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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6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국군, 유엔군 낙동간전선 총반격 ] 

 

 

 

 

▶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신임 총리 취임

 

▶ 2004년   장쩌민(江澤民) 중국 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전격 퇴진, 후진타오 승계

 

▶ 2004년    크리스토퍼 힐 주한 미 대사, 미 대사 최초로 광주 국립 5.18묘지 참배

 

▶ 2002년   삼성전자 `나노 메모리` 세계최초로 상용화 발표

 

▶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종료

 

▶ 1998년   주한미군사령관에 페트로스키 중장을 임명

 

▶ 1998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 사망

 

▶ 1993년   서울지하철 2호선 을지로구간 개통

 

▶ 1993년   북한. 사정2천km 미사일 신형 `노동2호` 개발

 

▶ 1982년   북한 김일성 중국 방문

 

▶ 1982년   사브라-샤틸라 학살

 

▶ 1982년   마르코스 필리핀대통령 미국방문

 

▶ 1981년   이집트, 소련기술자 1천5백명 추방

 

▶ 1980년   금성사, 국내처음으로 태국과 TV생산기술 수출계약 체결

 

▶ 1980년   `한국미술5000년전` 미국 보스턴에서 개막

 

▶ 1978년   이란 타바스 지진으로 2만5천여명 사망

 

▶ 1977년   마리아 칼라스 사망

 

▶ 1975년   파푸아뉴기니, 호주로부터 독립

 

▶ 1974년   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가입

 

▶ 1974년   검찰, 밀수보석 거래 상류층 부인 35명 기소

 

▶ 1973년   34세 미국여인 6쌍동이 제왕절개 후 분만

 

▶ 1970년   양산군서 버스추락. 12명 사망, 44명 중경상

 

▶ 1964년   7·29 태풍으로 조난됐던 어부 219명 북한서 송환

 

▶ 1963년   말레이지아연방 발족

 

▶ 1961년   美 `네바다`서 두번째 지하핵실험 실시

 

▶ 1958년   미국잠수함서 유도탄 발사에 성공

 

▶ 1955년   아르헨티나 육-해군 무장폭동

 

▶ 1950년   국군 . 유엔군 낙동강전선 총반격

 

▶ 1950년   북대서양이사회에서 프랑스-독일의 재군비를 반대

 

▶ 1947년   인도네시아 독립선언

 

▶ 1945년   소련정치국 38선이북 군정 공표

 

▶ 1945년   한국민주당 창당

 

▶ 1944년   소련-몽고 휴전협정 조인

 

▶ 1940년   미국, 선발징병법 성립

 

▶ 1939년   일본-소련 정전협정

 

▶ 1936년   소설가 심훈 사망

 

▶ 1927년   중국 국민당 대동단결 성립

 

▶ 1908년   제너럴 모터스사 설립

 

▶ 1882년   박영효 수신사, 일본서 최초의 태극기 게양

 

▶ 1846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순교

 

▶ 1810년   멕시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736년   독일 물리학자 가브리엘 파렌하이트 사망

 

▶ 1620년   영국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 영국 출발

 

▶ 1597년   명량대첩

 

▶ 1418년   조선, 월식 발생

 

▶ 1402년   조선시대 신분 증명서인 호패제도 실시

 

 

 

[ 사진1. 국군, 유엔군 낙동간전선 총반격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50년 9월16일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전선에서 총반격을 한 날입니다.

6.25 당시 낙동강 방어 전선은 우리에서 있어서 최후의

방어선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 전선이 뚫렸다면 미국과

우리나라의 군사 작전을 펼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겠죠. 그와 더불어 인천상륙작전도 우리에게 중요했죠.

북한이 남한의 2/3 정도를 차지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

전의 성공은 북한에게 있어서는 혀를 찔렸던 것이겠죠.

오래 전의 역사라 자료가 많이 없어서 이 두 사건에 대

한군사 전략 전술 같은 것을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전쟁

의 양상을 우리에게 옮겨가게 했던 큰 사건이라 생각됩

니다. 

 

 

 

 

 

-낙동강 방위 전선 -

 

그해 625일 기습적인 불법남침을 시작한 공산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

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

이라고도 부른다.

 

 

 

8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

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수안보(水安堡)에 전선사령부

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

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9월 공세

(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

행해왔다. 그리하여 대구방어전투, 영천(永川)전투·동해안

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곳에 따라서는 방어

선을 돌파당할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군은

내선작전(內線作戰)의 이점과 제공·제해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격퇴하였으며, 915일의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다음날부터 총반격을 시작하였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초조한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하였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켜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효과를 거둠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

이 되었다. 한편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의 실패를 계기로

북한은 권력층 내부에 알력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함으로써,

북한군의 작전수행에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발판이 됐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 부대를

포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더구나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유엔군과 국군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 피해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만약 인천상륙작전

없이 낙동강에서 38선으로 단계적으로 북상했을 경우 소요

시간은 30, 아군 인명 피해는 139957명에 달했을 가능성

이 높다는 것이 미군 측의 평가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전을 공세작전으로 전환해

전선을 돌파하는 데 필요한 시간만 13, 예상 인명 피해는

58013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금강선을 돌파하는 데

7일의시간과 32534명의 인명 피해, 천안~장호원선과 한강을

돌파하는데도 각각 5일의 시간과 각 24000여명의 인명 피해

가 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미군의 추산이었다. 실제로 인천상륙

작전 후 38선까지 도달하는 데 유엔군과 국군이 입은 전 사상자는

8478명에 불과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을 때의 추산치와 대비해

겨우 6%에 불과한 인명 손실만으로 전세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양영조 박사는 바로 이점이 인천상륙작

전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라고 본다. 양 박사는 낙동강에서

단순히 총반격으로 38선으로 올라갔을 때와 비교할 때 불과 10

일간의 전투로 서울 탈환에 성공해 전체 전투일수를 3분의 1

줄였을 뿐만 아니라 아군 병력 14만여명과 국민 200여만 명의 피

해를 줄인 것으로 평가된다고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를 평가했다.

 

 

 

 

 

- 인천상륙작전이 특별한 이유 -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의미는 핵무기의 등장과 함께 그 중요

성이 평가절하되던 상륙작전의 유용성이 다시금 부활한 것에서

도 찾을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과 유럽에서 미군

이 전세를 역전시킨 발판은 모두 상륙작전이었다. 하지만 핵무

기가 개발된 이후 상륙지점에 단 한 발의 핵무기만 떨어져도 상

륙부대가 전멸될 것이라는 생각에 상륙작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이런 편견을
깨며 상륙작전이 적절한 상황에서 실행될 경우 여전히 유용하다

는 점을 재확인시켜 줬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은

전체 18개 군단급 부대 중 무려 9개 군단을 동해안과 서해안에

배치해야 했다. 이 때문에 6·25전쟁 전문가들은 유엔군의 또

다른 상륙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공산군 측은 무려 전력의 50%

후방에 배치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에 빠져든 것이라고 평가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단 한 번의 작전 성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전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6·25전쟁의 결정적

작전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은 극심한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 새벽과

오후 두 단계로 나눠 상륙전을 진행해야 하는 특수한 해양 환경,

항구 안벽으로 상륙전을 감행해야 하는 제약 등 수많은 제약사항

을 극복하고 이뤄진 작전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적지 않다.

모험적인 작전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볼 수는 없지만 적이 불가

능하다고 생각하는 조건에 아군의 성공 비결이 있다는 오랜 군사

격언을 20세기 전쟁에서도 재입증했다는 점에서 군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1950915일 새벽 5시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인천항 앞 월미도에 맹렬한 폭격을 가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서막이 열렸다. 550분부터 순양함의 함포 사격

이 개시됐다. 630분 미 10군단 예하 해병1사단 5연대 3대대가

상륙을 시작, 월미도에 설정된 상륙예정 장소인 그린비치(Green

Beach)에 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다.

 

 

 

 

 

 

- 인천상륙작전 어떻게 진행됐나? -

 

미 해병대는 미군 전차의 도움을 받아 동굴 속에 숨어 저항하는

북한군을 소탕해 나갔다. 미 해병대는 함포사격과 화염방사기 등

압도적 화력으로 북한군의 거센 저항을 제압, 750분 무렵에는

월미도 전체를 탈환했다. 미 해군 순양함 마운트 매킨리 함 함상

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맥아더 원수는 오늘 아침

미 해군·해병대는 영광에 빛난다는 메시지를 장병들에게 전했다.

이날 오후 530, 밀물이 들어오자 도일 해군 소장이 마침내

상륙군 상륙이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미 해병5연대와 국군

해병3대대는 수송선에서 내려 상륙주정에 옮겨 탄 후 인천항

북쪽의 레드 비치(Read Beach)로 쇄도해 들어갔다.

 

 

 

 

 

 

미 해병1연대와 함께 인천 남쪽에 블루 비치(Blue Beach)

명명된 상륙지점에 상륙을 시작했다. 해병5연대는 사다리로 방파제

벽을 올라가서, 20분 후에는 첫 목표지점을 점령했다. 미 해병대가

인천 외곽으로 치고 나간 후 한국 해병대는 인천 시가지에서 적

패잔병을 소탕하는 등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기여했다.

922일부터 낙동강의 북한군이 무너지면서 인천상륙작전이

의도했던 목적이 달성되기 시작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일단 북한군의 방어선이 붕괴되자 거침없이 북으

로 진격을 개시했다. 개전 초반 북한군의 남침 속도보다 몇 배 더

빠른 반격이었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10군단과 낙동강 전선의 미8

예하 부대가 수원과 오산 사이에서 마침내 합류한 것은 926

무렵의 일이었다. 낙동강의 북한군 주력은 독 안에 든 쥐의 꼴이

되면서 전세는 완전히 180도 역전됐다. 서울을 방어하던 북한군

18사단은 거센 저항을 계속했지만, 928일 국군과 미군은 마침내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5000분의 1이라던 맥아더 원수의 대 도박은

미군과 국군의 선전으로 마침내 눈앞의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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