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

 

 

[ 영상1.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

 

 

 

 

▶ 2009년   강동림, 동부전선 3중 철책선 절단 후 월북

 

▶ 2005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제26주기 추도식(국립현충원)

 

▶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월드시리즈 우승

 

▶ 2005년   10.26 국회의원 재선거

 

▶ 2005년   안중근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서울시교육원 강당)

 

▶ 2004년   강원도 철원 최전방 철책선 절단 사건 발생

 

▶ 2002년   살인용의자 조모씨 검찰조사받다 사망

 

▶ 2001년   마이크로소프트(MS), 새로운 운영체제 `윈도XP` 출시

 

▶ 2001년   미국, 차세대 전투기에 록히드 마틴의 'X-35' 선정

 

▶ 2001년  경복궁 흥례문 복원

 

▶ 1998년   국제지뢰제거회의가 2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막(~28일)

 

▶ 1996년   김경호 일가 귀순

 

▶ 1983년   서울시교육위 외국어고등학교 첫선

 

▶ 1982년   이승복 기념관 개관

 

▶ 1982년   유엔총회, 이스라엘 축출안 부결

 

▶ 1979년   삽교천 방조제 준공

 

▶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 천연두 근절 선언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 1977년   한국-요르단, 문화협정 체결

 

▶ 1977년   미국-소련, 군사교관 교환

 

▶ 1975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미국 첫 방문

 

▶ 1974년   극작가 박진 사망

 

▶ 1963년   흐루시초프 달 정복경쟁 폐기를 선언

 

▶ 1962년   인도 대통령, 중공의 국경선 공격으로 비상사태령 공포

 

▶ 1959년   소련, 달 뒷면사진 공개

 

▶ 1959년   전국노협(勞協) 창립총회 개최

 

▶ 1958년   중국군 북한서 철수 완료

 

▶ 1957년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 사망

 

▶ 1955년   베트남공화국 출범 (고 딘 디엠 대통령 취임)

 

▶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법 공포

 

▶ 1953년   한국정치회담의 예비회담 판문점서 개최

 

▶ 1951년   영국 총선거, 보수당 승리로 처칠 6년 만에 재집권

 

▶ 1950년   유엔군, 원산 상륙

 

▶ 1950년   국군 압록강변 도달

 

▶ 1948년   국부군, 만주 철수 개시

 

▶ 1947년   캐시미르분쟁 시작

 

▶ 1916년   프랑스 정치가 미테랑 출생

 

▶ 1909년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 1906년   이갑 등 서우학회 조직

 

▶ 1895년   역법 개정. 태양력 사용

 

▶ 1850년   월남 이상재 출생

 

 

 

 [ 사진2.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궁정동 ]

 

 

 

- 10.26 사건,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입니다.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 주장이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습니다. 그럼 사건의 배경과 사건의 순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진3.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왼쪽-빅정희 , 오른쪽-김재규 ]

 

 

 

 

10·26 사건(十二六事件) 또는 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이다. 십이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 사진4.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궁정동 ]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 사진5.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궁정동 ]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 사진6.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총을 쏘아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쏘았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은 후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서 멈추었다. 머리의 총격이 치명상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

           라고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 역시 확인 사살했다.

 

 

 

[ 사진7.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왼쪽-심수봉 , 오른쪽-신재순 ]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당했다.

 

 

 

[ 사진8.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김재규 재판 현장 ]

 

 

 

10.26 사건의 원인

 

김재규는 10월 유신으로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 -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 -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번째 -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째 -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

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

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 사진9.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 김재규 재판 현장 ]

 

 

 

미국의 대응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 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 사진10. 박정희대통령 영결식 ]

 

 

 

사건의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미국으로 이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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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7일] 인서울쌤과 함께 떠나는 오늘의 역사

 

 

 

 

 

[ 사진1.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안경을 고쳐 쓰고 있음 ]

 

 

 

 

 

▶ 2005년   차세대 전투기 F-15K 한국 도착

 

▶ 2002년   일본서 인체통신장치 개발

 

▶ 2002년   인터넷주소자원관리 공청회 개최

 

▶ 2002년   강화도에서 돼지콜레라 발생

 

▶ 2001년   케냐 은데레바, 여자 마라톤 세계신기록

 

▶ 2001년   `철인` 칼 립켄 주니어, 메이저리그 은퇴

 

▶ 2001년   미국,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군사지점 공격

 

▶ 1998년   '매슈 사건' 발생, 동성애자 매슈 셰퍼드(21) 나체에 구타당한 채로 발견

 

▶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일본 방문(~10.10)

 

▶ 1998년   탤런트 이낙훈씨 별세

 

▶ 1994년   한국-체코 문화교류협정 체결

 

▶ 1993년   흑인여류작가 토니 모리슨 모벨문학상 수상

 

▶ 1992년   미국-캐나다-멕시코, 북미자유무역협정 가조인

 

▶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한

 

▶ 1982년   서울시교육위원회, 1983년에 외국어고교 신설하기로

 

▶ 1982년   중국, 잠수함발사 미사일(SLBM)실험 성공

 

▶ 1982년   미국-소련 전략무기감축회담(START I) 재개

 

▶ 1981년   한국-일본 대륙붕 공동개발. 7소구 시추 개시

 

▶ 1980년   대학교수 겸직금지조치 해제

 

▶ 1980년   내무부, 인구 2만이상 면을 읍으로 승격

 

▶ 1979년   김형욱 前 중앙정보부장 파리서 실종

 

▶ 1978년   충남 홍성 지진 발생 (가옥 2800여채 균열, 강도 4)

 

▶ 1975년   동독-소련 새 우호조약 조인

 

▶ 1970년   닉슨, 인도차이나휴전 5개항 제시

 

▶ 1970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취임

 

▶ 1969년   진주 남강 다목적댐 준공

 

▶ 1964년   한국-우루과이, 국교 수립

 

▶ 1961년   프랑스원자력위원회, 정부의 지상핵실험 완료를 발표

 

▶ 1961년   일본-소련 국교회복 공동선언

 

▶ 1961년   한국음악협회 발족

 

▶ 1959년   미국 테너 가수 마리오 란자 사망

 

▶ 1958년   파키스탄서 쿠데타

 

▶ 1957년   한미우호통상-항해조약 비준서 교환

 

▶ 1955년   앤더슨, 흑인 첫 뉴욕 오페라단에

 

▶ 1950년   유엔총회,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설치 결의

 

▶ 1950년   전남일보 창간

 

▶ 1949년   동독,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 1946년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

 

▶ 1940년   독일군, 루마니아 진주

 

▶ 1910년   일제, 조선귀족 75인에 작위 수여

 

▶ 1894년   미국의 의학자 겸 문필가 올리버 웬델 홈스 사망

 

▶ 1886년   미국 선교사 스크랜튼, 서울에 병원 개설

 

▶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성립

 

▶ 1849년   '검은 고양이' 원작자 에드거 앨런 포 사망

 

▶ 1747년   프린스턴 대학교의 초대 총장 디킨슨 사망

 

▶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신성동맹 함대, 이슬람 함대 격파

 

 

 

 

 

[ 사진2.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 박정희 의장과 김형욱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박정희대통령 시절 최측근으로 무자비한 권력을 휘둘렀고, 권력에 위해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전 중앙정부부장 김형욱 죽음 관련 제기되는 주장들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김 전 부장이'실제로 사망을 했는가'에 대한 의문도 풀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을 전제로 '마피아에 의한 살해설'과 '일본 납치 살해설'등 소문도 떠돌았다. 최근에는 '김형욱 암살에 실제 참여했다'고 주장하는 한 중앙정보부 공작원 출신의 증언을 바탕으로 '프랑스 파리 인근 양계장 살해설'이 제기됐고, 이후 비밀해제된 美국무부 비밀분서를 근거로 '사우디 납치 살해설'도 급부상했다.

 

 

 

 

 [ 사진3.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육사 8기 동기생인 김형욱과 기념사진 ]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죽음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 시사저널 "파리 교외 양계장서 살해"= 지난 4월 주간지 시사저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 교외의 양계장에서 닭 사료 분쇄기에 넣어져 끔찍하게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시사저널은 당시 김 전 부장 암살에 참여했다는 중앙정보부 특수비선공작원 출신 이모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김 전 부장이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납치된 뒤 파리 교외 양계장의 분쇄기에 넣어져 닭 모이로 처리됐다"고 보도했다. 잡지에 따르면, 당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돼 특수 암살훈련을 받은 이씨 등은 1979년 10월 7일 밤 파리의 한 카지노에 딸린 레스토랑 앞에서 술에 취한 김 전 부장을 마취시켜 파리 북서쪽 4km 외곽의 한 양계장으로 데려가 살해했다. 잡지는 "이들이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양계장 사료 분쇄기를 택했다"고 보도했다.

◇ 美 국무부 문서"파리 아닌 사우디서 실종"= 최근 비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 '주간 동향 보고서 한국판'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종적을 감췄고, 실종 시점도 1979년 10월 7일이 아니라 10월 9일인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미 국무부가 1980년 2월 29일 주한 미 대사관에 보낸 이 문서에 따르면, 김 전 부장은 한인 남성 한 명과 79년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에 갔다. 보고서는 이어 "그러나 거기서부터는 행적이 묘연하다"고 적고 있다. 이는 "중정 특수공작원이 파리 외곽 양계장에서 분쇄기로 살해했다" 등의 김씨 프랑스 살해설을 부정하는 것이다.보고서는 "일본 정부가 파리 경찰을 상대로 김씨 실종 사건 정보를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워싱턴 주일대사관이 우리(국무부)에게 전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또 "프랑스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종결했다"고 밝혀, 당시 프랑스 경찰이 김씨의 실종 사건을 상세히 조사했음을 암시했다. 이에 대해 김씨 사건을 조사 중인 오충일 국정원 과거사위원장은 "그런 문서의 존재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 김 전 부장 며느리"한국으로 납치돼 살해"= 미국 뉴저지주 알파인에 살고 있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맏며느리 김경옥(49)씨는 지난 3월 "시아버님이 한국으로 납치돼 피살됐다는 얘기를 남편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도 아버님이 서울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믿고 있다"면서 "숨진 남편은 '이모씨(실종 사건 당시 파리대사관 공사)가 모든 일을 다했다'고 말하곤 했다"고 주장했다.

◇ 기타= 지난 3월 한겨레 신문은 전직 국정원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은 당시 중정이 마피아를 통해 청부 살해했다"고 보도했다. 김 전 부장의 회고록을 집필했던 김경재 전 의원은 "김 전 부장이 청와대 지하실에서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장에 의해 살해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 김형욱 실종 당시 모 언론사 파리주재 특파원을 지낸 박모(71) 씨는 "김형욱은 당시 파리주재 한국대사관 고위 인사들이 외국의 살인청부업자에게 시켜 살해한 뒤 센 강에 시체를 버린 것으로 알고있다"고 증언했다.

◇김형욱은 누구= 1963년부터 6년 3개월간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한때 권력의 2인자로까지 불렸다. 육군사관학교 8기로 5.16 쿠데타의 주역이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나면서 정권으로부터 배척당해 73년 결국 미국으로 망명했다. 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당시 54세.
김씨는 박정희 정권과의 사이가 틀어진 이후 반독재 투사를 자처했다. 박동선 로비사건을 조사중이던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 정권을 성토한 그는 79년 제3공화국과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썼다. 김경재 전 의원은 1980년대'박사월'이란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을 펴내 베스트셀러로 만들기도 했다.  부인 신영순(74.미국 거주)씨는 88년 국회에 김씨의 실종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냈으나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자 90년 서울가정법원에 실종선고 신청을 냈다. 이어 81년 미 법원은 가족의 소송에 따라 그에 대한 사망선고를 내렸다.

 

 

 

 

 [ 사진4. 5.16혁명 성공 후 중앙청에 나타난 박정희, 박종규, 김형욱, 차지철 (좌측부터) ]

 

 

 

 

진실위가 밝힌 김형욱 납치·살해 재구성

[김형욱 실종사건 주요 일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26일 오전 11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과 관련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다음은 진실위가 밝힌 중간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한 주요 사건일지.

▲1973.4 = 김형욱 미국 망명
▲1977.6 = 김형욱 NYT 기자회견(2일)ㆍ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22일)서 박정희 대통령 비난
=박 정권, 민병권 무임소장관 미에 파견, 김형욱 설득.회유
=박 정권,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 3차례 개최
▲1977.12 =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1978.12 = 박 대통령, 윤일균 전 중정해외담당 차장에게 김형욱 회고록 관련 협상 추진 전화 지시
▲1979.4 = 일본 군소 출판사, 김형욱 회고록 출간
▲1979.9 = 이상열 주프랑스 중정 거점장, 김재규 중정부장 지시로 신현진(가명) 및 이만수(가명)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에게 김형욱 살해 임무부여(신씨 진술)
▲1979.10 = 신현진, 이상열 공사 접촉, 살해 위해 미화 10만달러.권총 준비요청
▲1979.10.1 = 김형욱 단신으로 프랑스 도착
▲1979.10.7 = 이상열 공사, 돈을 빌려달라는 김형욱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 이 공사와 신현진의 지시로 3국인 2명, 파리 샹젤리제 거리 '리도극장'앞에서 김형욱을 차량에 태운 후 뒤에서 가격, 파리 근교에서 소음기가 달린 소련제 권총으로 살해후 사체를 유기하고 그 위에 낙엽더미로 덮음
▲1979.10.13 = 신현진,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형욱 처리 결과 보고 (신현진 진술)
▲1979.10.18 = 이상렬, 은밀 귀국,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 10.19일 파리 귀환

1979년 9월 어느 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 프랑스로 갈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주(駐)프랑스 중정 거점장이던 이상열 공사에게 김 전 부장 살해를 은밀히 지시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최고책임자로부터 직접 중대임무를 부여받은 이 공사는 9월말 파리에 머물고 있던 5∼6명의 중정 연수생들을 자택으로 불러 살해 가담자 물색에 들어갔다.
이 공사는 여기서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야"라고 이들을 질책하며 정의감을 부추기는 한편, 북한 관련 보고서를 제출토록 해 누가 적임자인 지 판단했다. 신현진(가명)과 이만수(가명)라는 두 젊은이가 그의 눈에 들었다. 10월 1일. 이 공사는 비밀리에 귀국해 김 중정부장을 만나 김형욱 납치.살해에 대한 구체적인 공작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이 공사는 김형욱을 살해할 도구로 쓰기 위해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김 중정부장으로부터 넘겨받았다.
다시 파리로 건너 온 이 공사는 자신이 점찍은 신현진, 이만수를 시내 모 카페로 조용히 불러내 "김형욱이 곧 파리로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있고,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그냥 놔둬서는 안된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넌지시 운을 떼었다. 중정 직원들은 김 전 부장을 국가를 배신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터라 이 공사의 말은 이들의 애국심에 불을 지폈다. 며칠 뒤 이 공사는 더욱 미더웠던 신현진을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푸케 카페로 몰래 호출했다.

"자네에게 부여할 임무가 있네. 일단 임무를 전달받고 나면 자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네. 이 일은 자네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 김재규 부장님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데 자네가 적극 해 줬으면 좋겠군".
"목표가 김형욱이죠?". 임무를 직감한 신현진은 "어려움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 전 부장 살해를 위해 추가적인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신현진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미화 10만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하며 살해 음모에 가담할 것을 약속받았다. 신현진은 같이 임무를 수행할 이만수를 이들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친분을 쌓도록 하는 한편, 파리 시내의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는 등 김형욱을 납치.살해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갔다.

 

 

 

 

[ 사진5.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 당일 상황 재구성과 실종사건 관련 발언 ]

 

 

 

드디어 살해 당일인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어.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을 소개 시켜 주기로 하고 만나기로 했다네".

이 공사로부터 다급한 전화 받은 신현진은 이 공사에게로 달려갔다.

"두 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을 오라고 했어.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일꾼들을 어서 부르게".

 

신현진은 즉각 이만수와 3국인 친구 2명을 샹젤리제 거리로 불렀다. 이들 5명은 이 공사가 몰고나온 관용차인 '푸조 604' 안에서 살해 계획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이만수는 미화 10만달러가 든 돈가방을 들고 개선문 근처 호텔방으로, 나머지 4명은 김형욱을 만나러 리도 극장 인근으로 차를 몰았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형욱은 카지노에서

며칠 밤을 샌 듯 초췌한 모습이었고 술 까지 마신 듯 취기까지 감돌았다. 이 공사는 제3국인 2명을 돈을 빌려줄 사람이라고 속이고 김 전 부장을 자신이 앉아있던 조수석에 태운 뒤 자리를 떴다. 그들을 태운 차가 전조등을 밝힌 채 어둑어둑해진 파리시내를 뚫고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가던 찰나였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3국인 중 한 명의 주먹이 김 전 부장의 머리를 강하게 가격했고, 김 전 부장은 이내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승용차는 유유이 파리 시내를 빠져나와 인적이 드문 작은 숲속에 도착했다. 신현진은 차에서 대기하고 3국인 친구 2명이 실신한 김 전 부장을 끌고 50m 가량 떨어진 숲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김 전 부장을 내려놓은 뒤 주저없이 방아쇠를 7번 당겼고, 그 것으로 끝이었다.  이들은 급한 마음에 주검을 낙엽으로만 감춘 뒤 김 전 부장의 바바리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를 싸서 벨트로 묶어 차에서 대기 중이던 신현진에게 건넸다.

"잘했어". 신현진은 이들에게 한마디를 던진 뒤 곧장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 호텔로 이동해 10만달러가 든 가방을 3국인 친구들에게 전하며 "내일 중으로 프랑스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공사는 신현진에게 "수고했다"고 어깨를 두드렸고, 수거해왔던 여권과 지갑을 건네주며 "철저히 인멸한 즉시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신현진은 돌아오는 길에 김 전 부장의 시계는 세느강에 던졌고, 바바리코트와 벨트는 가위로 잘게 썰어 자신이 살던 하숙집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흘후인 10월 10일. 귀국한 신현진이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한테 들으십시오'라는 이 공사의 보고문을 김재규 부장에게 보여주자 그의 얼굴은 환해졌다.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야?".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했다고 하자 김 중정부장은 "괜찮아. 소련제니까 발견돼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받게 될 거니 문제없어"라며 오히려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씩이 든 봉투 두 개씩을 두 손에 쥐어주었다.

"근무하고 싶은 데가 어딘가. 정책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게 어떤가. 내 직속기관이야". 신현진을 신뢰하는 듯한 말을 건네며 김 중정부장은 즉시 비서실장을 불러 "신군을 정책연구실로 발령내라"고 지시했다.

"집은 어디야. 앞으로 장가도 가려면 집이 있어야 겠구만. 한 40∼50평이면 되겠나. 알아보고 전화하게".

 

 

 

 

[ 사진6.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가계도 ]

 

 



김형욱 맏며느리 "진실위 조사 못믿어"
"아버님 피살전 스위스서 전화한 적 있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맏며느리 제니퍼 경옥 김(49)씨는 26일(현지시간) 김 전 부장이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살해됐다는 국정원 진실위의 중간조사 결과 발표와 관련, "남편에게 듣던 얘기와 달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남편으로 부터 아버님(김형욱)이 서울로 납치돼 피살됐거나 사우디로 끌려 갔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파리에서 살해됐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특히 '김형욱씨가 1979년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취리히를 경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는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내용을 지적하면서 "10월 7일 살해됐다는 진실위 발표는 날짜부터 맞지 않아 혼동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아버님이 당시 뉴저지를 떠나 파리에 머물며 도박을 하다 돈을 모두 잃고 스위스로 건너간 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매우 화난 상태에서 집으로 전화를 한 적이 있다"면서 "아버님은 분명히 파리에만 머물지 않고 스위스도 방문했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어 "진실위쪽으로부터 아버님 사건과 관련한 어떠한 조사도 받지 않았으며, 전화 한통 받은 바 없다"면서 "조사가 정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더라"고 덧붙였다. 김씨는 김형욱씨가 실종된 지 1년 뒤인 1980년 그의 큰아들 정한씨와 결혼했으며, 정한씨는 지난 2002년 지병으로 숨졌다.

 

 

 

 

[ 사진7. 왼쪽-김형욱 전 중정보부장의 묘비 , 오른쪽-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생전 모습 ]

 

 

 

월간중앙

 

글 출처 : http://jtbcgolf.joins.com/news/news_view.asp?ns1=15368&page=&news_type=24&mode=&txt_search=&a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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