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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8월5일>

 

 

 

[ 사진1. 마릴린 먼로 ]

 

 

 

▶ 2010년   칠레 광부 33인 터널 붕괴로 매몰

 

▶ 2008년   '土地'의 작가 박경리씨 별세

 

▶ 2003년   미국 성공회, 진 로빈슨을 사상 첫 동성애자 주교로 임명

 

▶ 2000년   국내 46개 언론사 사장단 북한 방문(~12일)

 

▶ 1999년   김형진 세종증권회장 회사채 할인비리로 구속

 

▶ 1998년   영원한 얄개` 손창호 지병으로 사망

 

▶ 1998년   대한항공 여객기 김포공항 활주로 이탈사고(65명 부상)

 

▶ 1997년   볼리비아 의회, 우고 반세르를 대통령으로 선출

 

▶ 1995년   미국-베트남, 20년만에 외교관계 공식수립

 

▶ 1995년   국내 최초의 방송통신위성 '무궁화1호' 발사

 

▶ 1993년   광복군 동지회 부회장 김광언씨 별세

 

▶ 1991년   일본 혼다 자동차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사망

 

▶ 1987년   노태우 대표, 민정당 총재에 취임

 

▶ 1983년   중국여객기, 한국비행정보구역 첫 통과

 

▶ 1982년   국회 문공위, 일본교과서 외곡시정 촉구 4개항 결의문 채택

 

▶ 1963년   김활란 이화여대총장, 막사이사이상 수상

 

▶ 1963년   미국-영국-소련 외무장관, 핵확산금지협정에 조인

 

▶ 1962년   마릴린 먼로 사망

 

▶ 1960년   구 프랑스령 어퍼볼타 독립

 

▶ 1957년   1927년 담즙산 연구로 노벨화학상 수상한 독일의 빌란트 사망

 

▶ 1957년   영국, 말라야연방 독립조약 조인

 

▶ 1956년   제2대 지방의회 의원 선거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 실시

 

▶ 1954년   이란, 국제석유8사와 협정

 

▶ 1953년   판문점서 포로교환 개시

 

▶ 16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제3대 부통령선거, 대통령에 이승만-부통령에 함태영 당선

 

▶ 1949년   미국, 대(對)중국백서 발표

 

▶ 1948년   국회,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인준

 

▶ 1948년   민속학자 송석하 사망

 

▶ 1947년   인도네시아-네덜란드 정전

 

▶ 1941년   수풍발전소 첫 送電

 

▶ 1936년   7대 조선총독에 미나미(南次朗) 취임

 

▶ 1929년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이끈 지도자 포셋 사망

 

▶ 1922년   사회단체대표 50여명, 니이가타현(新瀉縣) 한인노동자 학살사건 조사회 결성, 대표 파견

 

▶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 결성

 

▶ 1913년   손문, 광동에서 독립실패로 대만으로 망명

 

▶ 1912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구출에 힘쓴 발렌베리 출생

 

▶ 1907년   원주 진위대 장병 봉기, 원주 점령

 

▶ 1903년   우리나라 체육계의 선구자이자 사회학의 개척자였던 이상백 박사 출생

 

▶ 1895년   엥겔스 사망

 

▶ 1892년   종현성당(명동성당) 착공

 

▶ 1891년   영국, 초등교육법 공포

 

▶ 1850년   프랑스 작가 모파상 출생

 

▶ 1827년   브라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폰세카 출생

 

▶ 1802년   노르웨이의 수학자 아벨 출생

 

▶ 1424년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사망

 

▶   527년   이차돈 순교

 

 

 

 

[사진2. 마릴린 먼로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전세계의 남성들 맘을 설레게 하였던

마릴린 먼로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아직까지 밣혀지지 않은

마릴린 먼로의 자살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962년 8월 5일 새벽 3시 50분, 헐리우드 은막의 스타가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별중의 별이었고 삶은 전설이었으며 죽음은 비참했다.


그녀는 세계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향수 샤넬 No.5의 모델이었으며


잠들때 무엇을 입고 자냐는 기자의 질문에 " 샤넬 No.5 한 방울이면 충분해요 "

 

라고 재치있게 대답한 마릴린 먼로였다.

 

 

 

 

[ 사진3. 마릴린 먼로와 샤넬NO.5 ]

 

 

 

마릴린 먼로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을 하자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자살한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은폐하려는 음모에 의해 살해 당했는지 궁금해했다.


그녀의 죽음이 현재까지도 논란을 빗고 있는 이유는 바로 유명한 존 F.케네디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의 스캔들때문이다.

 

 

 

 

[ 사진4. 존F.케네디 / 마릴린 먼로 / 로버트 케네디 ]

 

 

 

오늘은 마릴린 먼로의 죽을을 둘러싼 미스터리와 그에 관한 음모론에 대해 알아보자.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들을 살펴보자.

 

삶과 죽음, 모두 영화 같았던 마릴린 먼로는 1926년 6월 1일 캘리포니아주

 

L.A에서 노마 진 베이커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 사진5. 마릴린 먼로의 본명 노마 진 베이커의 아기 때 사진 ]

 

 

 

그녀의 어머니 글레디스 먼로 베이커는 헐리우드의 한 스튜디어오에서 필름편집자로 일했다.


글레디스는 전 남편의 성을 따서 딸의 이름을 노마 진 베이커로 지었지만 친부의 성은 아니었다.

 

 

 

 

[ 사진6. 글레디스와 마릴린 먼로 ]

 

 

 

글레디스는 아이에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아이를 낳은 이후 글레디스는 극심한 우울증과 정신이상으로 정신 병동에 수감됐고

 

마릴린은 고아원에 맡겨진뒤 양부모의 집을 전전했다.

 

마릴린은 어릴때부터 영화를 좋아했으며 영화배우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녀는 고아원과 양부모의 집을 전전하면서도 영화배우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 사진7. 10대시절 마릴린 먼로 ]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늘 원했기 때문에

 

1942년 16살의 어린 나이로 짐 도허티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남편인 짐 도허티는 해병대했다.

 

그 뒤 둘의 사이는 멀어졌다.

 

 

 

 

[ 사진8. 마릴린 먼로와 짐 도허티 ]

 

 

 

남편이 전쟁터로 떠난후 마릴린은 군수품 생산공장에서 일했고

 

그 곳에서 군사진 작가인 데이비드 코너버에 눈에 띄어 모델로 발탁되었다.

 

 

 

 

[ 사진9. 데이비드 코너버 ]

 

 

 

사진작가 코너버와 함께 본격적인 모델 일을 시작한 마릴린은

 

곧 잡지와 달력에 실리게 되었다.

 

 

 

 

[ 사진10. 초기 모델활동 당시 마릴린 먼로 ]

 

 

 

1946년, 그녀는 사진 작가의 충고를 받아드려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자신의 꿈에 더 다가서기위해 짐 도허티와 이혼했다.


마릴린은 닥치는 대로 일하면 모은 돈으로 연기학원에 다녔다.

 

1946년 늦은 여름, 그녀는 폭스스튜디오와 마침내 계약을 맺었다.


더 매혹적인 이미지를 원했던 스튜디오 관계자가 노마 진 베이커 대신

 

마를린이란 이름을 제안했다. 그녀는 코와 빰 성형 수술을 받고 어머니의 처녀쩍

 

이름을 따서 마릴린 먼로가 되었다.전설적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탄생한것이다.

 

 

 

 

[ 사진11. 성형 전후 마릴린 먼로 이미지 변화 ]

 

 

 

헐리우드에 본격적으로 데뷔한 처음 5년동안 마릴린 먼로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이 기간동안 마릴린 먼로는 영화일과 외로움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렸고

 

수면제를 먹기 시작했으며 1번이상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던 중 1952년, 영화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로 마릴린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 에서의 로렐라이를 연기한 마릴린 먼로는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금발 여성이 되었다.


그리고 로렐라이의 여성스럽고 코믹하며 남자를 밝히는 이미지가 곧

 

마릴린 먼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 영상1.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중 ]

 

 

 

영화가 개봉되자말자 헐리우드에서 마릴린 먼로의 주가는 하늘을 찔렀다.


그녀는 헐리우드 스타의 거리에 자신의 손바닥을 찍었다.

 

드디어 그녀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것이다.

 

 

 

 

[ 사진12. 마릴린 먼로 핸드 프린팅 ]

 

 

 

그 해 마릴린 먼로는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당대 최고의 야구 선수였고 그를 소개받았을 때 마릴린은 헐리우드 최고의 여배우였다.

 

1954년 1월,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둘은 결혼했다.

 

 

 

 

[ 사진13.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

 

 


하지만 스포츠 영웅과 헐리우드 여신의 결혼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


마릴린 먼로가 ' 7년만의 외출 ' 에서 그 유명한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차마가 들리는 장면을 찍고

 

그 날 밤 이것에 화가난 조에게 얻어 맞았던 것이다.

 

 

 

 

[ 사진14. 마릴린 먼로 영화 "7년만의 외출" ]

 

 

 

그 뒤 몇달 후에도 다른 문제로 조가 또 한번의 폭력을 행사하자

 

둘은 결혼한지 9개월 만에 이혼했다. 마릴린과 조는 결혼 생활 내내 많은 부부 싸움을 했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같이 살 순 없었다.

 

 

 

 

[ 사진15. 마릴린 먼로 이혼 발표 기자회견 중 ]

 

 

 

이혼 후 마릴린 먼로는 더욱 연기에 몰두했다.


그녀는 리 스트라우스버그에게 오랫동안 연기를 배웠으며

 

연기에 인생을 바치는 휼륭한 여배우가 되고 싶어했다.


연기 스승인 리 스트라우스버그가 있는 곳에서 일하기 위해

 

마릴린은 헐리우드를 떠나 뉴욕으로 이사했다.


1956년, 마릴린은 연기에 몰두하던중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했다.

 

 

 

 

[ 사진16.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 ]

 

 

 

마릴린은 공산당원인 밀러와의 결혼으로 이 시기 처음으로

 

 FBI와 FBI 후버 국장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다.

 

 

 

 

[ 사진17. 존 에드가 후버 ]

 

 

 

마릴린은 밀러가 반미활동때문에 국회청문회에 불려갔을때

 

밀러를 변호했지만 이 둘의 결혼생활은 끔찍했다.


결혼 후 4년동안 그녀는 2번의 유산을 겪었고 또 다시 자살을 시도했다.


마릴린은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계속해서 아이를 잃자 심각하게 자신을 책망했고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힘든 결혼생활끝에 1960년 둘은 결국 이혼했다.

 

그녀는 다시 헐리우드로 돌아왔지만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다.마릴린은 술과 마약,

 

그리고 약에 찌들어 살았다. 1960년부터 마릴린은 정신과 의사

 

그린스에게 많이 의지했고 그의 상담 없이는 일상 생활이 힘들지경이었다.

 

 

 

 

[ 사진18. 정신과 의사 랄프 그린스 ]

 

 

 

1962년, 새로운 영화 촬영을 시작했지만 마릴린의 불성실한 태도로 영화제작에

 

차질이 생기자 제작자는 화가나 영화제작을 중단해버렸다. 그녀는 그 후 작은 집에 틀어박혀지냈고

 

우울증 증세가 악화되자 수면제와 진정제에 의존하며 살았다.

 

1962년 5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대통령 존 F.케네디의 생일파티장이었다.

 

그리고 3개월도 안되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 사진19. 존 F.케네디의 생일파티 / 마릴린 먼로와 존 F.케네디 (오른쪽) ]

 

 

 

1962년 8월 5일, 마릴린의 집에서 그녀의 시체가 발견 되자

 

전 세계의 언론은 그녀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마릴린 먼로가 자살했다는 정부의 공식발표에도 불구하고

 

곧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도로시와 월터는 자신의 칼럼에서 케네디가의 연루 가능성을 제기했고

 

프랭크 카펠은 자신의 책에서 마릴린의 죽음은 명백한 살인이라고 주장했다.


프랭크 카펠의 책 내용에 따르면 마릴린은 살해됐고 그 현장에 로버트 케네디가 있었다고 한다.

 

 

 

 

[ 사진20. 마릴린 먼로 시신이 실려 나오는 장면 ]

 

 

 

수많은 세간의 주목을 받은 자살임에도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관한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그 기록은 겨우 파일 한장 분량이었다.


자살당시 마릴린의 침실 원본 사진은 분실됐고 선명하지 않은 인쇄판만 지금 남아있다.


또한 마릴린의 위에선 약의 잔여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녀를 처음 발견한 의사들은

 

바로 신고하지 않고 30분이 지난 4시 25분에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먼로의 시체가 발견된 방은 범죄현장으로 보존되지 않았다.

 

명확한 증거의 부족으로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마릴린 먼로의 죽음과 관련된 주장들과 증거들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관한 첫번째 주장은 공식적으로 발표된 약물과다복용에 의한 자살이다.


마릴린 먼로는 자살직전까지 3~4회에 걸친 자살 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 음모론의 지지자들은 로버트 케네디( 존 F.케네디의 동생 )가

 

비밀을 폭로하려는 마릴린 먼로를 살해했다고 주장하고있다.


그전부터 마릴린 먼로와 존 F.케네디 대통령,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

 

세 사람사이에는 스캔들이 늘 따라다녔다.

 

 

 

 

[ 사진21. 마릴린 먼로와 존 F.케네디 ]

 

 

 

마릴린 먼로가 살해당했다는 주장에 따르면 마릴린 먼로가 정부기밀을 알고 있어서

 

케네디형제나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그녀 죽였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대립되는 주장에 대해서 여러가지 증거를 토대로

 

무엇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각자 판단해보자.


자살과 타살의 상반된 주장에서 일치하는 증거는 바로 약물에 의한 사인이다.


마릴린 먼로의 장기에서 수면제가 대량 검출된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 스스로가 약을 먹었다는 주장과 강제적으로

 

주입된뒤 자살로 위장되었다는 주장으로 갈린다.


마릴린 먼로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기위해서

 

가장 먼저 살펴봐야할 것은 그녀의 시체부검서이다.


8월 5일 아침 10시 30분에 검시관인 토마스 노구치 박사는 지방 검사보인

 

존 마이너의 참관하에 마릴린 먼로의 시체를 부검했다.


시체부검서의 사인은 심한 넴뷰탈( 중추신경계를 억제함으로써 진정과 수면을

 

유발하는 향정신성의약품의 일종) 중독으로 약물 과다가 원인이라고 써있다.


실제로 마릴린 먼로의 침실 탁자에서는 12개가 넘는 약병이 발견됐다.

 

 

 

 

[ 사진22. 마릴린 먼로의 시신 옆에서 발견 된 약병들 ]

 

 

 

그 중 한병엔 넴뷰탈이라는 각성제가 담겨 있었는데 25알이 처방되어있었다.

 

처방받은 날짜는 8월 3일이었고 약병은 비어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검사한 먼로의 혈액과 간에서

 

다량의 넴뷰탈이 검출됐는데 성인 3명을 죽일수 있는 양이었다.

 

마릴린 먼로의 시체는 변색이라고도 부르는 시반 현상이 뚜렸하게 나타나있다.


이 시반현상은 먼로의 가슴과 오른쪽 얼굴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엎드린 채 죽었다는 증거가 된다.

 

 

 

 

[ 사진23. 실제 마릴린 먼로 얼굴의 시반 / 죽은 당시 재현 모습 ]

 

 

 

마릴린 먼로의 시체를 구석구석 살펴본 결과 폭행을 당한 흔적은 없었다.


먼로의 위장에서는 알약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갈색의 액체 20cc만이 발견되었다.


갈색의 액체를 검사한 결과 위 속에선 먼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성을 띤 그 어떤 약물반응도 없었다.


이 결과는 먼로가 다량의 각성제를 복욕한 사실과 상반된다.


하지만 독극물학자들이 간과 혈액을 정밀 분석한 결과 각성제성분이 다량 검출되었다.


( 안타갑게도 다른 장기는 검사하지 않았으며 지금 보존되어있는 것도 없다. )


노구치 박사는 먼로의 몸을 Y자 형태로 절개해 다른 장기들을 살펴보았다.


다른 장기에서 특이한 점이 발되지 않은 가운데 하행 결장이라는 부위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S자 결장이라고도 불리는 부위가 어두운 자줏빛으로 변색되어있었던 것이다.

 

 

 

 

[ 사진24. 하행 결장 위치 ]

 

 

 

또한 하행결장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음모론가들은

 

먼로를 죽음게한 약물이 관장을 통해 투여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가설은 위의 증거와 부합된다. 가설에 따르면 먼로는 8월 4일 저녁 시간 무렵에

 

수면제를 충분히 먹고 완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녀가 깊게 잠든 사이 누군가 넴뷰탈을 녹인 용액을 관장을 통해 먼로에게 투입한 것이다.


먼로의 위에서 캡슐의 흔적이나 약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가설이었다.


그렇다면 왜 마릴린 먼로의 위장에서는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을까?


검시관은 먼로가 40~50알의 넴뷰탈을 삼켰다고 추정했지만

 

이 양은 먼로의 혈액 속에 남아있는 넴뷰탈의 농도와 맞지 않다.

 

먼로의 몸에서 나온 수치와 과학적 실험을 통한 실제 복용량을 계산해보면

 

24알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먼로는 사망전날 처방전을 들고 25알의 넴뷰탈을 구입했다고 한다.

 

실제 구입한 넴뷰탈의 양과 먼로의 체내에서 발견된 양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24알의 넴뷰탈이 위에서 흔적이 남지 않게 완전히 분해되는 대는 얼마나 걸릴까?

 

 

 

 

[ 사진25. 넴뷰탈 ]

 

 

 

모의 실험결과 넴뷰탈의 젤라틴 캡슐의 분해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며

 

25알의 넴뷰탈 캡슐이 완전히 분해되는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아마 약을 삼킨지 20분도 되지 않아 먼로는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20분후면 먼로의 위는 텅 빈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잔여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캡슐이 위나 소장에서 분해되어

 

약물과 젤라틴이 모두 신속하게 흡수돼 사라졌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부검보고서를 보면 먼로의 위 점막에서 소량의 출혈이 발견되었다고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넴뷰탈 과다복용에 의한 염증때문이다.


이런 염증이 나타나는대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가량으로 마릴린 먼로는

 

약물복용후 1시간정도는 살아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음모론의 가설중 먼로의 담당의가 바비튜레이트 약물주사로 먼로를

 

죽였다는 주장이 있는데 위의 증거들은 이를 정면반박한다.


먼로의 몸에서는 그 어떤 주사바늘 자국도 나오지 않았으며

 

바비튜레이트 주사를 맞았다면 수분내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또한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는 공식적인 발표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제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 사진26. 마릴린 먼로의 당시 집 ]

 

 

[ 사진27. 마릴린 먼로의 시신발견 당시 모습 재현 ]

 

 

 

가정부 머레이가 처음 먼로에게 무슨 일인가 있음을 알아차렸을때는 자정쯤이었다.


침실 문은 잠겨 있었기때문에 그녀를 처음 발견한 가정부 머레이는

 

정신과의사 그린스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다.


침실 문을 열수 없자 머레이와 그린스는 벽난로 부지깽이로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이때 시간은 새벽 3시 30분이었다.


마릴린 먼로는 수화기를 들고 업드린채 죽어있었다. 새벽 3시 50분경,

 

연락을 받은 먼로의 주치의 엔글버그 박사가 도착했다.


잭 클레멘츠 경사는 마릴린 주치의의 신고 전화를 받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경찰이었다.

 

그 때가 1962년 8월 5일 일요일 새벽 4시 35분이었다.


클레멘츠는 즉시 L.A의 마릴린 먼로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 당시 마릴린 먼로의 집에는 가정부 머레이와 정신과 의사 그린스,

 

내과 주치의 엔글버그 세사람이 있었다.


클레멘츠 경사는 1989년 사망했다. 클레멘츠는 처음부터 현장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클레멘츠의 주장에 따르면 약물과다복용 자살인 경우 몸이 경련으로 뒤틀리는데

 

먼로의 시체는 너무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클레멘츠의 의심을 더욱 부축인것은 신고 시간과 가정부 머레이의 행동이었다.

 

가정부 머레이가 시체를 처음 발견한 것은 자정이었는데

 

왜 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가정부 머레이는 대답을 회피했고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후에 담담 형사가 오자 머레이가 먼로를 발견한 시간은

 

자정에서 3시간을 늦춘 새벽 3시라고 시간이 미루어졌다고 한다.


클레멘츠 경사는 마릴린 먼로의 침실에서 두 의사를 심문한뒤 집을 살펴보던중

 

세탁실에서 세탁을 하는 가정부 머레이를 발견했다.


집 주인이 죽었는데 세탁을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이상한일이었다.

 

세탁실 옆은 손님방으로 음모론 지지자들에겐 실질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라고 여겨지고 있다.

 

 

 

 

[ 사진28. 마릴린 먼로집의 구조 ]

 

 

 

의심가는 부분이 많았지만 클레멘츠 경사는 L.A 경찰청의 담당형사들이 도착하자 현장을 떠났다.


( 위의 내용은 클레멘츠 경사의 증언만을 토대로 한것 )


왜 의사들은 4시 25분까지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시체를 발견한 후 30분 넘게 방치했을까?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있은지 20년이 지난 후 당시 먼로의 집으로 출동한 구급대원은 새로운 증언을 했다.


자신이 도착했을때 먼로는 살아있었고 병원으로 옮기려고 하자 그린스 박사가 막아섰다고 한다.


또한 그린스 박사는 먼로를 살리기위해 가슴에 아드레날린 주사를 주사했지만 실패했고

 

먼로는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을 뒷받침할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음 )

 

먼로의 처음 시체 발견 당시 가정부 머레이와

 

그린스 박사의 말에 의하면 방문은 굳게 잠겨져있었다고 한다.

 

 

 

 

[ 사진29. 마릴린 먼로의 침실 ]

 

 

 

방문을 열수 없다고 판단한 가정부 머레이와 정신과의사 그린스 박사는

 

벽난로 부지깽이를 들고 먼로의 침실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이 점을 볼때 먼로가 자살을 하기 전에 방문을 안에서 잠궜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 사진30. 마릴린 먼로의 침실을 깨고 들어간 창문 ]

 

 

 

하지만 음모론가들은 유리가 밖으로 떨어져있다고 주장한다.


창문의 유리가 밖으로 떨어졌다면 침실방안에서 창문을 깬것이란 뜻이며

 

이는 누군가 먼로를 살해한 후 자살로 보이게 끔 현장을 꾸며낸 것이란 말이된다.


현대의 전문가들이 난로 부지깽이를 이용해 창문을 깨는 실험을 해본결과

 

부지깽이의 끝의 구부러진 모양때문에 창문유리가 끝에 딸려나와 안과 밖 모두 떨어지므로

 

창문을 안에서 깼다는 증거가 되진 못한다.

 

 

 

 

 

[ 사진31. 마릴린 먼로의 침실 차을 깬 부시깽이 같은 모양 ]

 

 

[ 사진32. 마릴린 먼로의 침실 현장 시진에서 발견된 창문 유리조각 (화살표 참고) ]

 

 

 

현장사진에서 발견된 위의 유리조각 사진을 보면 깨어진 창문 바로 밑에 위치한다.


때문에 먼로를 죽인후 누군가 자살로 위장하기위해

 

창문을 안쪽에서 깼다는 음모론의 주장의 근거는 사라진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찍혀진 먼로의 죽은 당시 모습을 살펴보자.

 

 

 

 

[ 사진33. 왼쪽 마릴린 먼로의 시신 ]

 

 

 

사진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면 먼로의 몸은 엎드린채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마릴린 먼로의 부검보고서에 따르면 시반이 오른쪽에 나타나있다.


이것은 먼로가 당시 엎드린채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사망한 것이란 말이며

 

누군가 먼로의 시체의 자세를 바꿔 놓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건 현장을 처음 발견한 의사 둘의 증언에 따르면 먼로의 손에는 수화기가

 

들려 있었다고 했지만 경찰이 찍은 사진에는 수화기를 든 먼로의 손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먼로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면 자살을 선택하면서 도움을 요청했거나

 

유언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도 자살시도 경험이 여러번 있는 먼로의 경우 자살시도후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걸어 생명을 건지곤 했기때문이다.


정말 자살이라면 계획된 자살일까?

 

자살 전날 넴뷰탈을 구매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평소 수면제를 자주 복용하던 먼로는 많은 수면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넴뷰탈은 수면용으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자살하려는 용도로 샀다는 것이 추정 가능해진다. 그리고 평소 침실문을 잠구지 않았던 먼로는

 

자살하는 날 자신의 침실 방문을 걸어 잠궜다. 사진속의 마릴린 먼로의 침실은

 

그 어떤 장식물도 없이 적막한 것을 보아 우울증이 꽤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사진34. 마릴린 먼로의 침실 ]

 

 

부검에 따른 먼로의 사망추정 시간은 10시 ~ 새벽 2시 사이이다..


실제 먼로가 약물을 복용한 시간은 오후 8시 ~ 새벽 1시로 추정된다.

 

그리고 넴뷰탈을 복용한 뒤 1시간 30분 ~ 2시간 정도 먼로는 살아있었을 것이다.


먼로가 마지막으로 전화로 대화를 나눈 상대는 피터 로포드였다.

 

로포드는 1984년 사망했으며 당시 먼로의 목소리는 흐릿했다고 말했다.

 

이제 음모론의 중심인물인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마릴린 먼로의 관계를 알아보자.


마릴린 먼로의 오랜 친구 로버트 슬레이처는 AP통신에서 일할 때

 

마릴린에게 존 F. 케네디와의 관계를 들었다고 한다.

 

 

 

 

[ 사진35. 마릴린 먼로와 로버트 슬레이처 ]

 

 

 

하지만 소문이었기때문에 정식으로 AP에서 다룰 수는 없었다.


( 마릴린 먼로의 친구 로버트 슬레이처는 그녀의 자살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시체로 발견되기 전 금요일 밤에 먼로를 만난 그는 먼로가

 

다음 주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달 계획까지 이야기했다고 한다. )

 

존 F.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스캔들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둘은 케네디의 대통령 선거 기간에 피터 로포드의 파티에 갔다가 처음 만났다.

 

 

 

 

[ 사진36. 존 F.케네디와 피터 로포드 ]

 

 

FBI의 존 에드가 후버 국장 역시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를 만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버 국장은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케네디의 여자관계를 추적해왔다.

 

 

 

 

[ 영상2. 존 F.케네디의 생일축하곡을 부르는 마릴린 먼로 ]

 

 

하지만 둘의 관계는 케네디의 생일파티가 있은 다음 주에 끝나버렸다.


FBI의 자료에 따라면 후버 국장이 생일파티 다음 주 목요일에 케네디를 만났다.

 

 

 

[ 사진37. 존 F.케네디와 후버 국장 ]

 

 

그리고 바로 그 때부터 마릴린의 대통령 집무실 출입이 금지됐다.


마릴린의 오랜 친구 진 카르멘의 주장에 따르면 존 F.케네디가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에게

 

마릴린에게 잘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사진38. 진 카르멘 ]

 

 

 

당시 케네디의 결별선언에 마릴린은 화가 나있었지만 케네디와 정반대인

 

귀엽고 열정 넘치는 로버트와 서로 사랑에 빠졌다.

 

 

 

 

[ 사진39. 로버트 케네디 ]

 

 

 

진 카르멘과 로버트 슬레이처는 마릴린이 로버트 케네디와 나눈 모든 대화를 기록했다고 주장했다.


이 기록은 후에 레드 다이어리로 알려졌다. 이 다이어리에는 둘의 사적인 대화 외에도

 

각종 정치적, 외교적인 기밀이야기도 적혀있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 다이어리를 보고 당장 없애버리라고 마릴린에게 굉장히 화를 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 아서밀러와 결혼하고 그의 친구들을 만나는 행동들때문에 안 그래도 마릴린은 FBI의 요주의 인물이었다.

 

 

 

 

[ 사진40. FBI의 마릴린 먼로의 파일 중 일부 ]

 

 

1962년 여름, 마릴린은 자신이 의심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고

 

 집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다고 의심해서

 

항상 동전을 가득 들고 다니며 공중전화를 이용했다고 한다.


CIA의 일부 공개된 자료에서 도널드 울프는 1962년 8월 3일,

 

CIA가 말리린의 집을 도청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또한 CIA는 레드 다이어리의 존재도 시인했다.


( 레드 다이어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 사진41. CIA의 레드 다이어리에 대한 기록 ]

 

 

 

1962년 7월, 마릴린이 죽기 몇주전 미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FBI가

 

자신과 마릴린 먼로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FBI의 7월 7일자 메모를 보면 로버트가 마릴린과 통화하기 거부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마릴린의 전화 기록을 보면 그녀는 법무부에 17상의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의 일방적인 거부로 인해 마릴린 먼로는 매우 분노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이번엔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다면서 월요일까지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기자회견을 열어 전부 폭로해버리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1962년 8월 4일 토요일은 마릴린 먼로의 생애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로버트 케네디는 가족들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호텔에 묵고 있었다.

 

마릴린 먼로의 가정부 머레이의 사위 노만 제프리는 당시 마릴린의

 

집안을 일을 봐주고 있었다. 노만 제프리는 1992년이 되서야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제프리의 이야기에 따르면 로버트 케네디와 그의 처남 피터 로포드가

 

오후 3시 ~ 4시경 마릴린의 집을 찾아왔다고 한다.


로포드는 머레이와 제프리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고 30분쯤후 돌아와 보니

 

마릴린은 매우 화를 내면서도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 사는 그린스박사를 불러 겨우 마릴린을 진정시킬수 있었다.

 

마릴린은 그린스 박사가 떠난뒤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제프리는 밤 10시쯤 로버트 케네디가 낯선 사람 2명을 데리고 다시 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머레이와 제프리는 다시 자리를 비켜준뒤 집에 돌아왔을때

 

손님방에 누워있는 마릴린을 보았다고 한다.


얼굴은 파랗고 숨을 쉬지 않아 제프리는 마릴린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제프리의 주장에 따르면 마릴린 먼로는 일요일 밤 10시 45분쯤에 손님방에서 숨졌다고 한다.

 

마릴린이 죽은지 채 30분도 안돼 경찰이 도착해서 자살시나리오를 짠뒤

 

시체를 손님방에서 침실로 옮기고 방문을 잠궜다.


( 위의 내용은 제프리의 증언에 따른 내용 )

 

                       1962년 8월 5일 일요일 늦은 아침, 로버트 케네디와 그의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의 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 사진42. 1962년 8월 5일 로버트 케네디 ]

 

 

 

로버트 케네디는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L.A에서 로버트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경찰관의 증언도 있었다.


경찰 린 프랭클린은 일요일 자정쯤 속도위반을 한 차랑을 세웠는데 로버트 케네디의 차였다고 한다.


운적석에는 처남 로포드가 있었고 차안에는 마릴린의 정신과 의사 그린스 박사까지 총 3명이 있었다고 한다.


( 오랜기간이 지난후 증언함 )

 

마릴린 먼로는 그 어떤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마릴린이 죽자 노구치 박사는

 

그녀의 모든 내장기관과 세포들은 보관했으나 곧 모두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된 검시는 물론이고

 

대배심도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증인이 선서를 하고 심문받은 적도 없었다.

 

마릴린 먼로의 시체는 전 남편 조 디마지오에게 인도됐다. 장례식은 8월 8일 목요일 거행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몰려들었지만 조 디마지오는 친구와 가족 26명만으로 장례식을 치뤘다.

 

 

 

 

[ 사진43. 마릴린 먼로 시작과 끝 ]

 

 

 

그로부터 13일후 공식적인 기자회견이 열렸고 마릴린 먼로의

 

사인은 약물과다복용에 의한 자살이라고 발표됐다.


과연 마릴린 먼로는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음모의 희생량이 된 것일까?

 

판단의 각자의 몫이다.

 

 

 

참고 : 히스토리채널, 디스커버리,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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