로 말을 몰아 달렸기 때문에 군량을 비축하지 못했었다. 또한 사비성에 있던 식량창고는 전황 중에 모두 불탔다. 당군은 외곽의 포위 속에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으며 유일한 방책은 신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것인데 백제로 들어오는 길목은 모두 백제군이 지키며 공급로를 차단했다. 실제로 식량을 구할 방도를 찾으러 사비성을 나왔던 일천명의 당군이 모두 전멸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철옹성이라고 불렸던 지방 각성이 아직도 건재한 가운데 나당연합군에 대항할 전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느닷없는 항복으로 백제역사를 마감한 것에 대해서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웅진성의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의 소정방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의자왕을 위협하고 사로잡으려 하자 의자왕은 격렬히 저항하다 자결을 시도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 ‘조선상고사’에도 백제 장수 모반으로 인해 의자왕항복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재선생의 저술에는 “옹진성 수비책임자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으려 하자 의자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잘라지지 않아 살아있는 왕을 예식장군이 데리고 당의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당의 역사서를 해석했다.

 

당나라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의자왕 항복에 관련된 기술내용에는 예식장군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왕 보다 아랫사람인 예식장군의 이름을 유례없이 먼저 기록한다는 것은 예식장군이 항복을 주도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술된 내용을 한글자 한글자 해석하면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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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15일>

 

 

 

 

[ 사진1. 싸이 강남스타일 ]

 

 

 

 

[ 영상1. 싸이 강남스타일 ]

 

 

 

▶ 2013년   노량진 지하공사장 수몰사고 7명 사망

 

▶ 2012년   파나마, 무기류 위장수송 북한선박 청천강호 억류

 

▶ 2012년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 "강남스타일" (앨범 "싸이 6갑" 수록) 발표"

 

▶ 2009년   이란 여객기...168명 숨져

 

▶ 2009년   서울-춘천 고속도로 개통

 

▶ 2003년   산악인 한왕용씨, 세계 11번째-한국인으로서 3번째 히말라야 14개봉 정복

 

▶ 1998년   고려대 천준 교수, 새 암치료법 미국 특허 획득

 

▶ 1997년   패션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 피살

 

▶ 1997년   울산시, 울산광역시로 승격

 

▶ 1994년   자크 상테르 EU 집행위원장으로 산출

 

▶ 1994년   이부영 위원, "김일성 조문발언" 파문

 

▶ 1987년   대만, 38년 만에 계엄령 해제

 

▶ 1983년   목포에 해양박물관 건립

 

▶ 1982년   인도 대통령에 자일 싱 당선

 

▶ 1982년   잠실운동장 야구장 준공

 

▶ 1981년   중국, 인민공사 전면철폐

 

▶ 1980년   임진왜란때 영남동부지방 의병기록인 동계실기 원본 발견

 

▶ 1980년   솔라즈 하원의원, 미국의원 최초로 평양 방문

 

▶ 1979년   멕시코의 대통령(1964-70) 디아스 오르다스 사망

 

▶ 1976년   잠수교 개통

 

▶ 1974년   그리스계 키프로스군 쿠데타. 마카리오스 탈출

 

▶ 1968년   중학입시제 폐지-중학교 평준화

 

▶ 1968년   동독, 서백림(西伯林) 통행제한조치 발효

 

▶ 1964년   극단 "토월회" 조직한 박승희씨 별세

 

▶ 1958년   이라크 신정권, 아랍연맹 해체를 선언

 

▶ 1957년   미국, 주한미군에 핵무장화 착수 발표

 

▶ 1953년   창경원 일반 공개

 

▶ 1950년   국군, 제2군단 창설

 

▶ 1949년   병역법 국회 통과

 

▶ 1939년   알리 하메네이 이란 대통령 출생

 

▶ 1939년   일본,국민징용령 시행

 

▶ 1933년   서울-동경 직통전화 개통

 

▶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 개설

 

▶ 1915년   조선은행 ‘하얼빈지점’ 개점

 

▶ 1913년   안악회사건 판결공판에서 윤치호-양기택-이승만-안국태-옥관빈에 6년 선고, 기타는 무죄

 

▶ 1912년   중국, 손문 등 제2혁명 발발

 

▶ 1906년   중국 여성혁명가 추진 처형

 

▶ 1904년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 사망

 

▶ 1902년   한국-덴마크 수호조약 체결

 

▶ 1900년   경인간 최초로 전화 개통

 

▶ 1896년   국내철도규칙 반포

 

▶ 1886년   프랑스 문학평론가 자크 리비에르 출생

 

▶ 1879년   독일. 보호관세법 공포

 

▶ 1855년   강우규 의사 출생

 

▶ 1606년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출생

 

▶ 1439년   조선, 개기월식 발생

 

▶ 1393년   조선, 월식 발생

 

▶ 1099년   제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점령

 

 

 

 

 

[ 사진2. 싸이 강남스타일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세계적인

글로벌 스타로 뜬 싸이(본명:박재상)에 대해서 포스팅 하겠습니다.

 

 

 

 

[ 사진3. 싸이 강남스타일 ]

 

 

 

◇헐리우드 톱스타와 나란히
싸이는 2012 MTV 비디오 뮤직어워드 (VMA) 무대에 올랐는가 하면, NBC 투데이쇼에 출연했다. 이른 아침부터 구름 떼처럼 몰린 사람들은 홀린 듯 강남스타일을 따라 불렀다. 또 엘런 드제너러스 쇼에 출연해 팝스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도 말춤을 췄다. 또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생방송에 출연했다.

SNL의 크루로 활동중인 바비 모이니핸, 빌 헤이더, 테런 킬럼이 각각 싸이와 노홍철, 유재석 역할을 맡아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속 모습을 재현하며 흥을 돋웠다. 이어 싸이가 등장해 원조 말춤과 뚱한 표정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선보였다. 싸이는 제 2의 저스틴 비버로 불리며 스타성을 반증하고 있다. 싸이의 친구는 어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쟁쟁한 헐리우드 스타다. 톰 크루즈는 싸이에게 먼저 트위터 팔로우 신청을 남겼고, 조셉 고든 래빗, 패리스 힐튼 등 많은 스타들은 트위터를 통해 싸이를 언급하며 열광적인 팬이 됐다고 알렸다. 본 조비는 싸이와 찍은 사진을 자랑스레 올렸고, 케이티 페리는 싸이의 볼에 키스까지 날렸다. 강남 스타일은 각종 패러디 영상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이 노래와 말춤에 전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 사진4. 싸이 강남스타일 ]

 

 

 

◇강남 스타일이 세운 기록
지난달 25일 가진 귀국 기자회견에서 싸이는 “데뷔 12년만에 진짜 전성기를 맞았다. 강제 미국 진출이라는 수식어도 생겼다. 말도 안 되는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 얼떨떨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3억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유튜브 영상 상위 100개 중 8월 첫째주부터 2~3위에 랭크됐으며, 5주 연속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이 뮤직 비디오를 본 사람 중 286만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조회수의 1/100을 넘어가는 수치다. 이로 인해 기네스북 세계 레코드 기록까지 인정받았다. 지난달 15일에는 미국 아이튠즈 싱글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하고, 캐나다, 체코, 뉴질랜드, 홍콩 등 34개국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휩쓸고 있다. 또 미국 빌보드 차트 소셜 50부분에서는 싸이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 차트는 유튜브, 트위터 등 SNS에서 많이 거론되고 이슈를 모은 노래를 집계하는 차트로, 강남스타일이 전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 미국 빌보드 핫 100차트에 11위로 진입 후 단숨에 2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빌보드는 9월 27일 현재, 싸이가 1위까지 한 걸음 남았다며 곧 1위가 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 사진5. 싸이 강남스타일 ]

 

 

 

◇싸이의 성공 비결은?
싸이가 “단지 유튜브에 뮤직 비디오를 올렸을 뿐”이라고 말했듯 싸이가 글로벌 스타로 도약한 것은 SNS의 힘이 컸다. 전 세계인이 한 채널을 통해 의견을 나누면서 파급효과가 커진 것. 태생이 B급이라고 말하는 싸이는 그만의 코드 B급 문화로 소통했다.

전세계를 사로잡은 키워드는 유머다. 강남스타일은 웃기고 즐겁지만 심각하지 않다. 불황 속 대중 심리를 가볍게 자극한다. 싸이가 미국 방송에 출연해 말한 ‘Dress Classy, Dance Cheesy(옷은 고급스럽게, 춤은 저렴하게)’라는 멘트는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말 한마디가 이슈가 되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세계적 뉴스가 되며, 그가 내뱉은 말이 어록으로 불리며 화제가 되고 있다. 미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모에 옷은 제대로 차려 입은 모습, 제대로 차려입고 엉뚱한 말춤을 추는 모습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특유의 표정과 말투, 당찬 모습과 뻔뻔함, 유머러스한 점이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했다.

싸이는 북미, 유럽, 일본 등 각국의 취재진이 구름 떼처럼 몰린 기자회견 장에서 무반주로 말춤을 출 정도로 재치가 넘친다. 또 싸이는 수많은 공연을 통해 무대 매너를 갖고 있는 무대 위에서 빛나는 가수다. 또 뻔뻔한 말투 뒤에는 유창한 영어실력이 뒷받침 되어있다. 싸이는 보스턴 버클리 음악 대학 출신으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버클리에 대해 언급하자 그는 ‘4년 내내 1학년(freshman)이었다’며 재치 있는 답변을 했다. 또  ‘당신의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냐’는 파파라치의 물음에 웃으며 ‘알코올’이라고 답하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싸이, 그 이면에는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이 조화를 이뤄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 사진6. 싸이 강남스타일 ]

 

 

 

광고계 블루칩으로 떠올라
광고 업계는 싸이와 계약을 맺기 위해 싸이 쟁탈전을 치르고 있다.
싸이 ‘강남스타일’을 차용한 광고는 LG패션 「질스튜어트뉴욕」, 삼성전자 지펠, LG U+, CJ 헛개 컨디션, SK커뮤니케이션즈 등 10여개. 의뢰가 들어온 광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000억원 수입설까지 흘러 나오고 있는 상황, 싸이는 “사실이 아니다. 아직 정산도 안됐다.”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업계는 음원 다운로드로 인한 수익금이 4억원 대, 음반 및 스트리밍 서비스를 합산할 경우 8억원 대의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미국 진출로 인해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아 광고, 공연료 등 모두 합치면 연 매출 1000억원도 무리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싸이의 소속사 YG 엔터테인먼트의 주가도 급등해, 최대 주주 양현석은 연예인 최대 주식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싸이는 최근 장동건, 원빈 등 당대 꽃미남이 주도하던 패션 브랜드의 간판도 꿰찼다. 남성 컨템포러리 브랜드 「질스튜어트뉴욕」이 가을/겨울 시즌 전속모델로 가수 싸이를 발탁한 것. 싸이를 전면에 내세워 아메리칸 컨템포러리 스타일 제품군을 새롭게 선보인다. 「질스튜어트뉴욕」은 싸이가 미국 토크쇼에서 말한 ‘Dress Classy, Dance Cheesy’를 콘셉으로 한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패러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은 유튜브 공개 일주일만에 29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으고 있다.

김상균 LG패션 남성캐주얼부문장 상무는 “가수 싸이의 카리스마와 무대 위에서 그가 발산하는 열정과 재치는 「질스튜어트뉴욕」이 추구하는 아메리칸 컨템포러리에 위트 있는 감각을 더한 ‘컨템포러리 트위스트’의 콘셉과 일치한다. 올 가을에는 국내의 남성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모던하면서도 톡톡 튀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패션이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 사진7. 싸이 강남스타일 ]

 

 

 

 

[ 사진8. 싸이 강남스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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