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1.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
▶ 2010년 日 당국, 2004년 이후 첫 외환시장 개입
▶ 2004년 카이저 미국무부 부차관보 스파이혐의로 체포, ‘21세기판 마타하리 사건’
▶ 2002년 미국 육상선수 몽고메리, 남자육상 100m 세계신기록 (9초78)
▶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개막
▶ 2000년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3차 총 폐업
▶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4.3사건 재판기록 첫 공개
▶ 1983년 메나햄 베긴 이스라엘 수상, 공식 사임
▶ 1982년 과기원, 핵자기공명 단층촬영기 개발, 촬영에 성공
▶ 1982년 한양대병원 장기은행 발족
▶ 1981년 중국, 국공합작 제의
▶ 1978년 한국-솔로몬군도 국교 수립
▶ 1978년 정효주양 첫번째 유괴
▶ 1977년 고상돈 에베레스트 등정
▶ 1976년 신민당(新民黨) 당권교체
▶ 1975년 조총련계 재일동포 1차 7백여명 추석성묘차 모국방문
▶ 1972년 한국-서사모아 국교 수립
▶ 1969년 한국주택은행, 주택복원 발매 시작
▶ 1968년 박정희대통령, 호주-뉴질랜드 방문 등정
▶ 1966년 한국비료(韓肥) 사카린 밀수사건 신문보도로 누출
▶ 1963년 국내 첫 라면 `삼양라면` 생산
▶ 1963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통령입후보자 등록마감
▶ 1961년 미국, 네바다서 지하핵실험
▶ 1961년 터키공화국 법정, 멘데레스 전(前)수상에 사형 판결
▶ 1961년 한국-태국 무역협정 조인
▶ 1959년 국내 첫 사망자 집계 태풍(제14호 태풍 사라(SARAH)) 피해 발생
▶ 1957년 AFKN-TV 방송 개시
▶ 1955년 문경선 개통
▶ 1954년 중국, 제1기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 1951년 김수환 추기경 사제 수품
▶ 1951년 오타와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개최. 그리스-터키공화국 가입 결정
▶ 1950년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개시
▶ 1946년 북한, 김일성대학 개교
▶ 1945년 소련, 간도 영유(領有)를 포고
▶ 1941년 독립운동가 이규선 사망
▶ 1935년 뉘른베르크법 공포
▶ 1917년 러시아, 공화국 선언
▶ 1916년 영국군 세계최초로 탱크 사용
▶ 1915년 경성우편국 준공
▶ 1911년 경원선 부분 개통(용산-의정부)
▶ 1910년 독립운동가 오성술 선생 귀국
▶ 1890년 영국 여류추리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 출생
▶ 1874년 베를린 제1회 국제우편회의
▶ 1857년 미국의 제27대 대통령(1909-13) 태프트 출생
▶ 1838년 니카라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821년 엘살바도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821년 과테말라,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821년 코스타리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 1812년 나폴레옹 모스크바 입성
▶ 1130년 주자학의 창시자 주자 출생
▶ 945년 혜종 서거
[ 사진2.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1차 범인 매석환(당시42세)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영화(극비수사)로도 제작이 되었던,
실화의 '부산 어린이 유괴사건' , '정효주양 유괴사건'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부산 어린이 유괴사건'은 부산 재력가로 알려진
정모(당시 42세)씨의 외동딸 정효주(당시 12세)양이 두 번에 걸쳐
납치된 사건입니다.
[ 사진3.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보도기사 ]
정효주양은 1978년 9월15일 낮 12시20분께 재학 중이던 부산의 옛
남성국민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골목길을 내려오다가 전과 9범의
매석환(당시 42세)에 의해 납치됐다. 매석환은 "아버지가 5000만원의
빚을 져 세관에 잡혀가 당분간 내가 너를 보살펴야 한다"며 효주양을 차
트렁크에 태우고 서울, 부산, 수원 등지를 오가며 도망다녔다.
[ 사진4.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보도기사 ]
그는 효주양을 유괴한 지 33일째, 효주양의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5000만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가 극비리에 수사 중인 부산진경찰서
소속 공길용 경사에게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납치 차량 번호판을 알아내려고 최면술 수사기법을 최초로 도입하고,
유명한 무속인 김중산 도사에게 점을 보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 사진5.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1차범인 이원석(당시25세) ]
그러나 7개월 뒤인 1979년 4월14일 등굣길에 효주양은 비닐로
번호판을 가린 승용차에 타고 있던 괴한에게 또 다시 납치됐다.
첫 납치사건 후 가족들이 매일 등하교를 함께하다 딱 하루 거른 날
다시 유괴된 것이다. 효주양 유괴소식은 전 국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 사진6.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보도기사 ]
최석원 당시 부산시장은 시민에게 "효주양 구출에 협조해 달라"며
효주양의 사진이 있는 전단 60만장을 배부했고 효주양의 아버지 정씨도
방송에 출연해 "딸을 살려만 준다면 어떤 조건이라도 부모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호소했다. 효주양이 처음 유괴됐을 당시 범인인
매석환이 2차 유괴범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 사진7. 정효주양 부산어린이 유괴사건 보도기사 ]
사건 발생 5일째인 4월18일에는 범죄와 관련해 사상 최초로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발표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죄를 뉘우치고 효주양을 무사히 돌려보낸다면 관계기관에
죄과를 관대하게 다루도록 하겠다"며 범인을 회유했다.
담화가 발표된 날 저녁 10시50분께 효주양이 경부고속도로 경주
톨게이트 인근에서 택시기사에 의해 발견되면서 두 번째 사건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