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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7월18일>

 

 

 

 

[ 그림1.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칭송받은 의자왕(義慈王) ]

 

 

▶ 2005년   이미나, BMO 캐나디언오픈 우승

 

▶ 2004년   봉산탈춤 보유자 윤옥씨 별세

 

▶ 2004년   연쇄살인범 "묻지마 살인" 유영철 검거

 

▶ 2002년   5천억원 규모의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 설립 발표

 

▶ 1996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제105차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신임 IOC위원으로 임명

 

▶ 1995년   김대중, 신당창당 공식 선언

 

▶ 1994년   박홍 서강대 총장 주사파 발언

 

▶ 1990년   윤보선 전 대통령 별세

 

▶ 1989년   강수연,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 1986년   침몰한 타이타닉호 수중촬영에 성공 

 

▶ 1983년   중국기 납치범 첫 공판

 

▶ 1983년   일본 중의원 해산

 

▶ 1983년   중미 4국 긴급 정상회담

 

▶ 1982년   이디오피아 대 소말리아 침공으로 영토분쟁 재연

 

▶ 1982년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 사망

 

▶ 1981년   폴란드 공산당, 동구권 최초의 직접 비밀투표서 카니아 제1서기 당선

 

▶ 1976년   코마네치, 모트리올올림픽에서 세계 체조사상 첫 10점 만점 기록

 

▶ 1973년   미국, 남북한 유엔동시가입 지지 천명

 

▶ 1970년   경북 고령 금산재서 버스 추락. 24명 사망, 44명 중경상

 

▶ 1968년    인텔 창업

 

▶ 1967년   박춘우 유괴살인 사건 발생

 

▶ 1965년   송추에 무장간첩침투

 

▶ 1963년   민주당 창당(총재 박순천)

 

▶ 1963년   한미경제위원회(ECC) 신설협정 체결

 

▶ 1962년   페루 쿠데타, 대통령 체포

 

▶ 1956년   티토, 네루, 나세르 3자회담 (적극적 평화공존 제창)

 

▶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정상, 제네바회담

 

▶ 1952년   중석불사건, 국회서 말썽 조사위 구성

 

▶ 1949년   쿠바, 대한민국 정식 승인

 

▶ 1944년   일본 도조(東條)내각 총사퇴

 

▶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 1921년   미국 최초의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 글렌 출생

 

▶ 1919년   경성 남산서 일본인의 신궁 세움

 

▶ 1918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 출생

 

▶ 1907년   대한자강회.동우회.기독청년회원 등 2000여명 대안문 앞에서 양위 반대시위

 

▶ 1907년   이인직 친일지 `대한신문` 창간(만세보 인수)

 

▶ 1907년   내각전원, 고종의 양위를 강권(제3차 어전회의)

 

▶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 1895년   불가리아 독재 정치가 스탐볼로프 사망

 

▶ 1885년   영국-청나라 아편협정 체결

 

▶ 1872년   멕시코의 대통령(1861-72 재임) 후아레스 사망

 

▶ 1635년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훅 출생

 

▶ 1401년   신문고 설치

 

▶  660년   백제 의자왕 항복, 멸망

 

 

오늘의 역사 이시간에는 백제의 멸망과

삼천궁녀로 유명한 백제의 의자왕에 대해서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 그림2. 사비성 ]

 

 

백제의 멸망을 알기 위해서 5세기로 거슬러 올라 가 봅니다.

백제의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깁니다. 그 후 지금의 충남 공주인 웅진으로 수도(475)를 옮기면서 대외교류가 위축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죠.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며, 문주왕 때는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며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사회가 안정되면서 다시 국력을 회복합니다. 538년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부여 사비성으로 옮기며 대외교류도 활발해 지고 나라의 진흥을 꾀합니다.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빼앗긴 한성을 되찾고자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수복하지만, 연합 했던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다시 신라에게 빼앗기게 되죠. 이때가 551년 즈음입니다. 성왕은 이에 복수하고자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 맞서 싸우지만 전사합니다.

이후 무왕과 의자왕으로 이어지는 백제는 신라를 점령하기도 하지만 결국 660년 멸망하지요. 

구체적인 것은 아래를 보시겠습니다..

 

 

 

 

[ 사진3. 의자왕의 충신 성충 ]

 

 

 

백제의 흥망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결국 개로왕이 전사까지 하게 된다. 결국 백제는 한강 유역의 수도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변의 웅진으로 수도(475)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혼인을 통해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부여 지역의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다. 하지만 처음에 한강 상류를 차지하기로 약속한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며,(551) 복수를 위해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554)하고 말았다.

 

 

[ 사진4. 의자왕의 충신 흥수 ]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백제는 이 때 금성 부근까지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당시 고구려의 실력자이던 연개소문과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의자왕은 당나라와의 외교적 목적이 신라에 의해서 달성되지 않자, 대당 외교가 아니라 신라와 직접 군사 대결을 시도하여 6594월 신라를 공격하였다. 돌궐-고구려-백제-왜 와, -신라의 십자 외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백제에 대한 당나라의 군사 개입을 불러왔다. 김춘추의 외교 담판으로 당나라는 6606월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다.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그림5. 백제의 멸망을 초래한 황산벌 전투 ]

 

 

백제의 부흥운동과 후백제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부터 936년 동안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이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를 다시 세웠다. 그러나 견훤이 세운 백제는 역사가 짧고 본래의 백제와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이를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 사진1/그림6. 삼천궁여의 벽화와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던 부여의 낙화암 ]

 

 

 

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 "KBS TV, 역사추적"이 심층취재로 반영

 

‘KBS TV, 역사추적’이 20081220. 백제의 멸망을 불러온 의자왕(義慈王) 항복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멋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여기서 밝힌 새로운 사실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사비성을 장악했던 당나라 군대는 사비성을 빼앗고 의자왕을 사로잡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빠르게 사비성에 당도할 목적으로 사비성 외곽의 모든 성들을 그냥 지나쳐 사비성으로 내달렸다. 당군은 곧바로 사비성을 공략하여 궁성을 장악했으나 의자왕은 사비성에 없었다.

 

의자왕은 사비성 외곽의 네 성을 지키며 아직 굳건한 백제 병력으로 적이 차지한 사비성을 포위할 작전을 세웠다. 당시의 전력으로 볼 때 충분히 승산있는 전략이었다. 임진성은 흑치상지가, 옹진성은 예식장군이 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의자왕은 예식장군이 지휘하는 웅진(지금의 공주) 산성에 머물며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당군은 빠르게 사비성에 당도할 목적으로 말을 몰아 달렸기 때문에 군량을 비축하지 못했었다. 또한 사비성에 있던 식량창고는 전황 중에 모두 불탔다. 당군은 외곽의 포위 속에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으며 유일한 방책은 신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것인데 백제로 들어오는 길목은 모두 백제군이 지키며 공급로를 차단했다. 실제로 식량을 구할 방도를 찾으러 사비성을 나왔던 일천명의 당군이 모두 전멸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철옹성이라고 불렸던 지방 각성이 아직도 건재한 가운데 나당연합군에 대항할 전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느닷없는 항복으로 백제역사를 마감한 것에 대해서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웅진성의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의 소정방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의자왕을 위협하고 사로잡으려 하자 의자왕은 격렬히 저항하다 자결을 시도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 ‘조선상고사’에도 백제 장수 모반으로 인해 의자왕항복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재선생의 저술에는 “옹진성 수비책임자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으려 하자 의자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잘라지지 않아 살아있는 왕을 예식장군이 데리고 당의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당의 역사서를 해석했다.

 

당나라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의자왕 항복에 관련된 기술내용에는 예식장군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왕 보다 아랫사람인 예식장군의 이름을 유례없이 먼저 기록한다는 것은 예식장군이 항복을 주도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술된 내용을 한글자 한글자 해석하면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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