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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03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광주학생운동 ]

 

 

 

 

▶ 2011년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 . 통일부총리 별세

 

▶ 2005년   국산김치 16개 제품에서 기생충알 검출

 

▶ 2004년   파라다이스그룹 창업자 전락원 회장 별세

 

▶ 2004년   조지 W 부시, 존 케리 누르고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재선

 

▶ 2002년   터키 이슬람계 정당 80년만에 단독 집권

 

▶ 2002년   세계최대게임대회 `월드사이버게임즈` 한국종합 1위

 

▶ 2000년   채권은행단, 삼성쌍용차 등 29개 부실기업의 청산-법정관리 발표

 

▶ 1998년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한국인 신호범(미국명 폴 신) 당선

 

▶ 1997년   시인 김요섭씨 별세

 

▶ 1995년   작곡가 윤이상 독일에서 사망

 

▶ 1989년   대불산업기지 착공

 

▶ 1989년   공업용 우지로 라면-마가린 등을 제조한 5개업체 대표 10명 구속(공업용 우지 파동)

 

▶ 1984년   11년 만에 학생의 날 부활

 

▶ 1983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 발견(도산 안창호선생 장녀집서)

 

▶ 1982년   미해군, 5번째 원자력 항공모함 건조착수

 

▶ 1982년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 사망

 

▶ 1982년   삼성그룹, 조선호텔 및 주변부지 매입

 

▶ 1980년   입법회의,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의결

 

▶ 1980년   군사재판, 김대중에 사형선고

 

▶ 1979년   박정희대통령 국장

 

▶ 1978년   소련-베트남 우호조약조인

 

▶ 1978년   도미니카 연방,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76년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 당선

 

▶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 1970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왕 페타르2세 사망

 

▶ 1970년   아옌데 칠레 대통령 취임

 

▶ 1969년   미국, 아폴로11호 우주인 방한(암스트롱, 콜린즈, 올드린 부부)

 

▶ 1966년   세계반공연맹 가입

 

▶ 1966년   체 게바라 볼리비아 도착

 

▶ 1964년   존슨, 제35대 미국대통령에 당선

 

▶ 1961년   유엔사무총장 대리에 우 탄트 임명

 

▶ 1958년   로마 교황 요한 23세 대관식

 

▶ 1957년   소련, 개를 태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2호 발사

 

▶ 1956년   시리아-이란군부대 요르단에 진주

 

▶ 1955년   바그다드조약기구 성립(터키 이라크 영국 파키스탄 이란)

 

▶ 1954년   프랑스화가 앙리 마티스 사망

 

▶ 1953년   제1회 학생의날

 

▶ 1948년   김구, 미소양군 철수후 통일정부수립 요지의 담화

 

▶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신문 `고대신문` 창간

 

▶ 1946년   일본, 신헌법 공포

 

▶ 1945년   고당 조만식 평양서 조선민주당 결성, 당수에 피임

 

▶ 1945년   미국, 전시생산국 폐지

 

▶ 1937년   브뤼셀에서 중일전쟁에 관한 9개국회의. 일본비난선언 채택

 

▶ 1936년   루스벨트 미국 제32대 대통령에 재선

 

▶ 1936년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 재선

 

▶ 1935년   필리핀공화국 수립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발생

 

▶ 1911년   소설가 남석(南石) 안수길 출생

 

▶ 1908년   미국 대통령에 태프트 당선

 

▶ 1903년   파나마, 콜롬비아로부터 독립

 

▶ 1901년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 출생

 

▶ 1898년   만국우편협약 비준

 

 

 

 

 

[ 사진2. 조선총독부의 사찰보고서(광주-연합뉴스) 발췌 ]

 

 

 

 - 광주학생운동 -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정책이 가중됨에 따라 조선인 교육에 대한 불평등한 현상이 일어났다.

1925년 조선 안에 있는 일본인은 41만 명이요, 조선인은 2000만 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초등교육

보조비는 일본인 학교가 조선인 학교보다 많았다. 중등교육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인이 100원을 내고

1명을 교육시킬 때 일본인은 13명을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전문학교 이상의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1925년도 일본인 납세액이 142만8000원이고, 조선인은 4474만 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성제국대학,

각종 전문·사범 등 전체 학생수는 6,835명이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 학생수는 불과 792명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였으며, 조선역사와 조선어교육을

 소홀히 하였다. 심지어 가사선생을 일본인으로 하는 우스개 같은 일도 있었다. 조선인 학생만 수용하는

학교의 절대다수는 일본인 교사였다.

 

 

[ 사진3. 광주학생운동 ]

 

 

 

  이와 같은 교육의 불평등에서 오는 반일감정이 동맹휴학(맹휴)이라는 방법에 의해서 폭발되어

전국적으로많은 맹휴가 중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공립학교에서의 맹휴가

사립학교보다 많았던 사실이다. 사립학교에는 자격 있는 선생을 채용할 것이 맹휴의 주된

유였으나, 공립학교에서는 조선역사는 조선인 선생으로, 비인간적인 일본교사 축출, 조선인

채용증가, 그리고 조선어 수업시간 증가 등이 맹휴의 이유였다. 1927∼1929년의 3년간

사립학교 맹휴는 연평균 27건이었는데, 공립학교에서는 51건으로 사립학교보다 많았던 것은

일본인 교사와 자주 접촉할 수 있었던 공립학교 학생간에 반일사상이 증가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독립만세에서 맹휴라는 방법으로 표출되었고 맹휴는

일종의 유행병과 같이 각종 학교로 전파되었다. 일본인교사 배척을 내세우며 맹휴는 계속되었다.

 

 

[ 사진4. 광주학생운동 ]

 

 

 

  가령,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교무주임 사이토(齊藤)는 조선풍습에 관해서 이해가

없으니 면직하라는 것 그리고 조선 학생을 사랑하고 호의로 대해 준 다카하시(高橋)

교사의 전근은 부당하다는 것 등으로 맹휴를 하였다. 이러한 불만이 쌓여서 광주학생운동은

 만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이 운동의 촉매작용을 한 것은 열차 내에서의 광주중학생

(일본인)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간의 싸움이었다. 광주와 송정리간의 운암역 부근에서,

개를 잡는 조선인을 보고 일본인 학생이 야만이라고 말하자 무엇이 야만이냐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맞서 싸웠다(1929.6.26.). 다음은 일본인 학생이 조선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 흔드는 통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 분개해서 역에 내려서 일본인 학생과 싸웠다.

 

 

[ 사진5. 광주학생운동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름 없는 별들' ]

 

 

 

  이와 같은 두 개의 전초전을 지나서 1929년 11월 3일 명치절(明治節)을 기하여 양교간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음력으로는 우리의 개천절에 해당되는 10월 3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의가 있는 충돌이었다. 일본학교(광주중학교)가 기념식 후 신사참배를 하고 축제분위기에

들떠 있을 때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은 학교에서 기념식을 끝내고 10명씩 짝을 지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지난번 충돌에 대해 편파적 보도를 한 광주일보사를 습격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일본인 학생과 싸웠는데, 이 싸움에 조선인 중등학생을

총동원시켜 일본인 학생과 일촉즉발의 큰 싸움이 벌어질 뻔하였다. 일본경찰은 주모자로

지목된 조선인 학생을 검거하고 죄를 캐물었다.

 

 

[ 사진6. 현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 외곽에 위치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

 

 

 

  광주고등보통학교학생은 검거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리고 일반 민중에게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라는 선언문을 배포하였다. 광주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조선인 학생 70명에 대하여 체형(体刑)을 언도하였다. 11월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학생운동으로 퍼져 이것을 광주학생운동이라고 불렀고, 건국

 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의 특색은 일본인 학생을 상대로

물리적 싸움을 벌인 데 있다고 하겠다.지금까지의 만세운동을 떠나 타도운동으로 전향한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서울에서는 이화·동덕·배화·정신·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등

10개 교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사진7.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내 학생운동 기념탑 ]

 

 

 

  경찰의 학교침입 반대, 식민지교육 폐지, 광주학생희생자 석방, 퇴학생 복교 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청년·학생, 오호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약소민족해방

만세’, ‘제국주의타도 만세’,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전단을 뿌리기도 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나 서울여학생사건은 공통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에

항거하였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약소민족간에 반제동맹(反帝同盟)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어

학생운동도 반제운동으로 그 진로를 정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광복 전 학생운동으로 그 순수성과

학생 독자적 사상, 그리고 운동 내용으로 볼 때 2·8독립선언과 광주학생운동은 학생운동사의

백미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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