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서울쌤]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8월8일>

 

 

 

 

 

[ 사진1. 김대중 납치사건 ]

 

 

 

 

[ 영상1. 김대중 납치사건 ]

 

 

▶ 2008년   그루지야 사태 (러시아-그루지야간 군사분쟁) 발생

 

▶ 2005년   제5차 남북 해운실무접촉(파주 홍원연수원: 2005.8.8~8.10)

 

▶ 2003년   대구 경부선 철도 하행선에서 무궁화호 열차와 화물열차 추돌, 90여명 사상

 

▶ 2003년   방일영 조선일보 前회장 별세

 

▶ 2002년   한나라당,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13석 중 11석 당선. 과반의석 확보

 

▶ 1997년   헌팅턴병 환자의 뇌세포 사인 발견

 

▶ 1992년   여자핸드볼,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구기사상 첫 올림픽 2연패

 

▶ 1991년   美 우주인 제임스 어윈 사망

 

▶ 1991년   유엔안보리, 남북한유엔가입을 총회에 권고하는 결의안 채택

 

▶ 1990년   황석영씨 범민족대회남측추진본부 대표자격으로 평양 방문

 

▶ 1989년   14세 바둑천재 이창호, KBS바둑왕배에 올라 세계최연소 타이틀 쟁취

 

▶ 1989년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에 선출

 

▶ 1988년   버마 8888항쟁

 

▶ 1984년   84년 LA올림픽 복싱서 편파판정, 본국 추궁

 

▶ 1983년   과테말라에 군부쿠데타 발생

 

▶ 1983년   모하마드 말레이지아 수상 내한

 

▶ 1981년   미국 중성자탄 생산 결정

 

▶ 1980년   독립운동가 김홍일 선생 사망

 

▶ 1979년   콜레스테롤과 지방산의 대사작용 연구로 노벨 생리학, 의학상을 받은 리넨 사망

 

▶ 1975년   한국-싱가포르, 국교수립

 

▶ 1975년   포르투갈, 좌경내각 출범

 

▶ 1974년   닉슨 미국 대통령 사임 발표 (한국시각-9일 정오 10시 사임)

 

▶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 1969년   무용가 최승희 사망

 

▶ 1969년   MBC TV방송국 개국

 

▶ 1967년   아시아 5개국 동남아국가연합(ASEAN) 결성

 

▶ 1966년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이 중국 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회 총회에서 채택

 

▶ 1960년   제2공화국 성립

 

▶ 1960년   백낙준 참의원 의장, 곽상훈 민의원 의장 피선

 

▶ 1958년   함석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 1958년   미국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 북극 잠항 횡단 성공

 

▶ 1955년   증권시장 개장

 

▶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서울에서 가조인

 

▶ 1953년   소련, 수소폭탄 보유 공표

 

▶ 1949년   이승만-장개석 진해에서 정산회담

 

▶ 1949년   부탄, 영국으로부터 독립

 

▶ 1947년   조선임시정부 약헌 입의(立議)통과

 

▶ 1945년   소련군, 경남일대로 진격

 

▶ 1945년   소련, 일본에 선전포고

 

▶ 1942년   인도, 국민회의파 영국 철퇴결의안 가결

 

▶ 1942년   미국-일본, 제1차 솔로몬해전

 

▶ 1936년   조선불온문서 임시취췌령 공포 시행

 

▶ 1925년   KKK단 제1회 전국대회

 

▶ 1907년   각부에 일인차관 임명 시작

 

▶ 1901년   미국의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출생 - 사이클로트론을 발명해 193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 1900년   제1회 데이비스컵 선수권대회 개막

 

▶ 1898년   프랑스의 풍경화가 부댕 사망

 

▶ 1877년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사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 1819년   미국 언론인 찰스 데이너 출생

 

▶ 1792년   프랑스 루이16세 폐위, 왕정 붕괴

 

▶ 1072년   중국 시인 구양수 사망

 

 

 

 

[ 사진2. 김대중 납치사건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1973년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되어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이다. 사건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요원

5명에게 납치되었다. 수장(水葬)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1973년 8월13일 밤 10시에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

 

 

 

 

[ 사진3. 김대중 납치사건 , 왼쪽-박정희,오른쪽-김대중 ]

 

 

 

- 박정희의 김대중 혐오 -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맞붙기 전부터 자신을 견제하며 치고 올라오는

김대중을 몹시 싫어했다. 1967년 총선에서는 자신이 목포에 출마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포에 출마하는 김대중을 낙선하기 위해 친히 목포 군중집회의 연사로

나서고 국무회의를 목포에서 열고 목포를 위한다는 온갖 좋은 공약을 내걸었다.

 

대한민국 전반으로는 공화당의 압승이었지만 그렇게 신경을 썼던 목포에서는 김대중이

2000표 차이로 당선되어 버린다. 박정희의 김대중 공략이 실패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총선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하였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고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밖의 고전끝에 김대중에게 간신히 숭리를 한다.

박정희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당시 600억 가량의 자금을 투입하여 투표를 조작했음에도 부구하고

김대중과의 표 차이가 94만표 차이 밖에는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1년 선거는 김대중이 다시 4년 후 자신과 맞붙게 된다면 그땐 정말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겠다는

것을 박정희 자신이 몸소 체험한 계기였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1971년 선거는 김대중이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라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 김대중 납치과정

 

 

 [ 사진4. 김대중 납치사건 ]

 

박정희는 이 때부터 김대중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한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김대중이

일본으로 출국하는 1972년 10월까지 1년 반 동안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김대중 동향보고가 무려

1100여건이었다. 이는 대략 하루 두번꼴로 박정희가 얼마나 김대중을 밀착감시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대중은 선거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영구적으로 옆구리 부상을 당하는 등의

남는 사고를 연속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김대중은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간다.

김대중이 일본으로 간 직후 박정희는 1972년 10월17일 초헌법적 비상조치를 통한 유신헌법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켜 유신독제 제4공화국을 탄생시킨다. 이를 보고 국외에 체류 중 이던 김대중은

국내로의 복귀를 포기하고 일본에 남아 해외 반 유신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한다.

 

 

 

 

[ 사진5. 김대중 납치사건 용금호 ]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1973년 7월6일 재미교포들의

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명예회장이 된다.

일본에서도 한민통을 결성할 준비를 하고 결성 날짜를 1973년 8월13일로 정한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희를 자극했다. 김대중의 행동에  부담을 느낀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일본에 비밀요원을 급파하여 김대중이 일본 한민통 조직을 설립하기 5일전인 1973년 8월8일에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바다에 빠뜨리려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미국과 일본정부의 개입(특히 미국정부)으로부터 실패하고 만다.

김대중이 서울로 돌려보내진 후 정부는 김대중을 5일동안 감금하고, 가택연금을 시킨다.

 

 

 

 

 [ 사진6. 김대중 납치사건 ]

 

 

 

- 김대중 납치사건 결과 -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외의 비난여론은 일제히 박정희에게 집중되었다. 정부는 공권력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시청에서 증거를 잡고 사건관련자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정부는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일본은 이 행위를 국권 침해로 판단하며, 한국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의 조치를 취한다. 사태가 심각해 지자

박정희는 일본에게 보내는 친서와 함께 국무총리 김종필을 일본으로 보내게 된다.

 

김종필은 "우리 대통령(박정희)께서 당신이 난처하지 않게 배려하실 것이니 앞으로 '김대중 사건'은

완전히 잊어주기 바란다" 라고 말하며 뒤돈을 넣어주었다. 이로써 한일 정부는 남치 사건을 적당히

마무리 했다. 아사히 신문 등에서 비방기사를 내었지만,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정부간의

타협을 통해 관계는 다시 정상화 되어갔다. 박정희는 미국, 일본 그리고 국내 여론을 의식하여

이후로는 김대중에게 쉽사리 손을 되지 않았다. 대신, 지역차별 등으로 김대중을 간접적으로 공격한다.

 

 

 

- 김대중 납치사건 의혹 -

 

1. 김대중의 납치가 박정희의 지시인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의 자발적 행동인가??

2. 월래 계획이 김대중? 납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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